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던 존경의 의미가 사라져가는 지금,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잘 늙기를 꿈꾼다. 그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사한 노인들을 현실에서, 그리고 책과 영화 속에서 골랐다.

 

Rober De Niro in The Intern

벤 휘태커 | 영화 <인턴> 주인공(1940년대생으로 추정)
지난 2015년 9월 개봉한 영화 <인턴(The Intern)>의 국내 관객 수는 총 360만 명을 기록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전 세계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한국 관객들에게 감독 낸시 마이어스가 자신의 SNS에 “Thank You, South Korea!”라는 감사 메시지를 따로 남겼을 정도다. 개봉 이후 입소문을 타며 개봉 둘째 주에 국내 박스 오피스 1위에 등극했던 만큼 관람객 평점도 9점대로 매우 높다. 왜 우리는 나이 든 인턴과 이토록 사랑에 빠진 걸까?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70대 인턴 벤 휘태커는 영화의 핵심이다. 은퇴한 중역과 젊은 기업을 잇는 미국의 ‘시니어 인턴’ 제도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30대 워커홀릭 CEO 줄스(앤 해서웨이)의 회사에 기업부사장까지 지내고 은퇴한 시니어, 벤이 부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음악가들은 은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들은 그들 안에 음악이 없을 때 멈춰요. 저는 제 안에 아직 음악이 있다고 봅니다.” 시니어 인턴 지원 영상에서 벤이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사려 깊은 신사는 직원 200여 명의 온라인 의류 쇼핑몰, 시간 절약을 위해 회사 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바쁜 워킹맘 줄스의 공간에 차츰 자기 자리를 만들어간다. “완전 인기남이야. 다들 좋아해!” 벤이 회사 직원들의 호감을 얻은 이유는 특별하게 유능해서도, 엄청난 멋쟁이이기 때문도 아니다. 태블릿 PC 대신 1973년에 제작한 가죽케이스 가방 속에 여전히 펜과 노트북을 갖고 다니는 벤은 이상적인 노년의 모든 태도를 갖추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게 상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고,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 내면에는 어른스러운 해결책을 갖고 있다. 뿐인가. 일찍 출근해 방치된 책상을 솔선수범 치우기도, 무거운 카트를 앞서 끌기도 한다. 그러니 예전 부족 사회의 부족민들이 촌장에게 지혜를 구하듯 모든 직원이 벤에게 달려갈 수 밖에!
한국에서 유난히 높았던 벤의 인기는 우리 사회가 이런 노인상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다. 노인 공경과 혐오가 뒤엉키며 세대 갈등이 극심한 이 시대에, 이상적인 어른을 얼마나 갈구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겠다’, ‘저렇게 늙으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을 안기는 군상들만 보아온 젊은 세대에게 벤은 ‘잘 늙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역시 “우리가 꿈꾸는 실버 세대의 이미지가 영화 속 벤에게 투영돼 있다. 영화 속 벤은 ‘내가 젊었을 땐 이랬어’라고 강조하는 <국제시장>의 아버지가 아니라 입은 닫고 귀는 열어두는 ‘워너비 노인상’을 보여준다”라며, 벤을 향한 대중의 열광을 분석했다. 근사하게 나이 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세대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 벤은 이 긍정적인 전망에 힘을 보탠다.

 

