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은, 그 시대와 함께 나이가 들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대중들에서 연기라는 진검승부를 펼쳐온 ‘드라마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뒤늦은 찬사.

 

0907-230-4박원숙의 원숙미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악독한 시어머니 역을 꼽으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박원숙이 <겨울새>나 <찬란한 유산>에서 한 역을 고를 것이다. <겨울새>에서는 지질한 아들(윤상현)에게는 “아드님”이라고 부르면서 떠받들고, 며느리(박선영)도 앞에서는 며느님이라며 존대하면서 인자하게 구는 척하지만, 뒤에서는 며느리 집안의 돈을 노리거나 과거를 붙들고 물어지는 소름 끼치는 시어머니 역이었다. <백년의 유산>에서도 비슷하게 무능한 아들(최원영)을 감싸면서 며느리(유진)를 쫓아내기 위해 정신병원에 가두기까지 했다. <내 딸 금사월>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의 재산을 차지하고, 그 어머니의 죽음을 야기하고, 며느리가 몰래 낳은 아이를 바꿔치기까지 했다. 유난히 또렷하고 볼륨 높은 목소리, 뚜렷한 이목구비, 훤칠한 체격 때문에 성격 나쁜 시어머니, 욕망을 드러내는 사업가 등 강한 이미지의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은 인상을 남겼다.

임현식 씨와 좋은 파트너를 이루었던 <한 지붕 세 가족>(1886~1991)의 순돌이 엄마로 서민 가족의 대표적 여성상이었다는 사실도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희석되었다. 그러나 최근 <디어 마이 프렌즈>의 영원은 박원숙이 이제까지 해온 역의 이면 같았다. 친구 난희(고두심)의 남편이 자신의 친구 숙희와 바람피우는 걸 알았지만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희에게 일방적인 원망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화해를 시도하고 친구들을 지키는 여자. 배신당한 결혼과 암에도 지지 않고 옛 인연을 이어갈 용기를 내는 여자. 이 역할은 박원숙 본인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해주는지도 몰랐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야 MBC 공식 탤런트로 데뷔한 박원숙. 그녀의 페르소나와 같은 영원에게서 우리는 관계에서 얻은 상처와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세계 누구보다도 강렬한 역을 태연하게 해내는 배우로서의 박원숙을 새삼 보는 것이다. 박원숙에게는 기억에 남는 처연한 배역도, 강한 이미지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인상적인 부드럽고 자상한 엄마 역도 많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원숙은 오래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처럼, 남의 남편을 빼앗았으면서도 결국에는 친구가 되고 아이들의 고모가 되어주는 자매애 깊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호락호락 굴 수 없는 강인한 여성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린다. 비키니를 입은 한 여자가 콜라병을 들고 해변의 바위 위에 앉아 턱을 살짝 쳐들고 치아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고 있다. 바로 1975년 코카콜라 광고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삶의 행로를 이렇게나 멀리 걸어왔지만, 그 여름 햇볕 같은 웃음의 잔영이 여전히 남아 있다. – 박현주(소설가)

 

 

0907-230-5이혜영은 여자다

‘섹스 칼럼니스트’로 불리면서부터 이상한 직업병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가 어떤 캐릭터를 두고 일단 ‘섹시한가’를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보는 것이다. ‘매력적인 어머니’ 캐릭터를 떠올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게 ‘섹시한 어머니’라는 문제적 캐릭터를 떠올리고 말았다.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자 작가이고, 젊은 남자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면 누구를 1순위로 놓을 것인가. 영화 <송투송>에서 라이언 고슬링의 마음을 빼앗은 케이트 블란쳇처럼 클래식하고, <피아니스트>의 이자벨 위페르처럼 카리스마 넘치며, <언페이스풀>의 다이안 레인처럼 우아한 여자, 치명적인 연기로 관능을 표현하는 국내 배우는 누구일까. 어렵지 않게 배우 이혜영이 떠올랐다. 도드라진 광대뼈, 격정적인 눈빛, 도도한 억양, 히스테리컬한 연기가 일품인 이혜영이 그려내는 ‘섹시한 어머니’는 어쩐지 특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한, 한결같이 비범한 캐릭터들처럼 말이다.

