결혼 대신 동거를 택한다고, 결혼의 번잡함, 번거로움,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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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가 된 이후로로 결혼한 친구가 미혼인 친구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유부녀 친구를 만나면 안부인사를 “그동안 시댁과(남편과) 별 일 없었어?”라는 말로 대신한다. 특히 명절이 끼어 있는 연휴라면 더욱 그렇다. 며칠 전, 역대 최장 추석 연휴를 보낸 친구 몇 명이 모였다. 소소한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한 친구가 쓴맛을 내며 말했다. 친구 남편의 형, 그러니까 친구의 아주버니가 오래 사귄 연인과 결혼 아닌 동거를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40대에 접어든 자식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곁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하니 시부모님은 그것만으로도 안심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인 친구의 기분은 달랐다. “기분이 이상하더라? 명절, 가족행사 때마다 늘 아주버님 혼자 왔는데, 앞으로도 동거하시는 분은 시댁에 올 일이 없겠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분이 묘하게 나빴어. 남편도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데, 그 집에서 아주버님 동거 소식에 심란해하는 건 나뿐인 것 같더라고.”

평소에 결혼 후 시댁과의 관계,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남 같은 아주버님의 동거 선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는 친구를 난 되레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난 유부녀 친구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다.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시댁 식구를 두지 않아도 자잘하게 집안 행사를 챙겨야 하는 건 모두 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출산 이후엔 배가 된다. 그러나 아주버니의 아내가 아닌 동거녀는 결혼 생활의 짐을 질 의무는 사라진다. 때마다 전화로 안부 인사를 할 필요도 없고, 명절, 제사 때마다 시댁에 갈 이유도 없다. 가족 행사 참여 여부도 선택 사항이다.

20대 때만해도 나에게 동거는 남의 일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남들이 하는 건 괜찮지만 내가 하기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언젠간 결혼하겠지, 라고 마음먹은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결혼식의 번거로움, 결혼 생활의 불편함을 내가 잘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자친구와 내가 각자 자취를 시작하면서 동거라는 게 별거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만나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명의 집에서 하루 머물게 된다. 그게 하루, 이틀 늘어나 중간에 연휴까지 끼면 3~4일 이상 함께 지낸다. 일주일 내내 한 집에서 지내지 않을 뿐 이게 동거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그러나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우리가 동거 중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공증된 동거 커플이 되는 건 어쩐지 부담스러우니까. 결혼하지 않은 연인과 해외여행을 가는 것만으로도 혀를 끌끌 차는 보수적인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속일 자신도 없다. 그냥 지금처럼 조용히 지내고 있을 뿐이다. 동거는 그렇게 나와 멀지 않은 단어가 됐다. 그러나 친구 아주버니 커플의 동거 소식을 들으니 그마저도 결혼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남자친구와 내가 극적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동거 커플이 되더라도 따라올 고민이 만만치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럴 바엔 결혼과 동거가 무엇이 다른가 싶다. 그럼에도 동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동거는 여자에게 손해라는 시선이다. 20대 때 동거 경험이 있다는 한 지인은 절친한 친구에게도 남자친구와 동거한다는 말을 못하고, “잠시 우리 집에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쩌다가 동거라는 말이 부정적인 시선을 잡아 먹는 하마가 돼버린 것일까. 특히 유독 여자에게 말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시선은 그저 남의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쉽게 넘길 수도 있는 문제다. 그 다음이 더 문제다. 명절, 제사, 부모님 생신, 가족 행사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양가 부모님이 우리의 동거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말이다. 정식 며느리도 아닌 아들의 동거녀를 그분들은 어떻게 대할 것이며, 나는 어떻게 그분들을 대할 것인가? 결혼하지 않은 지금도 명절 때 뭐라도 챙겨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내가, 뭐든 너무 과하거나 부족한  것을 거부하는 천칭자리인 내가, 어른들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나이브한 내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아스피린을 먹고 싶을 지경이다. 남들의 시선은 적당히 무시할 수 있지만, 가족도 무시할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없다. 그 다음 문제는 누구나 예상하듯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이후다. 동거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둘이 오래 행복하게 동거생활을 했습니다, 로 귀결되지 않았을 때 쓸쓸하고 귀찮은 일들은 따라온다. 동거하고 헤어지는 게 이혼보다 낫다고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생각이라면 동거 경험을 비밀에 부쳐야 할 텐데, 이는 부모님의 공조가 필요하다. 동거 후에 따라오는 찌꺼기 같은 감정을 부모님과 공유, 분담할 수밖에 없다. 서류만 깨끗할 뿐 이혼의 상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동거를 찬성하는 사람도, 나의 남편이나 남자친구, 아내나 여자친구가 과거에 동거를 했었다는 사실을 쿨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결혼한 친구들의 말을 요약해보면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결혼과 동거의 조건은 다르지 않다. 부모님에게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벽히 독립해 서로에게 바라지도 기대지도 않을 것, 일년에 한두 번 왕래하며, 진짜 내킬 때만 연락할 것, 자녀 계획은 오롯이 두 사람이 결정할 것, 가족과의 교류는 각자의 성향에 맡길 것, 효도는 셀프로 하며 상대(배우자)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 집안일(육아 포함)은 철저히 분담할 것. 동거는 더 이상 결혼의 대안이 아니다. 결혼과 같은 선상에 있는 선택 사항이다. 비혼을 택한 대신 동거를 선언한 커플의 속내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결혼, 완벽한 동거가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적인 고민에 따른 결정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완벽한 결혼도, 동거도 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난 최선이 아닌 최악을 피하는 방식으로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동안 난 결혼 후에 출산과 시댁과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친구 얘기를 들으며 연대감을 느꼈다. 그들이 겪는 부조리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최대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그 두려움 때문에 현재 결혼을 유예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다. 나는 더 이상 이 겨울이 그저 계절로 느껴지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시누이 몫까지 김장을 담그는 친구의 고된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마늘을 손수 빻아야 직성이 풀리고, 기독교 신자여도 명절 때는 무조건 제사 음식을 만들어야 하며, 독박 육아를 해도 집에서 노는 며느리가 돼버리는 이상한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혼이든, 동거든, 나에게는 그저 무거운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