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존재 자체로 어떤 이의 영감이 될 수 있는 사람. 이렇게 얘기하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을 것 같지만, 내가 만난 김소영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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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과 팬츠 모두 캐롤리나 헤레라(Carolina Herrera).

솔직히 고백한다.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건 TV에서 우연히 <신혼일기>를 보고 나서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며 영상을 찾아보는 모습에 친근함, 혹은 동질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밀려드는 호기심에 그녀의 SNS를 찾았다.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다가 사진과 함께 올라오는 글을 보게 되었고, 그 글이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인스타그램 속에 담긴 그녀의 문장을 계속 읽어갔다. 누군가의 글에 영향을 받은 게 실로 오랜만이어서 자연스럽게 책방 주인 김소영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눈 소식에 온통 하늘이 흐렸던 어느 날 오후, 책방 ‘당인리발전소’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제 막 새싹을 틔울 준비를 마친 방송인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김소영 아나운서를 마주했다. 마침 책방이 쉬는 날이었다.

책방에 초록 식물이 많네요.
책방을 열 때 식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따로 들여놓기 전에 주변 지인들이나 팬분들이 개업선물로 많이 주시더라고요. 받는 대로 일단 이 공간에 다 두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을 보면 책을 많이 읽으신 게 티가 나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어요. 책 읽는 데 의미를 찾거나 어떤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독서가 저에게 맞는 취미 생활이었어요. 그때와 달리 할 일도 많아지고 바빠지면서는 나름대로 시간을 내서 읽게 됐죠.

그럼 책 읽는 시간은 따로 정해놓는 건가요?
아뇨, 오히려 바쁘기 때문에 책을 더 가까이하게 된 거 같아요. 바빠도 취미 생활은 하고 싶고 나만의 시간도 갖고 싶잖아요. 별도의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 다른 취미 생활과 달리 책은 짬짬이 읽을 수 있잖아요. 이동 중에 5분, 10분, 하루에 틈 날 때마다 몇 장씩만 읽어도 일주일에 한두 권 정도는 읽을 수 있어요.

책을 읽을 때 사소한 습관 같은 게 있나요?
인상 깊었던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그 페이지를 접어놓아요. 정말 좋아하는 책 같은 경우는 포스트잇이 한가득 붙어 있을 정도예요.

책방이 엄청 유명해졌어요. 이렇게 많이 알려지는 게 두렵거나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처음에 오픈할 때는 제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되길 바랐고, 이렇게 유명해질 줄도 몰랐어요. 사실 아직 어설픈 부분이 많거든요. 지난 몇 년간은 ‘내 마음이니까. 난 이 책이 재미있으니까’라며 추천을 해왔거든요. 그런데 책방이 유명해지면서 책을 잘 읽지 않던 분들도 제가 추천하는 책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어주시니까 책임감을 느껴요. 더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생기고요.

책방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정해놓은 원칙이 있나요?
책방에서 책을 오래 읽는다고 해서 나쁘게 보지 않는 것.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서 혼자 편하게 오랜 시간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이곳 역시 도서관이 아니라 책을 판매하는 서점이지만 판매량을 기준으로 책을 들여놓지는 말자고 생각해요.

책방을 하면서 방송도 하고 있어요. 균형 잡기가 어렵진 않나요?
방송은 예쁘게 꾸미고 하는데, 책방에선 화장도 안 하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모습으로 있을 때도 많아서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걱정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방송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과 목장갑 끼고 책을 나르는 책방 주인의 모습이 주는 갭을 더 즐기게 되는 거 같아요. 그 지점에서 스스로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마음은 훨씬 편해지고 몸은 많이 힘들어졌죠. 방송 스케줄이 없으면 서점에서 일하고, 서점 일을 마치면 방송을 하기 때문에 휴일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이에요. 반면에 ‘내가 어떻게 하면 TV에 더 많이 나올까?’, ‘나는 어떻게 해야 더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부터는 해방됐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나요?
사람이요.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가요. 돈을 버는 것도, 책방이 유명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일상이 지칠 때는 어디서 위로를 찾나요?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에 그런 내용이 나와요. 시간을 빨리 쓰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럴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거죠. 오히려 많은 것을 내려놓고 천천히 할 때,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내용이 있어요. 저도 바쁘게 살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모든 것을 멈추고 뒹굴어요. 소파에 하루 종일 비스듬히 앉아서 좋아하는 차와 간단한 티 푸드를 놓고 책을 읽거나 TV를 봐요.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인 거 같아요.

