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짧은 시간에 재능을 만천하에 증명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분명 그 재능과 자부심에서 나온다. 아무리 자기 아름다움의 비결은 프로페셔널한 팀, 충분한 잠과 물이라고 말해봤자 우린 속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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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대로 비현실적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 굴드바게영화제, 오스틴필름비평가협회, 시카고필름비평가협회, 덴버필름비평가협회, LA필름비평가협회, 샌디에이고필름비평가협회, 영화배우조합, 뉴욕필름비평, 크리틱스 초이스, 그리고 오스카. 한 배우를 설명하기 위해 수상 경력부터 늘어놓는 것만큼 저급한 게 있을까마는, 알리시아 비칸데르(Alicia Vikander)만큼은 어쩔 수 없다. 데뷔작부터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을 업고 결국 오스카까지 거머쥔 그녀의 나이는 이제 스물여덟, 경력은 고작 6년. 그녀는 ‘연기를 하는 게 무섭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무섭다.

아직까지 미국인조차 인터뷰 첫 질문으로 ‘너의 이름이 정확히 뭐냐. 바이캔더? 비칸데르? 비캔더?’를 꺼내 들 정도로 낯선 배우지만 그녀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지는 이제 누구나 안다. 2015년에만 일곱 편의 영화를 극장에 쏟아내고, 그 영화들 어느 하나 섭섭하지 않게 골고루, 분주히 상을 쓸어가더니 결국 <대니시 걸(The Danish Girl)>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스웨덴 여배우로 오스카 수상은 잉그리드 버그만에 이어 두 번째)까지 받았으니까. 아카데미 수상이 배우 궁극의 목표나 정점이라 말 하긴 뭣하나, 비칸데르에게는 분명 ‘사건’이었다.

“지금도 얼떨떨해요. 현실감 없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스웨덴에서 나고 자란 제게 아카데미란 저 멀리 우주 어디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같은 거예요. 그런 제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드카펫을 밟고, 제가 열광하는 배우들 앞에서 상을 받은 겁니다. 비현실적인 일 아니에요?”

인터뷰 중간중간 그녀 입에서 ‘Surreal’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비현실적, 초현실적, 꿈같은 일. <대니시 걸>이라는 영화 자체가 알리시아에겐 꿈같은 경험이었다. 영화 <대니시 걸>은 어느 날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화가 에이나르(릴리)와 그의 아 게르다의 혼돈, 갈등, 용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비칸데르를 영화로 이끈 것은 그들의 관계와 캐릭터였다. “게르다는 아주 복잡한, 다층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배우로서 욕심이 났어요.” 게르다는 남편으로서 에이나르를 사랑하면서도 결국 그의 진정한 자아인 릴리를 받아들이고 그의 선택(성전환 수술)을 지지하는데, 게르다 안에는 자신이 그를 릴리로 이끌었을지 모른다는 자책과 남편을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과 사랑, 그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 등이 한데 얽혀 있다. “그리고 지금에나 가능한 줄 알았던 성전환 수술이 20세기에 감행됐다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용기 있게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스카와 <대니시 걸>로 인터뷰를 시작한 건 비칸데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강렬함 때문이지만, 사실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치고 순순한 것은 별로 없다. 잔혹한 현실이 레퀴엠 뒤로 흐르는 데뷔작 <퓨어(Pure)>의 카타리나, 전쟁의 한가운데에 선 <청춘의 증언(Testament of Youth)>의 평화주의자 베라, <맨 프롬 (U.N.C.L.E)>의 발랄한 정비공과 팜므파탈 스파이 중간 어딘가의 개비, 미친 셰프 브래들리 쿠퍼의 옛 애인이자 조력자 <더 셰프(Burnt)>의 앤 마리, 그리고 무엇보다 <엑스 마키나(Ex Machina)>의 A.I. 에이바. 완벽하게 인간에 가까운 로봇, 그러므로 가장 완벽한 로봇 에이바는 인간과 로봇의 이성과 감정,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어야 했고, 비칸데르는 인간으로서의 로봇이자 로봇으로서의 인간을 정확히 구현해낸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삐걱대는 그 손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발레다. 그리고 발레는 비칸데르가 배우의 길로 들어서기 전, 그녀의 것이기도 했다. “어려서 연기학교에 들어가려 했으나 계속 실패하고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스웨덴왕립발레학교에서 9년이나 발레를 했으니 정규 교육 과정 기간을 주로 발레와 살았다고 할 수 있죠. ”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리시아는 발레 도중 부상을 입고 스웨덴 TV 드라마에 간간이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발레 대신 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말이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묘하게도 발레와 연기는 아주 비슷해요.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작은 프레임이 나 큰 프레임을 짜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똑같아요.”

