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와 탄식의 2017년 프로야구 시즌이 막을 내렸다. 승자도 패자도 있다. 이번 시즌을 지켜본 야구팬의 복잡하고도 화려한 심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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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야구팬이 된다
야구는 인생의 낭비다. 만약 당신이 아직 야구팬이 아니라면, 당장 야구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권한다. 다시 경고하지만, 야구는 안 보는 것이 낫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기에 영혼이 영원히 고통 받는 야구팬들의 무간지옥에 빠져 있다.
많은 사람들처럼 어릴 적부터 야구 키즈는 아니었다. 오히려 싫었다. 농구의 속도감, 축구의 격렬함과 달리 야구는 너무 길고도 지루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OB 베어스의 원년 팬이었다. 어린 나를 데리고 동대문운동장에도 갔다고 한다.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에 신나서 엉덩이춤을 춰댔다고 엄마는 즐겁게 회고한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내가 야구장에 다시 들어선 것은 대학생 시절, 여자친구와 야구장에 가는 게 평생 소원이라는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야구 한번 봐준다. 이런 느낌으로 간 야구장은 넓었고, 역시나 9회는 너무나 길었다. 하지만 어쩐지 시원했고 치킨은 맛있었고, 무엇보다 남자친구가 행복해했기에 그냥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경기는 초보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타격전이었다. 어느새 닭다리를 들고 환호하는 내가 있었다. 야구는 9회말 투 아웃부터라고 했던가. 9회에 마침내 역전을 했다. 두산 베어스의 승리였다. 그렇게 야구팬이 되었다.
그 이후로 십여 년간, 두산은 어김없이 가을 야구를 했지만 우승은 요원했다. 늘 2등 신세였다. 그렇다고 쉽게 지지도 않는다. 매번 이길 것 같은데, 우승할 것 같은데…, ‘미라클 두산’으로 불리는 근성 넘치는 플레이를 하면서도 매번 한국시리즈의 높은 문턱에서는 번번이 좌절이었다. 2013년 포스트 시즌은 그 목마름의 절정이었다. 리버스 스윕과 처절한 플레이오프를 지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스와 붙었다. 3승 3패의 팽팽함 뒤 단 한 경기만 남기고 있을 때 난 싱가포르로 출장을 떠나야만 했다. 트렁크에 베어스의 모자와 깃발을 넣었다. 우승하면 오차드 로드를 뛰어다닐 생각이었다. 졌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단지 승패뿐만이 아니라 선수의 명과 암, 부상, 사건과 사고, 프랜차이즈라 믿었던 선수의 이적, 결정적인 순간의 실투와 실책도 고통이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기록은 오래 남아서 오랫동안 고통을 준다. 그러나 또한 야구는 환희였다. 두산 베어스는 마침내 2015년, 2016년에 차례로 우승하며 한국시리즈를 2연패했다. 나도 선수들도 울었다.
