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TV 화면이 너무나 익숙한 시대. 여성 방송인을 하나의 장식처럼 활용하려고만 하는 요즘의 방송 문법에 아쉬움을 느낀 지는 오래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럼에도 확고하게 자신만의 색깔로 TV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아나운서가 있다. 정은아, 박혜진, 강지영. 20대부터 5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방송인의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를 보았다.

 

오버사이즈 재킷은 폼 스튜디오(Fourm Studio).

오버사이즈 재킷은 폼 스튜디오(Fourm Studio).

박혜진은 2001년 MBC에 입사했다. 그녀는 2006년부터 3년간 <뉴스데스크>의 메인 앵커로 활약했으며, 이 밖에도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라디오를 진행해왔다. 2014년, 입사 후 14년간 몸담아온 MBC에 사표를 제출하고 프리랜스 아나운서로 전향했다. 이후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로 첫 행보를 시작했다. tvN <택시>, JTBC <김제동의 톡투유>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 시즌2>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 그녀는 온스타일의 <뜨거운 사이다>에 합류했다.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사이다처럼 속 시원하게 이야기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은 개그우먼 김숙, 배우 이영진, 변호사 김지예, 사업가 이여영, 언론인 이지혜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출연해 시의성 있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같은 이슈에 서로 다른 의견을 쏟아내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스튜디오의 중심에는 박혜진이 있다. 그녀는 균형 있는 시각으로 토론의 중심을 잡아주며 진행자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더위가 누그러진 여름날에 핑크색 슈트 차림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녀는 늘 그렇듯 당당했다.

얼마 전 <뜨거운 사이다>가 첫 방송을 했어요. 프로그램에 합류하게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방송에서 여성들끼리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한 가지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그동안 흔히 다루지 않았던 여성들의 생각과 시선이 담길 거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모든 출연자와 제작진이 여성이라는 점도 신선했고요.

녹화장 분위기는 어때요?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뜨거워요. 사실 여성들이 정치, 사회 이슈에 무관심하다는 건 편견이에요. 저를 포함해 여섯 명의 멤버는 사회 흐름에 민감하고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여성문제에 있어서 각자가 상당히 오랜 시간 깊은 고민을 한 것 같아 얘기를 하면서 많이 배우죠.

다른 출연자들과 호흡이 잘 맞나요?
저희끼리 단체 카톡방이 있거든요. 그 안에서 아이템 선정과 방향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슈에 대한 깊은 토론까지 활발하게 오가요. 잠시 한눈팔면 메시지가 100개씩 와 있어요. 방송보다 더 뜨거울 정도예요.

프로그램을 이끄는 진행자로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슈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하고, 토론 중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져 더 깊이 있는 토크가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해요.

지금 당신이 가장 뜨겁게 주목하는 사회 이슈는 무엇인가요?
군대, 대기업, 학계, 문화계 등 일상에 퍼져 있는 갑의 횡포와 지난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망가진 공영방송 정상화 문제죠.

평소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소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보여요.
어떤 일에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는 데 특별한 철학이 필요한 건 아닌것 같아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공감하면 마음이 움직이고, 그러면 뭐라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받은 재능이 필요하고 쓰일 수 있는 것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거든요. 하지만 행동과 달리 말은 의도한 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이 고민이에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오해를 사는 말을 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거든요. 그래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단어 하나, 어미 하나까지 고심하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편이에요.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스스로에게 많이 하는 질문이에요. 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때와 방송 환경이 참 많이 바뀌었거든요. 지금은 아나운서나 한두 명의 진행자가 프로그램을 이끄는 형식의 프로그램이 거의 없고 진행자의 경계도 허물어진 지 오래예요. 또 굳이 진행자가 필요하지 않은 리얼 버라이어티와 관찰 예능 중심의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죠. 그러니 방송 스타일과 방송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해요. 아무리 방송의 속성이 연출이라 하더라도 약속 대련을 하듯 예상된 패턴의 진행은 부자연스럽거든요. 기존 아나운서로서의 진행 역할을 고수하기보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방송에 좀 더 자연스럽게 녹여내 그 사람만의 캐릭터와 개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해요.

이제는 아나운서도 엔터테이너의 일부가 되었어요.
방송 진행자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죠. 예전에는 아나운서가 주로 하던 역할을 개그맨, 연기자, 가수, 평론가, 작가들이 하고 있으니까요. 보도와 시사 등 특화된 영역이 아니라면, 달라지는 방송 트렌드에 맞게 아나운서도 다양한 끼와 능력을 발휘하며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블랙 드레스는 에이치앤엠 스튜디오(H&M Studio). 스니커즈는 랙앤본 바이 비이커 (Rag & Bone by Beaker).

