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 오래된 도시 서울을 여행하는 것은 그 사이의 기억들을 걷는 일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1989년까지. 서울의 풍경을 찾아 떠난 시간여행.

 

서 울 전 경, 1 9 4 5 1945년 광복 이후,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한국을 찾은 미군 소속 포토 저널리스트인 돈 오브라이언. 그는 약 일년 동안 한국을 여행하며 여러 사진을 남겼다. 1945년 12월에 촬영된 이 사진은 당시 서울의 전경을 담고 있다. 북한산 아래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현 광화문에 자리했던 중앙청으로, 중앙청 중앙홀은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1975년에 지어졌다.

서 울 전 경, 1 9 4 5
1945년 광복 이후,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한국을 찾은 미군 소속 포토 저널리스트인 돈 오브라이언. 그는 약 일년 동안 한국을 여행하며 여러 사진을 남겼다. 1945년 12월에 촬영된 이 사진은 당시 서울의 전경을 담고 있다. 북한산 아래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현 광화문에 자리했던 중앙청으로, 중앙청 중앙홀은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1975년에 지어졌다.

 

서 울 역, 1 9 6 0 미국 공군 출신으로  매거진의 사진가이자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한국 전쟁의 모습을 담았던 존 도미니스는 1960년, 다시 서울을 찾았다. 사진에 찍힌 옛 서울역은 도쿄대 교수 스카모토 야스시가 설계한 것이다. 외관은 스위스 루체른 역을, 내부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참고했으며, 도쿄 역과도 닮았다. 특히 루체른 역과 유사해, 1971년 화재로 무너진 루체른 역 복원을 위해 서울역을 찾았을 정도다. 1922년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된 옛 서울역은 2003년, 지금의 신축 역사가 문을 열면서 문화역 서울284이라는 이름으로 전시, 행사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 지붕의 건물은 옛 세브란스 병원이다.

서 울 역, 1 9 6 0
미국 공군 출신으로 <라이프> 매거진의 사진가이자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한국 전쟁의 모습을 담았던 존 도미니스는 1960년, 다시 서울을 찾았다. 사진에 찍힌 옛 서울역은 도쿄대 교수 스카모토 야스시가 설계한 것이다. 외관은 스위스 루체른 역을, 내부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참고했으며, 도쿄 역과도 닮았다. 특히 루체른 역과 유사해, 1971년 화재로 무너진 루체른 역 복원을 위해 서울역을 찾았을 정도다. 1922년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된 옛 서울역은 2003년, 지금의 신축 역사가 문을 열면서 문화역 서울284이라는 이름으로 전시, 행사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 지붕의 건물은 옛 세브란스 병원이다.

 

청 계 천, 1 9 7 2 서촌 백운동 계곡에서 시작해 성동구에서 중랑천과 만나는 청계천. 청계천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다. 월남민과 귀국한 동포들이 일제강점기 토막민이 살던 이곳에 모여든 것.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판자촌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사진이 촬영된 1972년은 위생과 치안 문제로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때였다. 뚝방 주민들은 봉천동, 상계동, 성남으로 흩어졌고, 1977년까지 진행된 복개공사를 통해 청계고가도로가 놓였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광화문 동아일보 건물부터 성동구 신답철교까지 약 6km에 달하는 청계천 복원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지금 청계천의 모습이 드러난 건 2005년의 일이다. 서울시는 2050년까지 역사와 전통을 고려한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의 중심을 지나는 청계천에는, 지금도 서른여 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청 계 천, 1 9 7 2
서촌 백운동 계곡에서 시작해 성동구에서 중랑천과 만나는 청계천. 청계천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다. 월남민과 귀국한 동포들이 일제강점기 토막민이 살던 이곳에 모여든 것.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판자촌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사진이 촬영된 1972년은 위생과 치안 문제로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때였다. 뚝방 주민들은 봉천동, 상계동, 성남으로 흩어졌고, 1977년까지 진행된 복개공사를 통해 청계고가도로가 놓였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광화문 동아일보 건물부터 성동구 신답철교까지 약
6km에 달하는 청계천 복원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지금 청계천의 모습이 드러난 건 2005년의 일이다. 서울시는 2050년까지 역사와 전통을 고려한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의 중심을 지나는 청계천에는, 지금도 서른여 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용 산 역, 1 9 8 2 용산역의 역사는 서울역보다 길다. 1900년 노량진까지만 놓였던 경인선이 연장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어 용산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등장한 것이 경성역, 지금의 서울역이기 때문이다. 서울역의 활약으로 쇠락의 길을 걷던 용산역은 1974년, 전철 1호선이 개통되고 KTX가 출범한 2004년 이후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의 출발역으로 자리매김하며 지금의 번화함에 이르렀다. 용산전자상가는 역 근처의 농수산 시장이 가락동으로 옮겨간 1987년 이후 등장한 것이다. 2004년 용산역과 연결된 현대아이파크몰이 개장했고, 올해 국내 최대 규모인 신라면세점이 문을 열었다.

