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기록된 주요한 사건은 언제나 밑바닥에서부터 이루어진 혁명적 순간이었다. 지금의 하이패션을 이룩한 디자이너들이 비주류적인 기질을 지녔음은 물론이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항과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이야말로 창의를 이끌어내는 가장 막강한 힘임을 그들이 증명한다.

 

31-106-8마리 퀀트
미니스커트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이가 앙드레 쿠레주인가, 마리 퀀트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을 때, 마리 퀀트는 이렇게 말했다. “미니스커트를 발명한 것은 나도 쿠레즈도 아니다. 진정한 발명가는 그것을 입은 거리의 소녀들이었다.” 퀀트는 미니스커트와 팬티 스타킹을 유행시켰을 뿐 아니라 허세에 찬 기성세대의 부르주아적인 옷차림에서 벗어나 모즈나 록과 같은 젊은 세대의 하위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자유롭고 편한 옷으로 여자들을 전통적 역할에서 해방시켰다. 특히 10대에게 인기를 끌었던 퀀트 룩은 전형적 인 미의 기준을 바꾸어놓았다. 트위기처럼 가슴이 납작하고 깡마른 미성숙한 여자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다양성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31-106-9에디 슬리먼
구부정한 어깨에 몸에 꼭 들어맞는 재킷을 입고 스키니 팬츠를 입은 극단적으로 깡마른 남자들을 런웨이로 불러들인 이는 디올 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에디 슬리먼이다. 이는 점잖은 신사나 건강한 근육질의 남자를 상대했던 하이패션계에 충격을 주었다. 에디 슬리먼은 생 로랑으로 이동한 후에도 디올 옴므 때와 마찬가지로 파격과 논란을 즐겼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록 스피릿을 향한 애정과 비주류를 사랑하는 DNA에서 비롯한다. 잠시 사진가로 전향한 이후로 LA에 머물며 생 로랑 무대를 통해 LA 소녀들이 입을 법한 그런지 룩을 선보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곳은 강렬한 햇빛 아래 건 강한 몸매의 젊은이들이 서핑과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곳이며, 무엇보다 대중문화가 꽃피는 곳이기 때문이다.

 

 

31-106-10뎀나 바잘리아
현재 21세기 패션에 있어 하류 문화를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놓은 이는 뎀나 바잘리아다. 과장된 소매의 모터사이클 재킷, 해체된 구조의 트렌치 코트를 일반인 친구들에게 입혀 베트멍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이후 발렌시아가의 수장이 된 지금까지 그가 컬렉션에 올린 것들은 모두 거리에서 마주하는 흔하디흔한 일상의 것들을 하이패션과 교배한 것들이다. DHL의 로고 티셔츠, 이케아의 가방, 빅 라이터 힐의 삭스 부츠 등이 바로 그것. 몸을 해체해 재조립한 것 같은 뒤틀린 형태와 장르와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린 아이템들은 그가 철저하게 비주류적인 인물임을 입증한다.

 

 

31-106-11버질 아블로
칸예 웨스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버질 아블로가 오프 화이트로 데뷔하자 하이패션계는 힙합으로 돌아섰다. 하이패션에도 거리에서 응용한 아이템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가 2012년 선보인 단기 프로젝트 ‘파이렉스 비전’은 패션계에 진짜 스트리트 웨어가 하이패션을 점거할 것임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다. ‘젊음은 언제나 승리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싸게 구입한 랄프 로렌의 럭비셔츠 위에 파이렉스라 프린트한 후 비싸게 되팔았고, 힙합 크루 에이셉 몹이 이를 입고 룩북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버질 아블로는 여전히 진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입고 싶어 하는 거리의 스타일을 캡처한다.

 

 

31-106-12고샤 루브친스키
모든 의상에 키릴 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문신처럼 새겨 넣은 고샤 루브친스키를 추종하는 부류는 스웨트 셔츠와 팬츠, 야구모자, 줄무늬 스포츠 양말을 입는다. 구소련의 붕괴를 체험하고 서구의 문화와 소련의 애국주의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던 90년대의 러시아 문화를 몸소 체득한 고샤 루브친스키는 하위 문화를 쿨하게 포장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의 첫 컬렉션은 스케이터 친구들을 위한 옷이었고, 처음으로 피티워모 컬렉션을 선보이는 장소로 폐담배 공장을 선택하는 등 옷을 만드는 이유조차 기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옷을 만들기보다는 젊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비주류적 사고는 그냥 쿨하기만 하면 족한 것.

 

 

31-106-13알렉산더 왕
2000년대 중반 뉴욕 패션 신은 세대 교체로 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2세대 이민자들이었다. 미국의 다운타운 감성을 실용적인 하이패션으로 승화시키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이는 중국계 미국인 알렉산더 왕이었다. 그는 불손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옷을 다루지만 그 결과는 매우 세련되고 동시대적이었다. 특히 1990년대 거리를 휩쓸었던 스포티브한 요소를 하이브리드 버전으로 진화시키는 능력은 그를 단기간에 스타 디자이너로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다. 옷과 더불어 자유분방한 그의 태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흡수한 음악적 취향이 이끈 뮤지션들과의 관계는 하이패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주류적인 특징이다.

 

 

31-106-14마르케사 알메이다
일명 ‘찢청’으로 2015년 LVMH 프라이즈의 수상자가 된 마르케사 알메이다. 듀오 디자이너 마르타 마르케스와 파울로 알메이다는 헬무트 랭에게서 영향을 받은 해체 주의적 테일러링에 너덜너덜한 데님 컬렉션으로 90년대 길거리 감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유스 컬처. 데님은 유스 컬처를 확립하는 데 가장 적합한 소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