하지만 <엑스 마키나>의 로봇 움직임이나 아주 단순하게<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의 무도회 장면에서 그의 발레 경력을 떠올리는 건, 비칸데르의 발레와 연기 접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발레는 연기로 보여주는 몸의 움직임을 넘어선다. “전 연기를 할 때 몸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요. 인물을 구축할 때 먼저 신체적으로 접근하면 제 자신과 인물을 분리하기 쉽죠. 그 인물이 사용하는 보디랭귀지, 움직임, 행동 등을 구축하면서 제 역할을 만들어가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발레를 한 경험이 아마 이런 식으로 연기에 녹아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엑스 마키나>야말로 지금까지 비칸데르의 최고작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 또 한번 언급하자면, <대니시 걸> 못지않게 비칸데르에게 수많은 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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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본>의 새로운 캐릭터 헤더 리
솔직히 오늘의 비칸데르에게 지금까지의 숱한 수상은 이미 작은 부분일지 모른다. 그와 마주하고 앉은 지금도 이 때문은 아니다. 모두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돌아온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의 새로운 본 시리즈 <제이슨 본(Jason Bourne)>에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이름이 있고, 맷 데이먼과 함께 영화 홍보를 위해 전 세계를 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익숙할 리는 없으나 그렇다고 처음은 아니다. 2010년 데뷔작 <퓨어>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바 있는 비칸데르는 ‘난생처음 국제영화제라는 판타지를 실현해준’ 부산과 영화에 대한 한국의 열정을 잊지 못한다. 이번엔 빡빡한 일정상 호텔이 서울의 전부인 양 보내고 있지만, 이번 본 팀 방한에 쏟아지는 관심과 열기는 그대로 체감하고 있다. 여기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본 시리즈 합류에 대한 환영과 함께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복귀에 대한 열렬한 환영도 들어 있다.

“맞아요, 맞아요!” 본 시리즈 리스트에서 <본 레거시>를 영원히 삭제하고 싶은 본 팬심을 드러내자 비칸데르가 목소리를 높인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본 시리즈 엔딩은 완벽했는데, 그걸… (한숨) 그런데 폴이 그 시리즈를 다시 한다는 거예요, 맷과 함께! 예전 스태프들도 그대로! 그런데 제가 거기에 함께 있어요!” 비칸데르가 처음 촬영장에 갔을 때, 폴 그린그래스, 맷 데이먼, 줄리아 스타일즈뿐만 아니라 그간 함께했던 스태프들이 8년 만에 다시 뭉친 그곳에는 수많은 하이파이브와 환호성이 오갔다. “전 학교에 처음 간 학생처럼 이 큰 집단에 끼게 된 것에 완전 긴장했죠. 제게 닥친 일이 현실인가 싶어 나를 막 꼬집었다니까요”. <제이슨 본>에서 비칸데르가 연기하는 헤더 리는 CIA 소속의 사이버 전문가로, 스노든 사태 이후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갈등을 겪는다. 분명 12년 전 본 시리즈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새 캐릭터이긴 하나, 그녀가 유럽 예술영화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훌쩍 건너뛴 것은 어쩐지 좀 갑작스럽다. 아니다, 이것은 ‘정통’ 본 시리즈다. 단순히 블록버스터라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폴 그린그래스의 본이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해요. 그 이야기와 사랑에 빠지는 것. 어떤 장르든, 어떤 역할이든, 블록버스터든, 유럽영화든, 예술영화든, 나는 좋은 영화를 좋아해요.(웃음) 그리고 사람. 관객은 두 시간이면 볼 영화를, 많은 사람이 짧게는 두 달에서 다섯 달에 걸쳐 작업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그 제작 과정, 사람들과 일하는 과정이에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담은 감독과 배우, 스태프를 만나는 것. 폴? 본 시리즈를 재창조한 감독이잖아요. 맷? 최고의 배우죠. 배우 이전에 난 그들 팬이에요.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맷 데이먼을 ‘너무 웃기고 좋은 사람 이’ 라 말하는 비칸데르는 그가 가진 무궁무진한 연기의 잠재력을 거듭 강조한다. 비칸데르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배우는 이렇게 언제든 카멜레온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상상, 생각, 경험 모든 것을 총동원해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계속 그려내는 배우는 내게 늘 영감을 불러일으키죠”. 하긴 비칸데르가 또 그런 배우 아닌가. 여덟 테이크를 찍으면 각기 다른 여덟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 ‘그중 어떤 연기가 스크린에 보일지 몰라 늘 무섭다’고 말하지만, 뭐 어떤 연기인들 못해낼까. 그렇다고 그녀를 그냥 타고난 재능의 연기자라고만 할 수도 없다. 비칸데르는 ‘나는 끝없는 배움의 과정에 서 있는 배우’라고 말한다. <대니시 걸>에서 스웨덴 배우로 서 덴마크식 영어를 수도 없이 연습해 완성하고< 엑스 마키나>에서 숱한 움직임의 반복으로 인간-로봇을 구현한 것처럼.

더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배우로서의 알리시아 비칸데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더 조급증이 나는 건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얘기다. 비칸데르는 아름답다, 아주 복잡미묘하게. 천진하면서 도발적이고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이다. 차갑고 따뜻하고 밝고 어둡다. 뛰어난 미인이면서 또 아닌 듯, 스타이면서 또 아닌 듯한 혼돈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어우, 제 얼굴이 얼마나 빨갛고 땀투성이인 줄 알아요? 지금 당신이 보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 그렇든 아니든 비칸데르는 아름답다. ‘프로페셔널한 팀이 입히고 메이크업해주었다는’ 그 비칸데르뿐 아니라, 자신의 연기에 대해 세세하고 명료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줄 아는 영리한 비칸데르가,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비칸데르가 아름답다. “어쩌면 전 운이 좋은지도 모르죠. 할리우드에서 나고 자란 배우라면 늘 부풀려진 삶 속에서 살아야 하겠지만, 유럽 출신 배우라서 그런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청바지와 티셔츠와 맨 얼굴의 세계가 한쪽에 있거든요. 제 자신의 자부심, 자신감으로 살 수 있는 세계 말이에요. 그게 저를 만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