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애정하는 립스틱, 크림을 떠올려보자. 제품을 열 때 울리는 경쾌한 딸깍 소리, 케이스의 묵직한 무게,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오렌지 블라섬 향이 나는 제품을 상상해보자. 아직도 변함없이 매혹적인가? 아직도 당신이 즐겨 쓰는 그 화장품인가?

 

56 뷰티 플라시보

화장품 매장에 들어선 당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하얀 벽면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져 있다면? 여기저기 붙어 있어야 할 모델 광고 이미지도 하나 없는 완벽한 여백의 공간. 이 소박한 환경에 어색해하는 당신은 아마 제 품 진열장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랄지도 모른다. 똑같은 흰색 병에 담겨 나 란히 진열돼 있는 크림, 로션, 세럼 등의 스킨케어 제품들, 그리고 마찬가 지로 동일한 디자인의 매끈한 콤팩트와 립스틱을 본 후에 말이다. 정갈 하다 못해 단순한 이 제품들은 강렬한 광고 이미지, 우아한 포장, 유명 디 자이너의 레이블을 모두 무시했다. 이렇게 심플한 뷰티 제품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이제 막 출현한 몇몇 신생기업은 과감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효과 좋은 화장품의 조건에 정교하게 조각된 병이나 마케팅적인 요소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블리스(Bliss), 솝앤글로리(Soap & Glory)의 설 립자 마시아 킬고어(Marcia Kilgore)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을 재창조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린 모두 귀한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대다수가 실제로 구매하기 힘들죠. 현실화 되기 힘든 소비 열망보다 더 강력한 판타지가 뭔지 아세요? 원하는 제품 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제품들이 너무 비싸거든요.”

킬고어는 ‘원한다면 누구나 살 수 있다’는 콘셉트를 실현하고자 몇 년간 노력해왔다. 그녀는 한국, 스위스의 화장품 제조업체 같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뷰티 랩을 여러 곳 방문했다. 그리고 대중적인 브랜드와 고 가 브랜드의 제품을 한 지붕 아래에서 생산해내는 공장, 즉 화장품 생산 자들을 만났다. 화장품 화학자인 진저 킹(Ginger King)은 “대부분의 경 우 한 공장에서 각각 다른 가격대의 여러 메이크업 제품을 함께 생산합 니다”라고 말했다. “고가 브랜드의 경우 대개 톱 티어(Top Tier)에 속한 포뮬러, 즉 최상의 재료를 첨가해 만들어집니다. 반면 드럭스토어에서 볼 수 있는 화장품은 세컨드 티어(Second Tier)의 포뮬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제품 라인에는 그 라인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 해 추가적인 재료나 색소가 첨가됩니다.”

수백 개에 달하는 공급업체의 제품을 테스팅해본 후 킬고어는 최상위 티 어에 속한 제품들만 골랐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저는 중간상을 없앴 습니다.” 그녀의 목표는 유통, 창고 보관비, 소매 과정 등 가격 인상 요소 를 전부 제거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녀는 일반적으로 25달러에 판매되는 품질의 립스틱과 아이섀 도를 2달러에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 대부분의 경우 소비자는 제품 자 체만이 아닌 소매, 마케팅 캠페인, 패키징에 수반되는 비용까지 지불하게 됩니다.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킹에 따르면“색 조 화장 품은 스킨케어 제품 같은 값비싼 임상실험 과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광고나 패키징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인해 가격이 높게 책정된 다”고 동의했다. 킬고어는 멤버십 기반의 온라인 회사 ‘뷰티파이(Beauty Pie)’를 설립해 가성비와 품질을 둘 다 충족하고자 했다. 킬고어는 이 웹사이트를 작년 겨울 정식 론칭했고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회원 가입하려다 서버가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사람들은 우리 가 제공하는 제품이 진짜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립스틱 가격을 보고 충 격을 받았죠. 저렴한 가격 뒤에 무슨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만으로 론칭 초기의 미지근한 반응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문제는 심리적인 요인. 킬고어는 소 비자들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마케팅 신호를 간과했던 것. <새로운 소비자 심리 해독하기>의 저자이자 소비 심리학자인 키트 얘 로우(Kit Yarrow)는 “소비자들은 제품의 가격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스 스로 합리화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수많은 자료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 죠”라고 말했다. “제품의 높은 가격표와 멋진 포장을 보고 저렴한 제품보다 더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구매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심리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고급스럽고 화려해 보이며 심 지어 더 비싸기 때문에 그 제품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생각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해서 고가의 제품이 탁월한 효과 가 있다고 믿게까지 만든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죠”. 얘로우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30달러짜리 립스틱을 바르면서 입술이 더 도톰해질 수 있다고 믿 는다면, 그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을 보았을 때 실제로 더 도톰해진 입술 을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득력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개념이고 뷰티 업계에서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마음의 속임수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말이다. 뉴욕 피부과 전문 의이자 정신과 의사인 에이미 웩슬러(Amy Wechsler)는 “제품의 효능에 의구심이 있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환자가 그 제품을 찬양하고 만족해 한다면 저는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특정 화장품을 사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도 상승 한다면 그 제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요”. 제품에 감정을 투자 하면 제품의 효과도 더 커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 제품이 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더 꾸준히 열심히 사용할 가능성이 높 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제품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죠” .물론 극대화된 효과라고 해서 지젤과 같은 완벽한 광대뼈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킹은 과거에 화장품 가게에서 일한 경험을 떠올리며 고객 중 적지 않은 수가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며 광고의 모델과 같아질 것이 라고 실제로 믿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극적인 변 화를 할 수 있다고 어느 정도 믿습니다.”

