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자본이나 거창한 광고, 마케팅 없이 자신만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담은 브랜드를 선보이는 스타일리스트가 늘고 있다. 스타일리스트가 만들고, 홍보하고, 스타일링하고, 판매하는 패션계의 새로운 움직임에 관하여.

 

 

1 엘오브이이 패션 에디터 출신인 정진아와 김신애의 브랜드. 딸을 키우는 엄마인 그녀들의 센스가 돋보이는 키즈 패션 아이템이 가득하다. 2 아밤 스타일리스트 최경원이 선보이는 아밤과 아밤아파트멍. ‘아침과 밤’이라는 뜻으로 그녀의 섬세한 감성이 담긴 옷과 가방을 만날 수 있다.

1 엘오브이이 패션 에디터 출신인 정진아와 김신애의 브랜드. 딸을 키우는 엄마인 그녀들의 센스가 돋보이는 키즈 패션 아이템이 가득하다. 2 아밤 스타일리스트 최경원이 선보이는 아밤과 아밤아파트멍. ‘아침과 밤’이라는 뜻으로 그녀의 섬세한 감성이 담긴 옷과 가방을 만날 수 있다.

 

“너도 브랜드 하나 만들어봐.”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내가 근래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패션 에디터와 스타일리스트들이 활동 영역을 넓혀 브랜드를 론칭하 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장악한 ‘정유미 백’과 ‘한예슬 시퀸 로 브’ 역시 현직 스타일리스트가 전개하는 아밤과 인스턴트펑크의 제품들이다. 그중<윤 식당>에서 배우 정유미가 장바구니로 사용해 유명세를 탄 텀블러백은 스타일리스트 최경원이 만든 브랜드 아밤의 것으로, 벌써부터 카피본이 나올 정도로 인기다. 인스턴트펑크는 배우 고준희를 패셔니 스타로 만든 스타일리스트 김지혜가 만든 브랜드다. 티셔츠, 라이더 재킷 등 옷장에 꼭 하나 있 어야 하는 기본 아이템을 트렌디하게 풀어내 출시와 동시에 품절 사태를 일으켰다. 그 외에도 구 동현의 클루 드 클레어, 채한석의 트리티, 김현경의 아이노부터 패션 에디터 출신인 정진아와 김 신애의 엘오브이이, 오선희의 에딧백 등 국내 톱 스타일리스트들이 저마다 각자의 개성이 담긴 브랜드로 대중과 소통한다.

 

스타일리스트의 영역 확장
과거 패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직업은 디자이너였다. 가장 근본적인 일, 옷을 짓는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디자이너만큼이나 패션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바로 스타일리스트다. 대중에게는 유명인에게 옷을 입혀주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패션쇼부터 드라마, 영화, 광고 등 패션이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 그들의 손길이 닿는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계 인사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인물은 바로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였다.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가 이끄는 브랜드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숨은 일등 공신으로, 스트리트 스타일을 하이엔드 패션에 접목한 신선한 스타일링으로 두 브랜드를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국내 패션계 역시 스타일리스트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는 추세다. 채한석과 오디너리 피플, 김예영과 스티브제이 앤 요니피, 박세준과 푸시 버튼 등 그들이 함께한 작업은 늘 예술성과 상업성의 중간을 교묘히 오간다. “패션쇼 기획 단계부터 어떤 소재를 쓸지, 주요 디테일은 무엇으로 할지, 스타일링의 조합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 디자이너와 의견을 나누는 것은 물론, 실제 옷이 만들어진 뒤에 보다 구체적인 맥을 잡아나가는 것 역시 그들의 몫이죠.” 패션 홍보대행사 APR 에이전시의 임지영 팀장은 스타일리스트가 마치 브랜드 건축가와 같다며 이렇게 말한다. 이는 비단 패션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스타일리스트가 브랜드 룩북이나 광고 촬영을 하며 새로운 스타일과 트렌드를 제시하는 스타일 전문가로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이러한 까닭에 몇 년 전부터 유통업체들은 유명 스타일리스트 모시기에 공을 들여왔다. 스타일리스트 영입이 가장 치열한 곳은 홈쇼핑이다. 스타일링 비법과 함께 고객 눈높이에 맞춘 설명을 해주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이들이 직접 디자인과 기획에 참여한 협업 제품의 판매 실적도 좋다. GS샵은 김남주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김성일을, CJ오쇼핑은 고소영과 전지현의 스타일을 도맡아온 정윤기를 필두로 한다.

 

1 아이노 송혜교 스타일리스트로 잘 알려진 김현경의 주얼리 브랜드 아이노. 데일리 룩에 활용하기 좋은 액세서리를 만날 수 있다. 2 에딧백 패션 에디터 출신 오선희의 패션 컨설팅 스튜디오 에딧에서 소량으로 제작한 캔버스 백. 이름은 에딧백이다. 카키와 네이비 두 가지 컬러로 출시되었다. 3 인스턴트펑크 스타일리스트 김지혜가 전개하는 브랜드. 티셔츠, 셔츠, 가죽 재킷, 오버사이즈 재킷 등 누구나 하나쯤 있을 법한 기본 아이템이 주를 이룬다.