윤여정

윤여정 | 배우(1947 ~ )
“김민희, 공효진과 같은 옷을 구입한다.” 60대에 새롭게 패션 아이콘으로 등극한 윤여정이 스타일 노하우라며 털어놓은 말이다. 취향을 과시하지도, 대단한 원칙이 있는 것처럼 굴지 않고 수십 살 후배들의 스타일을 따라 했을 뿐이라고 답할 수 있는 배우. 그리고 현재, 그 스타일은 윤여정의 것이 됐다. 가느다란 몸매, 자연스러운 볼륨을 준 미디엄 커트 헤어, 스키니 진 위에 걸친 무채색 맨투맨과 화이트 셔츠, 그리고 스니커즈까지. 완벽하다!
돌이켜보면 윤여정을 제외한 다른 배우를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몇몇 역할이 있다. 파격적인 등 노출을 감행한 영화 <바람난 가족>, 김강우와의 베드신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그해 레드카펫에 오른 <돈의 맛>, 보기만 해도 ‘깝깝한’ 나이 든 아들딸을 거두는 중에도 본인의 연애는 챙기는 <고령화 가족>에서의 엄마, 그리고 ‘봉’ 취급당하는 걸 알면서도 젊은 교수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혼자 로맨스를 썼다 지웠다 하던 <디어 마이 프렌즈>의 충남 등. 절친인 노희경 작가는 윤여정과 함께 출연한 2013년 <힐링캠프>에서 윤여정의 독설을 폭로하기도 했다. “내가 힘들 때 ‘글을 발로 쓰냐’고 했다. 그래서 나도 ‘연기를 왜 그렇게 못하냐’고 받아쳤다.” 물론 “의사가 칼을 대듯, 과학자가 탐구하듯 연기를 공부하는 배우. 모던하고 세련되게 캐릭터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하긴 했지만 말이다. 임상수 감독은 윤여정을 가리켜 “심장과 영혼을 내놓는 배우”라고 했다. 정작 당사자는 “나는 생계형 연기자예요. 가장 연기를 잘할 때는 돈이 궁할 때예요. 배가 고프면 뭐든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술은 잔인한 거예요.” 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굴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윤여정이 도회적인, 세련된 이미지만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로맨스를 그린 <장수상회>가 있었고, 지난봄 개봉한 <계춘할망>에서는 해녀 할머니 역할을 맡아 절절한 손녀 사랑을 그려냈다. 검버섯이 핀 새까만 피부와 흰 머리 분장이 ‘끔찍했다’는 윤여정이 밝힌 출연 이유는 이렇다. “어릴 때 증조할머니가 음식을 씹어서 주실 정도로 나를 예뻐했다. 그때는 그게 너무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게 쉰 살이 넘어 문득 생각났다. 할머니한테 미안하다고, 어려서 몰랐다고 매일 밤 자기 전에 말하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마음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무한한 사랑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꽃보다 누나> 출연 당시 어른스럽지 못하다며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어느 예능에서 말했던 것처럼 윤여정은 ‘후배들과 같이 놀다가 죽고 싶은’ 사람이다. “이해심 많고 존경받는 완벽한 선배가 되는 모습을 바란 적도 있지만 후배들의 인생은 후배의 것이다. 지도편달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라고 말하는 윤여정은 또렷한 기준을 갖고 자신의 길을 간다. 그리고 말한다. “육십 살이 되어도 인생을 몰라요.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예순일곱 살이 처음이야. 아쉬울 수밖에 없어.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내려놓는 거야 .” 어른인 걸 의식하지 않는 어른. 그 어려운 일을 윤여정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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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 | 소설 <오베라는 남자> 주인공(1950년대생으로 추정)
스웨덴의 무명작가 프레드릭 베크만의 화려한 데뷔작, <오베라는 남자>는 제목 그대로 오베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일생을 그린다. 2015년 영화로도 제작돼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설은 왜 오베가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는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베는 어떤 노인인가? 한마디로 피곤한 타입이다. 소설 속 오베의 나이는 59세로 노인이라 불리기엔 이르지만, <피플>지는 책을 소개하며 ‘괴팍한 노인’을 가리키는 단어인 ‘Curmudgeons’를 사용했다. ‘꼰대’라는 뜻이다.
기차 수리공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본인도 기술자로 근무한 오베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직접 해야 한다’는 예전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젊은 시절, 살고 있던 집이 건축 기준에 미달된다며 시에서 철거하려고 들자 직접 집을 개조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오베는 이해할 수 없다. 왜 사람들이 난방기를 고치는 방법과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방법을 잊었는지, 왜 운전은 배우지 않는지, 궁극적으로 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돈을 주고 시키는지. 그의 눈에는 한마디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놈들이다. 오베의 아침은 6 시 15분에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한다. 칸트가 따로 없다. 거주자 주차구역에 차라도 들어오면 화를 내고, 문제가 있다고 믿으면 관공서에 민원도 꼬박꼬박 넣는다. 심지어 자살을 시도한 순간에도, 목숨을 끊기 위해 구입한 밧줄이 끊어지자 바로 마트에 가서 불만을 접수할 정도다.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차는 ‘사브(Sabb)’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국인 스웨덴에서 만든 차이고 이 차로 아버지에게 운전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비록 사브는 아니지만 역시 스웨덴 차인 볼보를 타던 친구가 독일 브랜드인 벤츠를 뽑는 순간 절교를 선언할 정도다. 오베는 긍지, 근면, 도덕, 애국심이라는, 보수주의자가 내세우는 보수의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또 오베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아내 소냐를 매우 사랑했다. ‘내 인생은 흑백이지만 소냐는 컬러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했고,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아내가 이동 문제로 번번이 교사 채용에 좌절을 겪자, 비 오는 밤 학교 계단에 직접 경사로를 설치할 정도로 사랑했다. 죽음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 가장 크다. 그러나 오베는 아내를 제외한 모든 세상과 단절한 것은 아니다. 자살을 시도하러 기차 플랫폼을 찾은 순간에도, 자기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실수로 떨어지자 일단 그를 구하기 위해 스스럼 없이 선로로 뛰어드는 사람이 오베다. 옆집에 이사 온 새 가족에게 차츰 마음을 열고 아이들과 친구가 되며, 시에서 친구를 강제로 입원시키려고 하자 절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온몸으로 막는다. 아내의 제자였던 동네 남자 아이의 커밍아웃은 ‘그래서 넌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냐?’ 하고 덤덤히 받아들이고, 동네 길고양이는 결국 오베의 침대를 차지하게 된다. 타협하지 않고 원칙대로 살아왔기에 오베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당당하다. ‘ 옳은 것을 옳다’고 고집 부릴 수 있고, 삶이 그에게 주는 모욕을 뚫고 나갈 힘이 있을 만큼 말이다. 자신의 원칙을 갖고 살아온 사람. 그리고 필요할 경우에는 이웃과 무언가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던 오베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시민이다. 다시 삶에 희망을 찾아갈 무렵,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오베의 사인은 다름 아닌 ‘심장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마루야마겐지 丸山_健二-흑백