블랙 드레스는 에이치앤엠 스튜디오(H&M Studio). 스니커즈는 랙앤본 바이 비이커(Rag & Bone by Beaker).

 

훌륭한 아나운서, 혹은 MC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나요?
단순한 스킬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현실의 나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고, 실제 나의 모습과 방송에서 비쳐지는 모습과의 괴리를 줄여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있나요?
아나운서는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다양한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고 그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나를 항상 돌아 보는 게 성숙한 사람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요.

남성이 아닌 여성 아나운서로서 느낀 한계도 있었나요?
남자 중심의 프로그램이 대다수다 보니까 애초에 기회 자체가 별로 없어요. 여성 진행자를 활용한 방송, 여성 진행자여서 더 의미있고 빛날 수 있는 방송 제작이 필요할 거 같아요. 제작자들은 실패를 줄이기 위해 비슷한 패턴의 프로그램을 반복 재생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충분한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봐요.

2001년 입사 후 17년째 일을 하고 있어요. 꾸준히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숫자로 들으니 꽤 긴 시간이네요. 사실 시간 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방송을 좋아해요. 보는 것도, 하는 것도 모두. 일이 없을 때는 모니터를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요즘 방송 흐름과 스타일을 파악하고 나에게 없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 은 것을 생각해봐요. 고민의 시간이 방송을 할 때 큰 힘이 되어주죠.

그럼 방송 모니터를 하면서 ‘이건 출연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프로 그램도 있었나요?
<나 혼자 산다>요. 자연스러운 일상을 보여주는 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제 전 아이와 남편이랑 같이 사니까 힘들겠죠.(웃음)

슬럼프가 찾아온 적도 있나요?
퇴사 직전, 친정인 MBC가 망가져갈 때 더 이상 희망과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정치적인 이유로 방송의 기회가 사라지는 상황에 모두가 무기력 했죠. 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매달 주는 월급이나 받자고 회사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고,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그 후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는데,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안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방송을 새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대감이 더 컸죠.

살아오면서 자신이 성장했다고 느꼈을 때가 있어요?
여전히 매순간 나약하고 용기 없고 부족함을 느껴요. 그럼에도 굳이 성장을 경험한 순간을 꼽으라면 퇴사 이후의 시간인 것 같아요.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됐으니 불안감과 걱정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아요. 퇴사 후에 오히려 내 삶과 지난 방송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행복이요. 셀카로 찍어 ‘나 행복해요’라고 SNS에 공유하는 행복이 아니라, 그냥 문득 마음속에서 우러나 혼자만 알고 있는 그런 행복 있잖아요.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상이 중요해요.

그 행복은 주로 어디에서 오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특별한 일에서 오는 건 아니고, 일상 어느 순간 불 현듯 행복을 느껴요. 최근엔 아이와 동네를 산책하러 나가서 한참을 걷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 하나 사 주고 저는 아이스 커피 한 잔을 마셨는 데 그 순간이 참 행복하더라고요.

아나운서로서의 삶은 만족스러운가요?
아나운서가 아닌 직업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만족의 정도를 비교할 순 없 지만 지금까지 삶에 감사해요.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에 이렇게 큰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게 한 건 여자이기에, 엄마이기에 가능했고, 사람들을 연결하고 서로 공감하게 하는 역할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나운서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직장인, 아내, 엄마, 딸 등 여자들은 살면서 다양한 역할을 마주하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도 있나요?
직장을 다니거나 엄마가 되면 자기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요. 다양한 역할만 존재할 뿐, 내 자신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카페로 출근해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보고 혼밥도 하고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동네 산책도 해요. 심심해 보이지만 일상적인 것들을 혼자 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나요?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볼 때를 제외하곤 나이를 특별히 의식하고 살진 않아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예전보다 좀 더 다양한 것에 관심이 가고, 깊고 넓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나이가 더 들어가면 흔히 꼰 대가 된다고 하는데, 생각이 머물지 않길 바랄 뿐이죠.

후배들이나 젊은 여성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누구처럼’보다 ‘나답게’ 살아가길 바라요. 통념이나 편견에 무뎌지지 말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박혜진답다’를 정의하자면?  ‘박혜진’다운 건 어떤 건가요?
외부에 보이는 박혜진과는 다른 모습도 많이 있어요. 그래서 진짜 박혜 진다운 게 뭔진 모르겠지만, 바라건대 어떤 모습이든 늘 한결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당신에게 방송은 무엇인가요?
나의 일. 다행히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일이 라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러나 방송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순 없죠 . 현실의 내가 멋진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서 그게 방송에서 조금이라도 구 현되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아나운서였어’라는 평가가 남는 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에 이렇게 큰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게 한 건 여자이기에, 엄마이기에 가능했고, 사람들을 연결하고 서로 공감하게 하는 역할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나운서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