3 아이노 송혜교 스타일리스트로 잘 알려진 김현경의 주얼리 브랜드 아이노. 데일리 룩에 활용하기 좋은 액세서리를 만날 수 있다. 4 에딧백 패션 에디터 출신 오선희의 패션 컨설팅 스튜디오 에딧에서 소량으로 제작한 캔버스 백. 이름은 에딧백이다. 카키와 네이비 두 가지 컬러로 출시되었다. 5 인스턴트펑크 스타일리스트 김지혜가 전개하는 브랜드. 티셔츠, 셔츠, 가죽 재킷, 오버사이즈 재킷 등 누구나 하나쯤 있을 법한 기본 아이템이 주를 이룬다.

스타일 전문가들의 새로운 도전
앞서 이야기한 다양한 경험을 발판 삼아 스타일리스트, 더 나아가 에디터와 마케터 출신들이 직 접 브랜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인스턴트펑크를 만든 스타일리스트 김지혜가 있 다. “입고 싶은 옷이 있는데, 막상 찾아보면 의외로 맘에 쏙 드는 걸 찾기 힘들더라고요. 기본적인 아이템일수록 오히려 제가 찾는 스타일이 없어 직접 만들게 됐죠” .인스턴트펑크의 셔츠와 라이 더 재킷, 트렌치코트 등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을 법한 기본 아이템들은 그녀가 전담하는 연예인들(한예슬, 이민정, 이하늬, 김소연, 제시카, 혜리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출됐고, 단숨 에 브랜드 인지도를 쌓게 됐다. “SNS의 역할이 가장 커요. 인스턴트펑크 론칭 초창기 에 배우 고준희와 일했어요. 당시 떠오르는 패셔니스타였던 그녀가 저희 제품을 입은 사진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블로그 등을 통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 이 쏠리게 된 거죠.” 스타일리스트 최경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저와 함 께 일하는 블랙핑크와 정유미는 물론, 친한 모델들과 패션업계 지인들이 홍보에 많은 도움을 주었죠. 덕분에 브랜드 론칭과 동시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운 동복 브랜드 ‘클로브’를 론칭한 카이아크만 마케터 출신 전주현은 S NS를 통한 홍보와 마케팅이 스타일리스트들의 브랜드 론칭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데 기여했다며 말을 이 어갔다. “팔로워 수가 엄청난 패션계 지인들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홍보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는 파워 인스타그래머를 활용 한 마케팅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브랜드의 방향성과 일치하는 팔로워를 찾는 게 핵심인데, 저 같은 경우 운동을 좋아하고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층을 팔로워로 거느린 인스타그래머들 위주 로 홍보를 진행하고 있어요. 브랜드 매출과 인지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거든요.”

제품 생산 공정은 어떨까? “몇 년 전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가방과 옷 등을 출시한 적이 있 어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제작을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최경원처럼 브랜드를 론칭 한 스타일리스트들은 대부분의 경우 여러 협업 작업을 통해 브랜드 제작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력이 있었다. “오랜 시간 패션 업계에서 일한 게 도움이 되죠. 샘플실과 공장 등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손쉽게 얻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동대문에 가서 원단을 고르고, 수십 번 샘플 진행을 하고, 나와 잘 맞는 공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건 여타 브랜드와 동일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해 요.” 전주현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지만 결과물이 나왔을 때 보람이 무척 크다며 브 랜드 론칭에 만족감을 내비쳤다.

 

남다른 재능의 결과물
잘나가는 직업을 놔두고 이처럼 수고로운 브랜드 론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다양한 옷을 입고, 액세서리를 착용해보고, 스타일링도 해봤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늘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며 아쉬웠던 부분을 적어두었다가 직접 만들게 된 거죠.” 스타일리스트 최경원은 차 안에 커피 텀블러를 꽂아놓을 수 있는 가방은 없을까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에서 아밤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스타일리스트 채한석은 365일 착용하면서 터득한 자신의 노하우를 집약해 안경 브랜드 트리티를, 스타일리스트 김지혜는 남녀 모두 입을 수 있는 기본 아이템을 찾다 직접 만들게 된 케이스다. “현직 스타일리스트가 제안하는 새로운 가치 덕분이 아닐까요? 스타일리스트의 존재 ‘이유’를 담아낸 제품들, 예를 들면 가볍지만 넉넉한 수납이 가능한 아밤의 캔버스 백, 무심하게 걸쳐도 세련된 인스턴트펑크의 셔츠처럼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트렌디한 제품은 동시대 여자들이 원하고 찾는, 새롭지는 않지만 세련된 것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중이 열광하는 것 같아요.” 이미 이들 브랜드의 마니아가 된 모델 김진경이 이렇게 덧붙인다.“패션계에서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한 그들의 감각적인 접근을 통해 탄생한 획기적인 아이템이라 더욱 믿음이 가죠.”

어느 분야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는 ‘감각’과 ‘성실함’이 뒷받침된다. 앞서 소개한 스타일리스트들은 기본적인 두 가지가 바탕이 됐기에 최정상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 동안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순수한 ‘의무감’에 또 다른 비즈니스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패션 에디터는 말했다. 스타일리스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브랜드는 이들이 의도한 것이 아닌, 이들의 타고난 섬세한 감성이 만들어내는 이 시대 또 하나의 비즈니스 형태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