승리는 탐욕스럽다. 올해는 한국시리즈 3연패에 도전했다. 바닥에서 시작했는데도 언제나 가을 야구를 하는 팀이 자랑스러웠다. 지겠지, 싶으면서도 NC 다이노스와의 타격전을 보며 또 한번을 외쳤다.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리던 날, 나는 또 공항에 있었다. 지면 마지막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스마트폰 TV중계를 붙들고 있었다. 이렇게 맥없이 지는가 했는데 한 회에 내리 6점을 쏟아붓고 있었다. 상대와는 1점 차. 그러나 비행기는 내 맘도 모르고 정해진 시간에 이륙했고, 나는 무려 10시간 동안 이겼을까 졌을까를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잤다. 선행을 베풀면 혹시 이길까 싶어 자리를 바꿔달라는 신혼부부의 부탁도 들어줬다. 승리의 기세를 잡았을 때 현장에서 부르는 응원가가 있다. 제법 비장하다. ‘두산의 승리를 위하여. 오늘도 힘차게 외쳐라. 나가자 싸우자 우리의 베어스.’ 4차전 대패의 날에 나도 잠실야구장에 있었다. 패색이 짙었음에도 우리는 겨우 안타 하나를 기회 삼아 이 응원가를 불렀다. 올해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기에 더욱 소리 높여 불렀다. 수많은 깃발이 펄럭였다. 어둑한 기내 안에서 마음속으로 응원가를 불러보았다. 응원가라는 것은 그 말대로 응원이니까. 미국에서 스마트폰을 켰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아, 야구 뭘까. – 허윤선

 

간절함의 인질들
기아가 우승을 확정한 순간 나는 논산천안고속도로 이인휴게소였다. 광주에서 출발한 서울행 고속버스가 잠시 정차하는 공간이다. 평일 밤, 휴게소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을바람이 드넓은 주차장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제멋대로 드나들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양현종이 긴장한 표정으로 상대방 타자를 바라본다. 안경 속, 작은 눈이 빛난다. 다음 경기 선발로 나서야 하는, 전 경기에서 122구를 던진, 지금 가장 잘 던지는 투수가 9회 1점차에서 올라왔고, 상황은 원 아웃 만루에까지 이르렀다. 매조지에 실패한다면, 전체 시리즈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 누가 글로 썼다고 한다면 자극적이고 작위적이라 욕했을 만한 경기였다. 지금은 모두가 아는 그 결과에, 나는 이인휴게소 주차장 중심에서 사랑을 외쳤다. 기아 없이는 못 살아, 기아 없이는 못 살아, 정말 정말 못 살아.
야구팬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나는 주위에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 내내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 다섯 게임에 끝나서 망정이지 경기가 있는 날에는 온 종일 온갖 걱정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경기 시작 전에는 이길 수 있을까. 경기가 시작한 직후에는 1회를 조심해야 하는데, 찬스에서는 병살타를 치지 않을까, 위기에서는 대량 실점하는 게 아닐까, 이기고 있는 9회에는 갑작스레 역전을 당하지 않을까, 경기가 끝나면 다음 게임은 이길 수 있을까 등등. 이런 심리 상황이니 야구를 보는 것이 사실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내게 응원이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그 일이 벌어지지 않게 비는 정도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꼭 한국시리즈만이 아니라, 시즌의 모든 경기를 그런 식으로 본다. 떨면서, 빌면서, 울면서.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나는 2009년의 기운을 2017년으로 당겨오려 노력했다. 2009년의 히트곡은 2PM의 ‘Again & Again’과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타브라’, 인기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와 <너는 내 운명>, 흥행 영화는 <아바타>와 <해운대>, 베스트셀러는 <엄마를 부탁해>와 <1Q84>…. 그리고 2009년 프로야구 우승팀은 기아 타이거즈. 사실 기아 우승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검색을 해서 기억해낸 것이다. 그때도 이토록 간절했던가. 아마 그랬겠지만, 간절함은 매해 그리고 매일 업데이트된다. 2017년의 간절함은 새로운 것이었고, 아마 내년 즈음엔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의 간절함 때문에 야구를 보는 것 같다. 사실 타이거즈의 우승을 조심스레 점쳤던 순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적 예측을 늘 우선시했지만— 주전 유격수인 김선빈이 인터뷰에서 ‘간절하다’ 말했을 때다. 이기고 싶구나. 이길 수 있다는 게 아닌, 이기고 싶다는 마음…. 보통의 야구팬이 가진 마음일 것이다. 