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루 소재는 디자이너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시선 둘 곳 없이 아찔하게 섹시한 듯하다가도 더없이 낭만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시스루.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을 현실로 표현하는 즐거운 패션 게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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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소비자의 반응이나 오류 수정 등 마켓 테스트를 위해 공개하는 제품을 베타 버전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2017년 봄/여름 시즌 런웨이에 오른 다채로운 시스루 소재는 디자이너의 상상과 갈망, 열정을 모두 담은 그야말로 실험적 베타 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콘셉트이지만 좀 더 시적이고 드라마틱한 패션을 선보이는 런웨이 피스는 어떻게 보면 몇 달 후 매장에서 선보일 커머셜 피스를 위한 맛보기, 테스트 버전이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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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연 소재의 목걸이는 2만2천원, 자라(Zara). 2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슬립은 1백27만원, 라펠라(La Perla).

패션에서 시스루 소재가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패션에 대한 고리타분한 생각이 깨지고,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문화의 거울로 음악과 패션이 거론된 시기다. 우주 시대 개막과 함께 패션에 관심 좀 있다 싶은 이들은 앙드레 쿠레주의 스페이스 룩에 열광했다. 비닐을 비롯한 비치는 소재를 이용한 시스루 룩은 앞서가는 젊은이들이 선택하는 ‘그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 시스루 룩은 미래적 분위기보다는 섹시한 여성성을 드러내는 키워드가 되었다. 시스루 룩의 근간을 이루는 레이스나 튈 소재 등은 란제리 의상의 주요 소재였고, 속옷이 겉옷으로 치환되면서 ‘란제리 룩’이 패션계 전면에 등장했다(‘머터리얼 걸(Material Girl)’을 부르던 데뷔 시절 마돈나를 유명하게 한 것으로 그녀의 란제리 룩을 빼놓을 수 없다!). 투명하지만 특유의 빳빳한 질감 때문에 겉감이나 겉옷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던 샤, 나일론과 실크, 레이온, 아크릴 등으로 만드는 오간자, 레이스를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튈 소재를 이용한 이브닝드레스가 특히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다양한 트렌드가 공존하던 1990년대에 와서 시스루 룩은 젊은이들의 데일리 웨어로 자리 잡았고 란제리 룩, 누디 룩, 베어 룩 등을 파생시켰다.

이번 시즌 시스루 룩은 1990년의 그것만큼 다채롭다. 한계를 두지 않은 컬러, 수를 놓거나 패턴을 프린트하고 주름을 잡아 표현한 섬세한 장식, 그리고 데일리 웨어로 입을 수 있는 블라우스나 원피스부터 이브닝드레스까지, 디자이너들은 시스루의 묘미를 한껏 드러내는 의상을 선보였다. 디올의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슈가 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데뷔 컬렉션에서 시스루를 통해 섹시한 ‘여성’보다는 묘한 ‘소녀’ 감성을 자극했다. 속옷이 비치는 투명한 셔링 드레스엔 작은 봄꽃을 수놓거나 별자리와 점술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패턴을 그려 넣었고, 튈 스커트를 면 티셔츠 또는 가죽 재킷과 매치해 스포티한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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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드레스는 29만9천원, H&M. 2 폴리에스테르 소재 드레스는 1백68만원, 블루걸(Blugirl). 3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블라우스는 32만8천원, 쟈니해잇재즈(Johnny Hate Jazz). 4 페이턴트 가죽 소재 슈즈는 1백59만원,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로맨틱한 컬러 팔레트는 에밀리오 푸치, 랑방, 로샤스를 따라올 자가 없다. 팔랑거리는 나비의 노랑, 이슬을 머금은 잔디의 초록,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의 파랑,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새의 선분홍 등 실크 오간자를 맑은 색으로 물들였는데 입체 재단으로 완성한 드레스는 모델의 캣워킹에 맞춰 부드러운 웨이브를 만들었다. 카를라 소차니가 “힘 조절에 조금만 실수해도 찢어지고 한 땀만 잘못 가도 구멍이 나는 섬세한 소재 위에 요정을 그렸고, 동화를 써 내려갔다. 비치는 천은 야하기는커녕 다소곳하고 소녀 같다”라고 평한 발렌티노 컬렉션은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성공적인 단독 무대였다. 이 밖에도 다양한 패턴의 블랙 레이스를 엮어 보디라인을 드러낸 원피스를 선보인 돌체앤가바나, 속이 훤히 비치는 샤 스커트에 프린트를 하고 오간자 블라우스에 주머니를 달아 주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펜디, 주름과 러플로 시스루의 섹시함을 살짝 누른 존 갈리아노, 화이트 레이스를 레이어드한 오스카 드 라 렌타와 로다테, 여성스러운 샤 스커트와 셔링 드레스로 시선을 모은 로샤스, 튈 사용의 정석을 보여준 비오네 등도 놓칠 수 없는 컬렉션이다. 대부분 시선을 모으는 큼직한 컬러 액세서리는 자제하고 작은 메탈 펜던트 목걸이, 형태가 돋보이는 심플한 귀고리, 미니 백, 하이힐 또는 샌들 등을 매치해 전체적으로 페미닌한 무드를 극대화했다.

소재의 믹스, 여성스러운 자수, 다양한 컬러 조합, 튈과 레이스 같은 로맨틱한 장식 등 상상하는 모든 것을 보여준 듯한 시스루는 이번 시즌 누가 뭐라 해도 분명 날개를 달았다.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예술적인 시스루. 올봄, 도시에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