마루야마 겐지 | 작가(1943 ~ )
마루야마 겐지는 일본 문학계에서 ‘이단’에 가깝다. 1966년 <여름의 이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이후 문단과 일찌감치 선을 그은 그는, 20대에 귀촌을 한 뒤 수 십 년째 집필에만 매진하고 있다. <천년 동안에>,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등 다수의 소설을 펴내며 인기 소설가로 자리매김했고, <소설가의 각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 산문집을 내는가 하면 정원에 대한 이야기인 <황야의 정원>, 트위터와 블로그에 쓴 글을 재구성한 <분노하라, 일본> 등 수십 권의 서적을 펴내며 칠순의 나이가 넘은 지금도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가 일흔이 됐을 때 펴낸 책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는 노인의 것이라고 믿기 힘든 분노와 신랄한 논리로 가득하다. 한국 사회와 상당 부분 비슷하게 경직된 일본 사회를 버텨내야 하는 다음 세대를 향해 외치는 고함에 가깝다고 할까? 1장은 ‘부모를 버리라’는 과격한 말로 시작한다. 읽어보면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주지다. 사회 구조와 분담 구조에 대한 비난도 흥미롭다. “‘소년 같은 마음을 지닌 어른이고 싶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남자가 늘고 있다. 그들은 노동에만 종사하고 나머지는 전부 아내에게 맡기면 된다는 안이한 정신 상태로, 요령을 부려가며 너절하게 살아간다. 그런 주제에 천진하고 순수한가 하면 절대 그렇지도 않다. 너저분하게 얽혀 있는 조직과 집단에 적극적으로 발을 들여놓아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비열한 힘을 의문 없이 흡수한다. 소년의 마음이 들으면 혀를 찰 일이다.” 그런가하면 정치와 국가를 신뢰하지 말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다, 생긴 꼴부터가 악당의 전형이다.” 이쯤 되면 그 단호함에 웃음이 나올 정도다. 부모, 종교단체, 직장, 국가, 심지어 연애까지. 그는 모든 사회적인 통념이나 가치를 부정하며 그 구조에 젖어들지 말 것을 호소한다. 그의 언어나 신념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반항과 의심이 꼭 청년만의 미덕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노인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아, 이런 그에게도 애정 비스무리한 시선을 보내는 대상이 있다. 그건 바로 평생 자신과 함께했던 개들이다. 조로, 맥, 바롱, 조르바, 장고 , 구마, 류, 구로, 돈구리…. 그 기록이 궁금하다면 에세이 <개와 웃다>를 펼칠 것. 다른 생명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그의 통찰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