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던 존경의 의미가 사라져가는 지금,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잘 늙기를 꿈꾼다. 그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사한 노인들을 현실에서, 그리고 책과 영화 속에서 골랐다.

 

Albert Einstein

앨버트 아인슈타인 | 과학자(1879~1955)
인류 역사상 존재한 수많은 괴짜 중에서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맨 앞에 세워야 할 것이다. 1921년 상대성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과학자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던 우주관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마하트마 간디와 슈바이처, 우드로 윌슨을 좋아한 평화주의자였고, 바흐와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좋아하고 스스로는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하는 아마추어 연주가였으며, 자신의 반려동물 개 치코와 고양이 타이거를 사랑한 동물 애호가였고, 바람을 가로지르며 요트를 타는 것도 즐겼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호기심, 그 자체였다. 세상의 원리, 다른 생명체를 향한 호기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호기심. 물론 괴짜의 면모는 충분히 갖고 있었다. ‘뉴저지 주, 머서 카운티, 프리스턴 시, 머서 가 112번지(112 Mercer Street, Prinston, Mercer County, New Jersey)’. 그가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결코 외우지 못한 집주소다. 어릴 때는 짜증이 날 때면 장난감을 집어 던졌다. 아인슈타인의 여동생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농담조로 “천재의 여동생은 두개골이 튼튼해야 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세탁비누로 세수를 하고, 걸레로 얼굴을 닦았다는 증언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실에 갇혀서 그 외의 일은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과학자가 연구 결과에 대해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감지한 아인슈타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개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핵 투하였던 사건 이후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1955년 4월 18일, 친구였던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핵 전쟁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주도했다. 핵의 심각성과 핵전쟁을 우려하는 이 선언 이후 한 달 뒤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이 선언은 2년 뒤 핵무기를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인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과학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자각은 이후 냉전 시대에 접어들며 무기 전쟁이 심화될 때, 또 하나의 도덕적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처음부터 핵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1939년, 당시 대통령인 루스벨트에게 ‘미국이 원자폭탄을 제조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에 자기 이름을 보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친인척이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봤기에, 절대악인 나치를 막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에 아인슈타인은 이때 서명한 것을 ‘내 생전에 저지른 한 가지 실수’라고 고백하며, 이를 고치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노력했다. 끔찍한 전쟁, 홀로코스트, 차츰 벌어지기 시작하는 빈부 격차를 통해 본 자본주의의 폐해. 이 모든 시기를 지켜본 아인슈타인이 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한 세계정부의 설립이었다.

 

NEW YORK, NY - APRIL 23:  Gloria Steinem speaks at the Tribeca Film Festival Awards Night at Spring Studios on April 23, 2015 in New York City.  (Photo by John Lamparski/WireImage)

글로리아 스타이넘 | 사회운동가(1934 ~ )
자연스레 풀어헤친 긴 머리, 근사한 에비에이터 선글라스, 가슴이 깊이 파인 셔츠. 자신만의 아이코닉한 스타일까지 가졌던 페미니즘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던진 메시지 중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저서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에 적힌 다음 문장일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 초경을 한 소년들은 이제야 진짜 남자가 됐다고 좋아할 것이다. 지체 높은 정치가들의 생리통으로 인한 손실을 막기 위해 의회는 국립 월경 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할 것이다. 우파 정치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피를 얻기 위해선 피를 바쳐야 한다’며 월경을 하는 남자들만이 전투에 참가해 나라에 봉사하고 신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 25인’에 뽑히기도 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63년 ‘플레이보이 클럽’에 바니걸로 위장 취업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속속들이 고발하는 르포 기사를 쓴 이후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바 ‘니걸’ 출신 기자라는 비아냥은 이후 그를 따라다녔다. 여성 혼자 카페에 가면 매춘부 취급을 당했던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플레이보이 클럽만 문제가 아니었다. 여성은 클럽 밖에서도 남자의 기분에 맞춰야 하는 ‘ 바니걸’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 만난 약혼자의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지운 경험이 있는 스타이넘은 낙태는 여성만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잡지 <미즈(Ms.)>를 창간한다. ‘미스’도 ‘미세스’도 아닌 이 새로운 호칭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1972년 창간한 이 최초의 페미니즘 잡지는 초판 30만 부가 완판되는 기록을 세운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던 100년 전에도, 지금도, 페미니스트들을 향한 사회적 편견은 두텁다.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여자, 남자 같은 여자 등….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 모든 편견을 뒤집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날 친구처럼 대하고 내게 조언을 구하고 내가 늘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했죠.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와 내가,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결코 정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스타이넘의 말이다. 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했고, 연애를 즐겼으며, 60대에는 잠시 결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일부는 그녀가 인기를 위해 페미니즘을 이용하며,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글쎄. 행여 그렇다고 해서 전국여성대회를 조직해 동일 임금을 주장하고, 유색인 여성 차별에 반대하고, 임신한 여성의 근로권 보장을 외친 그녀의 활동이 폄하될 이유가 있을까? 팔십이 넘은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약자들과 연대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로 살고 있다. 지난 2015년 5월에는 여성들이 지구 평화를 위해 비무장 지대를 걷는 ‘ Women Cross DMZ(WCD)’ 횡단을 위해 개성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함께 온 여성평화운동가 30여 명 중에는 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의심하고, 젠더라는 두텁고 거대한 벽에 끝없이 부딪혔다. 그리고 여성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쏟아진 수많은 편견을 수십 년 동안 온몸으로 받아내며 여전히 사회 활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할머니’는 이토록 강인하다.

