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상식의 레드 카펫은 브라이덜 컬렉션의 런웨이로 변해버렸다. 왜 그토록 아름다운 스타들이 신부 드레스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까?

 

별들의 전쟁

1 속이 훤히 비치는 드레스로 세련되고 당당한 노출을 선보인 배두나. 2 드레스가 아니더라도 베스트 드레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에반 레이첼 우드. 3 <라라스톤>의 미아를 떠올리게 한 엠마 스톤의 발렌티노 드레스. 4 나탈리 포트만은 우아함이 흐르는 프라다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5 자체 제작한 스퀘어 네크라인의 드레스를 입은 송혜교. 6 V넥의 우아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혜리. 7 설현의 대담한 화이트 슈트 룩은 시선을 집중 시켰다. 8 김하늘은 결혼식에 이어 미라즈윌린저의 튤 드레스를 선택했다.

지난 12월의 끝자락. 연예대상, 연기대상, 가요대전이 이어진 연말 시상식이 끝나고 피처 에디터가 이렇게 물었다.“ 왜 우리나라 여배우들은 시상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는 거야?” 올겨울 레드 카펫 룩의 트렌드는 놀랍게도 순백의 웨딩드레스 같은 스타일이 아니라 ‘웨딩드레스’였다. 합동결혼식이라도 하는 듯 말이다. 박신혜는 제니 팩햄의 2015년 브라이덜 컬렉션의 드레스를 입었고, 김하늘은 실제 자신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브랜드 미라 즈윌린저의 튤 드레스를 택했다. 김지원은 인발드로어의 가슴 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민효린은 웨딩드레스의 전형인 벨 실루엣의 튜브톱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송혜교는 레드 카펫용 드레스라고 하기엔 신부처럼 보이는 드레스를 자체 제작해 입어 의아함을 자아냈고, 혜리, 윤보미, 설현, 차오르 등 아이돌 멤버들 역시 어린 신부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그들은 모두 청순했고 아름다웠고 고왔다.

그러나 머릿속엔 다이애나 브릴랜드의 말이 부유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저급한 취향은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압도하기도 한다. 천박한 저속함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우리 모두는 저급한 취향도 섭취할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스타일조차 없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패션이다.” 이는 6년 전 쓴 ‘레드 카펫 콤플렉스’라는 칼럼에서 사용한 문구이기도 하다. 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레드 카펫 룩에는 드레스만 있고 취향은 없나보다. 그래도 한 가지 나아진점이 있다면 눈살 찌푸리는 노출로 시선을 잡으려는 절박함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가슴이나 데콜테를 드러내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노출이 스타일의 중심일 땐 지혜로움, 자신감, 우아함이 필요하다. 지난 청룡영화제에서의 배두나처럼! 루이 비통의 블랙 시스루 드레스는 과감하고 섹시했지만 적당한 가림의 지혜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여유가 묻어날 정도의자신감이 넘쳤다. 헤어 메이크업은 세련되고 우아했다. 배두나를 배두나답게, 그리고 아름답게 드러내는 노출의 좋은 예였다.

용기 있는 자들의 선택
그러니 용기 있는 자만이 레드 카펫의 승자가 될 수 있다. 한껏 차려입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모두 모이는 골든 글로브에선 올해도 대중의 취향을 고려하기보단 개개인의 취향과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다양한 스타일이 쏟아져 나왔다.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은 OST ‘Lovely Night’가 들리는 듯 은색 별이 반짝이는 발렌티노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이는 그녀가 여우 주연상을 수상할 만큼 <라라랜드>의 미아 그 자체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재키>에서 연기한 재클린 케네디의 환생을 보듯 크리스털이 달린 노란색 프라다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D 라인을 드러낸 나탈리 포트만은? 일, 사랑, 엄마의 역할을 도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여성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 웨이브를 준 커트 머리에 은빛 스팽글이 촘촘히 박힌 루이 비통의 미래적인 드레스를 입은 루스 네가는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증명했다. 에반 레이첼 우드는 드레스가 아니더라도 빛나는 스타일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 드레스 대신 알투자라의 슈트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았다. 마를렌 디트리히처럼 우아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한 슈트를 입은 모습은 작년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보위와 닮아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생일을 맞아 보위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고 말한 에반 레이첼 우드는 드레스 대신 슈트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드레스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다면 입어야 할 이유는 없죠.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 그녀처럼 웨딩드레스의 행렬 속에서 용기 있게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은 국내 스타들도 있다.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MC로 참여한 김혜수는 랄프 로렌의 셔츠와 재킷을 입었고, 설현은 2016 SBS 연예대상에서 섹시한 화이트 크롭트 톱에 화이트 슈트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지난겨울 지루한 시상식 기간 동안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남긴 스타는 고아성이었다. 고아성은 어깨를 드러낸 샤넬의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SBS 연기대상 레드 카펫의 주인공이 아닌 시상식에서 시상자로서 짧은 시간 무대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아성이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고아성이 다른 배우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굉장히 도전적인 배우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꽃무늬 레이스 드레스는 마냥 예쁜 배우로만 남지 않겠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빨간 입술은 더 이상 아역 배우가 아님을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참 동시대답다고 생각되었다.

베스트 드레서와 워스트 드레서는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를수 있다. 좋은 룩이고, 나쁜 룩인지에 대한 답은 없다. 그러나 입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개성을 드러내려고 의도했는지 정도는 상대방이 알아챌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은 상대에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상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매력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