사랑했던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두 아이를 살해하는 여자, 모성애보다 사랑이 중요했던 아름다운 마녀 ‘메디아’를 비롯해, 따분한 결혼 생활과 지나간 사랑을 뒤로하고 그저 ‘자신’이고 싶어서 임신한 몸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헤다 가블러’, 화제작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오드리 헵번을 동경하는 여배우 ‘오들희’,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엄마 ‘강희수’ 등 배우 이혜영이 선택한 캐릭터는 대부분 ‘이 세상의 보통 엄마’와는 다르다. 아들을 위해 생선뼈를 발라주고 딸을 위해 심장을 내놓는 방식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엄마보다는 스스로 ‘여성’을 인식하고 ‘여성’으로 존재하는 여자 캐릭터였다. 이토록 삶을 주체적으로 리드하는 여자야말로 섹시하지 않은가. 한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면서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을 자주 해도, 제가 한 엄마 역할은 남달랐어요. 자기를 감추는 그냥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을 강조하는 여성이 많았죠”라고 말했을 정도로, 배우 이혜영과 그녀가 선택한 캐릭터의 중심에는 ‘흔들리지 않는 자아’가 존재한다. 그녀의 리얼 러브스토리 또한 얼마나 섹시한가. 파리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결혼에 이른 연애담, 그렇게 사랑했던 그와 결별에 이르지만 다시 만나 두 번째 사랑에 빠지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이혜영의 인생 역시 영화로 만들어도 흥미로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실제로 배우 이혜영이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가 제작된다면? 배우 이혜영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밀회>의 김희애보다 단단하고, <정사>의 이미숙보다 격정적이며, <돈의 맛>의 윤여정보다 섹시한 어머니일 것 같지 않나. – 박훈희(칼럼니스트)

 

 

0907-230-6그녀의 이름은 서권순

최근 일일드라마 <이름 없는 여자>에서는 주인공 손여리의 조력자인 캐릭터 ‘서말년’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다. 마치 <킬빌>의 엘 드라이버나 궁예처럼 한쪽 눈을 가린 이 중년 여성은 ‘궁예 아줌마’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랑과 전쟁> 등의 수많은 드라마에서 독한 시어머니 역으로 등장한 배우 서권순이다.

원래 막장 드라마란 언제나 상식적이지 않은 스토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정서를 해당 세계관 속에 진입시켜야 한다는 무리한 목표를 지닌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연기력이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 납득 가능하면서도 인상 깊은 표정과 액션 등이 필요하다. 서권순은 아주 오랫동안 그런 막장 드라마에서 현실감을 완성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서권순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시청자들은 드라마 자체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안에 들어가 드라마 속의 캐릭터를 욕하게 된다. 일종의 마력이다.

그가 맡았던 <왕꽃 선녀님>의 보살 역이나 <이름 없는 여자>의 셜록 궁예가 보여줬던 일종의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연극 무대로부터 탄탄하게 쌓아온 기본기가 바로 그 마력이라는 것을 구성한다. 1970년대, 지금과는 달리 대한민국에 연극영화과가 딱 4개 있던 시절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엘리트 연기자다. 오래전 박찬욱 감독의 <3인조>에서 수녀원장으로 등장했을 때 그 냉철한 연기력은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서권순은 쓸데없는 동작이나 표정으로 러닝타임을 낭비하는 법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으로 어떤 볼륨의 대사를 던지더라도 그 딕션이 시청자들의 인식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EBS FM에서 낭독 프로그램에 등장했을 정도로 뛰어난 목소리와 발음을 지닌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권순은 지금까지 주로 신경질적이거나 탐욕스러운 캐릭터로 많이 소비된 아쉬움이 있다. 오랜만에 주인공의 조력자로 등장했고 또한 큰 인기를 얻었으니 여린 마음을 가진 상냥한 캐릭터, 극의 중심을 이끄는 프로타고니스트 캐릭터 등 그동안 좀처럼 맡겨지지 않았으나 일단 시키기만 하면 끝내주게 해낼 만한 배역을 골고루 맡게 되면 좋겠다. – 조원희(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