 

유교수유택 |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 주인공(1930년대생으로 추정)
Y대 경제학과 교수인 유택은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다. 그의 생활은 규칙적이다. 늘 아침 6시 30분이면 눈을 뜨고 출근해, 퇴근한 뒤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9시에 잠이 드는 생활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강의와 연구에 보내는 그는 언뜻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순이 훨씬 넘은 교수임에도 그는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관찰과 연구의 대상은 학문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딸, 둘째 딸의 펑크족 남자친구와 학생, 학교의 동료 교수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낭만주의적인 감성을 가진 아버지, 그리고 유치원생인 손녀 하나코와 비염이 있는 고양이 타마까지. 마치 의문 거리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유 교수의 연구는 일상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예를 들어볼까? 고양이 타마의 막대기 장난감이 매번 너덜너덜해지는 것이 고양이의 수렵본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태고에 살았던 타마의 머나먼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동료 교수의 질문에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깨달음은 현재에만 그치지 않는다. 나이를 먹은 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길의 의미를 떠올리거나, 청년 시절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갖게 한 여인과 재회하며 자신이 과거에 느낀 감정의 근간을 찾기도 한다. 유택은, 인간이 지성과 감성, 양쪽 면에서 끝없이 성숙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만화의 원작자인 카즈마 야마시타는 홋카이도 오타루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만화 주인공인 ‘유 교수’가 오타루의 상과대에서 1950년부터 1973년까지 계량경제학을 가르친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것임을 단행본 26권의 말미에 명시했다. 그는 아버지, 후루세 타이로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연구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어딘가에 데려다주거나, 같이 논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에 언제나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버지를 우리 네 자매는 무척 사랑했습니다. 작품은 히트하고 거의 20년이 된 지금도 시리즈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겠죠. 2007년, 89세로 세상을 떠나기 조금 전까지 PC 앞에 앉아 우리는 뭔지 짐작할 수도 없는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독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후루세타이로쿠가 남긴 대량의 장서는 그가 근속한 대학의 부속도서관에 ‘후루세 타이로쿠 문고’라는 이름으로 기증됐다. 삶에 대한 궁금증과 평등한 시선을 잃지 않은 만화 속 주인공이, 실제로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정말 근사하지 않나?

 

MALIBU, CA - NOVEMBER 07: Clint Eastwood attends Eastwood Ranch Foundations hosts 1st annual Fall Garden Party Animal Rescue Fundraiser at at Malibu Family Wines on November 7, 2015 in Malibu, California. (Photo by JB Lacroix/Getty Images)

클린트 이스트우드 | 배우, 감독(1930 ~ )
‘진정한 보수주의자’. 노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가리켜 종종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보수주의자라 정의한 적이 없다. 무려 40여 년 전인 1974년에는 ‘중도(Moderate)’, 또는 ‘정치적 입장이 없다(Political Nothing)’라고 입장을 정리했고, 97년에 와서야 ‘자유주의자(Liberate)’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우파나 좌파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다. 실제로는 자유주의자 쪽에 가깝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30년생이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우리 조부모와 같은 세대인 셈이다. 그가 태어난 샌프란시스코의 당시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대공황의 여파가 미치기 시작한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가 그의 아버지였다. 1 92cm의 깡마른 젊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행히 카우보이 역에 잘 어울렸다. TV 시리즈 단역을 전전하던 그가 배우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이름 없는 남자 > 3부작에 출연한 이후다. 웨스턴 무비의 르네상스와 함께 자란 그는 1970년대 <더티 해리> 시리즈까지 승승장구했고, 1984년에는 직접 <더티 해리4 : 써든 임팩트>의 감독이 되어 자신의 인기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감독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어땠나? 자신이 커리어를 쌓아온 ‘웨스턴 무비’의 공식을 뒤집어버린 걸작 <용서받지 못한 자>로 오스카를 거머쥔 이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그랜 토리노>, 그리고 가장 최근의 <아메리칸 스나이퍼>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 속에서 눈에 띄는 수작을 끊임없이 선보이고 있다. 그는 엄청난 다작 감독이기도 하다. 심지어 거주지였던 카멜시의 시장으로 활동한 2년 동안에도 재즈 뮤지션인 찰리 파커의 전기 영화 <버드>를 비롯해 두 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뿐만 아니다. 두 번째 오스카 감독상과 작품상,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안긴 2005년 작품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는 복서 지망생 메기(힐러리 스왱크)의 코치 프랭키로, <그랜 토리노>에서는 노년을 보내는 한국군 참전 용사 월트로 여전히 뛰어난 배우임을 몇 번이고 확인시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의 서사는 고전적이다. 진중하게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이끌고 가서 결국은 묵직하게 펀치를 때린다. 그런 면이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일 것이다. 그가 최근 트럼프에 대한 비난이 지나치다고 말한 것을 포함해 공화당 후보들을 꾸준히 지지해온 것도 ‘보수’ 이미지에 한몫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고, 아프가니스탄 참전 등 미국 정부의 무력 행사에 반대했다. 낙태의 자유와 동성결혼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뿐 아니라 총기 규제에도 찬성한다. 공화당의 주요 의제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한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희생자에게 공감했다. 범죄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동정이나 연민을 느낀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놈도 불쌍한 놈이지.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기 때문에 저런 끔찍한 죄를 짓게 된 거야’라고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다. 난 이런 놈들은 지구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배우로도 감독으로도, 또렷한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시민으로서도, 나이를 먹은 뒤에도 그 어떤 추문에도 휩쓸리지 않고 꼿꼿하게 서온 80대의 또 다른 배우의 이름을 우리는 댈 수 있는가? 아니, 오직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 명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