야구팬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매일같이 발생하는 새로운 간절함에 응답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생각보다 간절한 순간이 많지 않다. 야구는 물론 그깟 공놀이일 뿐이지만, 이 세계가 우리에게 빼앗아간 간절함이라는 감정을 대체한다. 그 감정의 인질이 되어 우리는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 야구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속버스는 이인휴게소의 둥그런 출구를 매끄럽게 돌며 도로에 진입했다. 비로소 안도한 (또는 실망한) 야구팬들이 올해 마지막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었다. 이 간절함은, 내년에 또 이어질 것이다. – 서효인(시인,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의 저자)

 

냉탕과 온탕 사이
한마디로 냉온탕, 단짠단짠, 비교체험 극과 극 혹은 명작동화 왕자와 거지 플롯을 연상케 하는 한 시즌이었다. 솔직히 새해를 맞이할 때 팬들의 전망은 “올해도 야구 해봐야 뭐 하겠노…”였다. 하지만 1월 24일, 지난 수십 년간 관심 끊으려 하면 꼭 던져줬던 희망의 고문치고는 어마엄청난 떡밥이 투척됐다. ‘이대호 복귀’. 부산에서 만세 소리가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가장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베란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이언츠 야구모자와 저지가 햇빛을 보게 됐다. 개막만 하면 야구장을 초토화하겠다는 생각으로 노래방에서 부산갈매기를 연습하며 목청을 갈고닦았던 평범한 야구팬은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내 예감이 옳았다며 지난 25년간의 설움은 끝났다며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개막 이후 무려 12일이나 됐는데 1위를 기록했다. 야구 더 하지 말고 이대로 시즌 끝내자는 여론이 형성되는 가운데 ‘봄에 반짝 잘한다’는 ‘봄데’의 전설은 올해도 여지없이 작용했다. 갑자기 5연패를 당하더니 심판들이 담합이라도 한 듯 오심을 날려주시고 이대호의 불방망이가 시차 적응에 실패했는지 제대로 안 터지고, 설상가상 외국인 선수들마저 줄줄이 부상과 부진으로 엔트리에서 3명 전원 빠지는 등의 불상사들이 영화 <오멘>처럼 연쇄적으로 터져주더니 결국 7위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올해도 신 비밀번호 57887…이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야채도 시들시들해진다는 8월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웬일로 자이언츠는 야구를 잘하기 시작했다. 전 상위구단의 에이스들을 상대로 승을 따내는 이소룡 정무문 스타일의 ‘도장 깨기’를 하더니 4위, 가을야구권으로 도약했다. 보통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 이 따위로 쓰면 화려하게 A4용지 뭉치 집어 던짐을 당한다. 36년간 프로야구를 보면서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것만 같은 ‘선발야구’ 를 하더니 심지어 박세웅-조정훈-손승락으로 이어지는 필승조 불펜야구까지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이언츠의 투수진 문제는 딱 두 개였는데 ‘선발과 불펜’이었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자이언츠의 야구를 봐온 올드팬으로서 이들이 ‘반짝야구’를 하는 모습을 수십 번 본 바, 큰 기대 없이 9월을 맞이했으나 이분들이 끝까지 잘하네? 4위에서 3위로 결국 가을야구에 진출하네? 5년 만의 일이네? 그렇다면 그 다음 수순은 우, 우승? 그러나 끝까지 기대를 안게 하고 결국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이 구단 야구의 영원한 법칙. 5년 만의 가 을야구는 그나마 다섯 경기를 ‘만땅’ 채우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8월과 9월의 ‘강한 자이언츠’의 모습을. 우승을 해도 100번은 한 듯한 그 포스를. 1992년 우승 이후로 한 번도 우승한 일이 없어 ‘우승을 한 번도 못 본 부모와 자녀 팬’이 존재하는 이 팀의 팬들은 기대 속에 다음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과연 황재균은 돌아올 것인지, FA를 맞이하는 손아섭과 강민호는 팀에 남아줄 것인지, 한마디로 내년 시즌은 왕자로 시작할 것인지 거지로 시작할 것인지. 아마도 이 글이 실린 <얼루어>가 서점에 나오는 그때엔 결론이 나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시즌을 가끔 보여주기 때문에 자이언츠의 야구는 음악과 함께 국가가 허락한 두 번째 마약임이 틀림없다. 다음 시즌까지 4개월, 내년에도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기 위해 오늘도 날계란을 삼킨다. – 조원희(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