본인 인스타그램에서 2017년의 소원으로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고 빌었다는 문장을 봤어요.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쓰셨더라고요.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이런 사람인데 왜 나를 그렇게 볼까’ 같은 생각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나이가 서른이 넘고 나서 그런 생각으로부터 확실히 자유로워졌어요. 그렇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책방을 연 일이에요. 책방에서 책을 고르고, 책을 소개하는 나는 두말할 것 없이 온전한 나의 모습 그대로니까요. 결혼을 하고 나의 온전한 모습을 봐주는 사람과 산다는 것도 도움이 되는 거 같고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했나요?
갈망했다기보다 저는 사실 그런 삶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던 거 같아요. 남들이 하라고 하니까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을 가고,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또 아나운서가 되고 나서는 ‘좋은 프로그램을 해야지’, ‘좋은 회사에서 멋진 일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회사를 1년 쉬게 되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주도적으로 ‘난 다 내려놓겠어’라는 멋진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상황과 운명이 저를 이런 방향으로 이끈 건데 결과적으로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요즘 새롭게 꿈꾸게 된 것도 있나요?
아직 꿈이 많죠. 더 많은 사람이 서점에서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고, 공간도 좀 넓었으면 좋겠고. 자리가 다 차서 발걸음을 돌리시는 분도 많거든요. 세속적으로 바라는 것도 많아요. 그런데 작년부터는 그냥 하루하루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방송을 봐주는 시청자나 대중도 중요하지만 제 서점에 오는 사람들과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쓰게 돼요.

지금 행복한가요?
네. 책을 많이 읽고 사색을 즐기다 보니까 머리로는 ‘행복’을 아는 편이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껴본 건 참 오랜만이에요. MBC에 다닐 때도 항상 생각했어요. ‘나는 행복하다. 꿈을 이뤄 회사에 왔고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회가 주어졌으니 행복하다’고 머리로는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요즘은 진심으로 행복해요. 노력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시도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동시대를 살고 있는 또래의 여성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주변에서 물어요. 아나운서가 되면 행복한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한지, 혹은 창업을 하면 행복한지 궁금하다고 말이죠. 사실 그 조건들이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큰 차이는 없어요. 예를 들어, 아나운서가 되기 전의 나와 아나운서가 되고 난 후의 나, 아나운서를 그만둔 나 사이에 어떤 객관적인 행복의 차이가 있다기보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행복을 좌우해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의 문제도 분명 있지만, 스스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죠.

 

저도 아직 완벽하지 않아요. 결혼을 하고 방송을 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내 자신이 보여질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부분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에 대한 고민도 있죠. 지금은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 자체에서 행복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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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FAVORITE
상수동에 위치한 책방 <당인리발전소>는 김소영이 큐레이션한 책으로 가득하다. 책 위에 붙어 있는 간단한 추천서는 책에 대한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한다. 책방 곳곳에서 그녀의 취향이나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심지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방탄소년단 정국의 사진도!) 매주 책방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0권을 큰 종이에 적어서 책방 벽에 붙여둔다.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평소 들고 다니는 가방은 그녀가 동대문에 발 도장을 찍으며 직접 제작한
‘책 가방’으로 서점에서도 판매하고 있다. 그 속에 꼭 넣고 다니는 아이템은 연한 퍼플 컬러의 머플러!
수없이 들어왔을 질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에 대해 물었다. 역시 이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고 멋쩍게 웃으면서 스무 살 때 읽은 <사람아 아, 사람아!>를 꼽았고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는 <말이 칼이 될 때>를 꼽았다. 평소 집중이 필요하거나 조용한 분위기가 필요할 때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 앨범을 듣고, 신나고 즐겁고 싶을 때는 역시 방탄소년단의 앨범을 듣는다고 했다. 특히 아끼는 앨범이 있냐고 물어보니 ‘그럼 가장 최근 걸로 할까요?’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