 

“소비자들은 제품의 높은 가격과 멋진 포장을 보고‘ 저렴한 제품보다 더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구매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생각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해 고가의 제품은 효과도 탁월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죠.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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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고어는 이러한 믿음에 다시 한번 정면으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뷰티 파이의 각 제품마다 가벼운 포장과 재활용 병을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 효과는 굉장히 놀랍다고 얘기했다.“ 제품의 질은 유지하면서 다 른 비용과 매립되는 폐기물은 최소화한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소비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브랜드들은 심플함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기도 합니다. e 커머스 회 사인 브랜드리스(Brandless)는 회사의 로고로 텅 빈 흰색 박스를 사용한 다. ‘우리 브랜드 제품에는 숨길 것이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 이다. 투명성을 중시하며 고품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 다. 브랜드리스는 200개에 달하는 천연 오가닉 건강 제품, 뷰티 제품, 청 소 제품, 음식, 그리고 그 외 생활용품을 3달러에 판매한다. 3달러? 오타 가 아니니 오해 마시길. 하지만 잠시라도 가격을 보고 오타가 아닐까 생 각했다면 저렴한 가격이 독자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또 한번 증명하는 셈이다.

다이렉트 투 컨슈머(Direct-to-consumer) 모델은 과거의 마케팅 방식 을 무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자 하는 것 이 메인 이슈다. 그럼에도 오늘날과 같은 냉소적인 시대에 소비자의 신 뢰를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얘로우는“요 즘 소비자들은 굉장 히 회의적”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소비자들이 무척 똑똑하고 정보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그 브랜드 의 광고를 순진하게 믿지 않아요. 그들은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의존하죠.” 소비자들은 과학의 정확성을 신뢰한다. 브랜드리스, 뷰 티파이, 오디너리와 같은 기업이 불필요한 요소는 최소화하고 단순함을 지향하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 정신을 따르는 일일지 도 모르겠다. 실용성, 기술에 집중하고 겉포장보다는 그들이 고 집하는 최상의 재료에 신경 쓰는 것 말이다.

킹은 “정확히 60도 각도로 열리는 베스트셀러 콤팩트 제품을 제 조하는 명품 브랜드를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한 특성이 화장 품 자체의 효과를 더 향상시키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확성이라는 메시지는 전달해주죠.” 고품질의 재료와 심플한 디자인은 제품의 질을 높일 수는 있지만 감성적인 측면에서 보 면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 얘로우는 누구든 뷰티 제품을 소비할 때 스스로 섹시하다거나, 혹은 기쁘다거나 어떤 감정을 느끼기 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개인적인 차원의 교감을 느끼 기 위해서는 제품을 쇼핑 카트에 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 하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샤넬 부티크에 들어서던 기억이 지 금도 생생히 남아 있어요”라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트로이 서 랫(Troy Surratt)은 회상했습니다. “샤넬 에고이스트에 돈을 탕 진했죠. 그렇게 큰돈을 쓴 건 거의 처음이었는데 당시에는 그 경 험이 너무나도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지금까지도 그 향수의 향 기를 맡으면 약간은 겁을 먹은 19살 아이가 꿈에 그리던 매장에 들어섰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그런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힘은 정말 강력하죠.” 서랫의 뷰티라인은 럭셔리와 기 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포뮬 러는 일본에서 제조한다. 킹은 일본의 많은 제조업체가 화장품 용기를 위한 청각 실험을 한다고 귀띔했다. “립스틱이나 콤팩트 케이스를 여닫을 때 나는 딸깍 소리를 측정하죠. 더 경쾌한 소리 는 고품질임을 증명하죠. 고급 승용차의 모터 소리랑 비슷하다 고 생각하시면 돼요. 소리가 굉장히 독특하잖아요.” 딱 적당한 콤팩트의 무게나 경쾌한 딸깍 소리는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 하지만 이런 요소가 제품의 가치를 결정할 정도로 강력하다니 !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험이에요” 샤키가 답했다. “우리는 즐거움을 열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해요. 어떤 여성들은 고가의 제품을 구 입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럭셔리함을 좋아하는 반면 어떤 여성들은 저렴 한 제품 구입으로 돈을 절약하거나 더 많은 제품을 계속 모으는 재미를 추구하죠. 화장품 소비는 각 개인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니까요.”

뷰티 제품의 플라시보 효과에 대해 생각하면서 난 실험 하나를 고안해냈 다. 뷰티파이의 제품을 각각 평범한 콤팩트 케이스, 그리고 60도 각도로 정확하게 열리는 고가의 콤팩트 케이스에 넣어 사용해보았다(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나는 두 제품 중 어떤 제품이 내 라이프스타일과 더 잘 맞을까를 생각하면서 평가해보았다. 화장대에 진열돼 있을 때 어떤 것이 더 좋을까가 아니라. 나는 평범한 검은색 케이스에 담긴 실용적인 속눈 썹 연장 마스카라를 바를 생각을 하며 아침에 눈을 떴다. 그리고 예쁜 금 색 케이스에 담긴 빨간 립스틱을 바르면서 로맨틱한 밤을 꿈꿨다. 결국 나는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제품을 선택했다. 겉 포장이 아니라 나에게 맞 는 제품을 말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 여자들에게 화장품은 ‘꿈’을 꾸게 하 는 아이템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화장품에 현실을 살아가는 ‘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