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언제나 이상적인 여자를 정의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쿨한 여자를 위한 시대다. 다섯 명의 칼럼니스트가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쿨한 여자의 아이콘을 이야기한다.

 

영화 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

영화 <미스 슬로운>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

사연 없는 여자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사람들이 쉽게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하나 있는데, 그건 자신이 만드는 인물에 사연을 심어주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를 보라. <보이스>의 강권주 센터장이 연쇄 살인범에 집착하는 건 그 살인마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다. <파수꾼>의 조수지가 악당들을 잡으려 애쓰는 건 사이코패스 고등학생에게 딸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작품의 작가들은 남자들에게도 사연을 준다. 하지만 전체 평균을 낸다면 사연이 없는 여자는 사연이 없는 남자보다 훨씬 적다. 여성 캐릭터들은 남자들보다 정서적인 동기에서 행동한다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존 매든이 감독하고 조나단 페레라가 각본을 쓴 <미스 슬로운>은 이 편견을 대놓고 깨트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다. 진짜로 쿨하려면 이런 것도 의식하지 말아야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그러니 이 정도는 이해해주기로 하자. 내용을 보자. <미스 슬로운>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잘나가는 정치 로비스트다. 영화 초반에 슬로운은 보수파 상원의원으로부터 총기 규제 법안 저지 캠페인에 합류할 것을 제안받는다. 슬로운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자기 팀을 꾸려 회사에서 나간 뒤 반대파 회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말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여기서 온갖이란 정말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포함된다) 총기 규제 법안을 위해 싸운다.
이 정도면 사람들은 묻기 마련이다. 도대체 엘리자베스 슬로운이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러는 걸까. 그다지 정의로운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총기 규제에 찬성한다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할 일인가? 알고 보면 사연이 있는 게 아닌가?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슬로운에게 계속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러면 슬로운은 계속 어이없어한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사연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내가 신념을 갖고 싸우는 게 그렇게 안 믿기나? (앞에서 말한 이유로 이 대사는 살짝 언쿨하다.)
정말 엘리자베스 슬로운이 신념 때문에 총기 규제 법안을 위해 싸우는 걸까? 그것만은 아닐 거다. 누구의 행동 동기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 우린 엘리자베스 슬로운에게 어떤 과거의 사연도 없다는 게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슬로운이 자신의 경력과 남의 인생까지 도박을 걸어가며 싸운 건 순전히 총기 규제가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그 법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모든것은 로비스트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연결되고 감성적인 개인사와는 무관하다. 당연히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쿨하다. 이 쿨함이 이 캐릭터가 남자였다면 그렇게 이상하거나 낯설어 보이지 않았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좀 슬프지만. – 듀나(영화평론가, SF작가) 

 

작가 사노 요코.

작가 사노 요코.

뜨겁게 냉정하게
일본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성차별 문제는 한국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서 결혼 적령기인 20대 중반을 지난 여성을 가리키는 ‘마케이누(패배한 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죠시력(여자다움의 지수)’, ‘온나미가키(여성스러움을 가꾸는 노하우)’ 같은 표현들이 여전히 미디어나 출판 시장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일본이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은 최소한 이제 눈치라도 슬슬 보기 시작했으니까.
이른 경제 성장과 눈부신 버블 시대를 누렸던 경험 덕분일까? 혹은 19세기 때부터 시작된 서유럽의 일본 문화를 향한 오리엔탈리즘적 찬양 때문일까?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일본 ‘엘리트 여성’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노 요코, 구보타 시게코, 구사마 야요이, 레이 가와쿠보, 시오노 나나미 등 ‘엘리트 일본 여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제각각인 인물이긴 하지만 경쾌한 유머 감각을 가진 여성 작가들도 종종 눈에 띈다. 물론 마스다 미리는 ‘노잼’이다. 그러나 <노다메 칸타빌레>의 니노미야 토모코, 최근 <도쿄 후회망상 아가씨>로 엄청난 히트를 친 히가시무 라아키코 같은 순정 만화가들은 물론, 요네하라 마리, 사노 요코 등 일본 여성 작가의 에세이가 꾸준히 번역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들에게 특정한 시각과 입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 조각조각 난 개인적인 인상을 이어 붙여보면, 결국에는 이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드러난다. 비슷한 문화권에서 자랐으나 한 번도 세계 최고 수준의 호황을 누린 적이 없는 옆나라의 여자애가 갖는 동경, 공감, 혹은 대리만족. 그리고 여기에 그들의 창작품을 충실하게 소비한 ‘독자’가 작가에게 갖는 존경심이 결합되어 내게 이들 각각이 ‘쿨한 여자’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대변하게 된 거다!
그중에서도 한 명을 택하자면 단연 사노 요코를 꼽겠다.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0년 전쯤, 동화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통해서다. 100만 번 사는 동안 만난 모두의 사랑을 받았지만 스스로에게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미련 없이 죽고 되살아나던 고양이의 이야기. 도무지 동화책 같지 않은 동화를 쓴 사노 요코의 인생에는 굵직한 이별이 존재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 16년간 키운 고양이의 죽음, 그리고 유방암을 선고받고, 201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사노 요코는 자신의 삶과도 치열하고 성실하게 이별을 준비한다. 이때의 과정은 <사는 게 뭐라고>나, <죽는 게 뭐라고> 같은 에세이에 꼼꼼히 남아 있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암 선고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신랄한 유머 감각’, 또는 ‘통찰력’이지만 치료의 고통과 쇠하는 체력, 그 과정을 그녀는 더없이 솔직하게 응시한다. 나 역시 이런 태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냉소가 묻어 있긴 하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 뜨겁게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한국에만 스무 권 넘는 책이 번역됐을 정도로 생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고, 아주 어린 시절의 추억부터 항암 치료까지 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정도로 자신의 삶을 몇 번이고 읽고 쓰다듬었다. 내가 사노 요코를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지점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평생 뜨겁게 달려왔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어느 때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점.
얼마 전, 여행 중 들른 동화책 전문 서점에서 오랜만에 사노 요코의 책을 만났다. 제목은 그 스스로 가장 사랑한 동화였다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섯 살짜리 고양이와 사는 아흔여덟 살 할머니. ‘하지만 나는 할머니인걸’ 하고 늘 한 발자국 뒤에 머물던 할머니는 어느 순간 용감하게 고양이와 함께 낚시를 가고, 등산을 한다. 마치 다시 다섯 살이 된 것처럼. 장화를 신고 낚싯대를 들고 걸어가는 그림 속 할머니와, 유머와 활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삶을 일궈냈던 작가의 인생이 책 밖으로 선명하게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아아,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 이마루(<쎄씨>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