용 산 역, 1 9 8 2
용산역의 역사는 서울역보다 길다. 1900년 노량진까지만 놓였던 경인선이 연장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어 용산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등장한 것이 경성역, 지금의 서울역이기 때문이다. 서울역의 활약으로 쇠락의 길을 걷던 용산역은 1974년, 전철 1호선이 개통되고 KTX가 출범한 2004년 이후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의 출발역으로 자리매김하며 지금의 번화함에 이르렀다. 용산전자상가는 역 근처의 농수산 시장이 가락동으로 옮겨간 1987년 이후 등장한 것이다. 2004년 용산역과 연결된 현대아이파크몰이 개장했고, 올해 국내 최대 규모인 신라면세점이 문을 열었다.

 

금 호 동 고 개, 1 9 6 3 성동구 금호동 4가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예전에는 무쇠막 고개, 수철리 고개라고 불렸다. 고개가 높아 큰 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현재 이 일대가 금호동이 되면서 금호동 고개라고 불린다.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금호동과 옥수동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1969년 금호여중이 개교했고, 1984년 동호대교가 개통하면서 지금은 강북과 강남을 잇는 길목으로 거듭났다.

금 호 동 고 개, 1 9 6 3
성동구 금호동 4가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예전에는 무쇠막 고개, 수철리 고개라고 불렸다. 고개가 높아 큰 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현재 이 일대가 금호동이 되면서 금호동 고개라고 불린다.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금호동과 옥수동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1969년 금호여중이 개교했고, 1984년 동호대교가 개통하면서 지금은 강북과 강남을 잇는 길목으로 거듭났다.

 

명 동, 1 9 7 6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1976년 12월 18일 촬영된 명동의 풍경.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혼마치’라고 부르며 도쿄의 긴자에 맞먹는 상가로 개발한 명동 일대는 그 시대에도 의상실과 다방을 찾아 나선 멋쟁이로 가득했다. 1970년대 중반의 명동 역시 장발족은 물론 하루 최대 100만 명이 모여드는 번화가 그 자체였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것은 당시 미도파 백화점으로 1939년에 조지아 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후 롯데그룹이 인수하면서 2002년 롯데 영플라자로 개관했다. 왼편으로는 당시 종로 YMCA와 함께 단골 데이트 장소였던 코스모스 백화점의 간판이 희미하게 보인다.

명 동, 1 9 7 6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1976년 12월 18일 촬영된 명동의 풍경.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혼마치’라고 부르며 도쿄의 긴자에 맞먹는  상가로 개발한 명동 일대는 그 시대에도 의상실과 다방을 찾아 나선 멋쟁이로 가득했다. 1970년대 중반의 명동 역시 장발족은 물론 하루 최 대 100만 명이 모여드는 번화가 그 자체였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것은 당시 미도파 백화점으로 1939년에 조지아 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후 롯데그룹이 인수하면서 2002년 롯데 영플라자로 개관했다. 왼편으로는 당시 종로 YMCA와 함께 단골 데이트 장소였던 코스모스 백화점의 간판이 희미하게 보인다.

 

어 린 이 대 공 원 수 영 장, 1 9 7 3 1973년 어린이날에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놀이 시설이었다. 1975년, 육영재단이 건립한 어린이회관이 능동에 들어섰고, 1977년 어린이날에는 하루 관람객 숫자만 73만5천 명을 넘겨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150m 길이의 워터슬라이드가 설치된 당시의 야외 수영장은 지금은 능동어린이회관 수영장으로 별도로 관리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에버랜드와 롯데월드가 등장하며 놀이공원으로서의 기능은 축소됐지만 2006년 무료 개방을 실시하며 가족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어 린 이 대 공 원 수 영 장, 1 9 7 3
1973년 어린이날에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놀이 시설이었다. 1975년, 육영재단이 건립한 어린이회관이 능동에 들어섰고, 1977년 어린이날에는 하루 관람객 숫자만 73만5천 명을 넘겨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150m 길이의 워터슬라이드가 설치된 당시의 야외 수영장은 지금은 능동어린이회관 수영장으로 별도로 관리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에버랜드와 롯데월드가 등장하며 놀이공원으로서의 기능은 축소됐지만 2006년 무료 개방을 실시하며 가족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 의 도, 1 9 8 9 마포나루의 백사장이었던 여의도는 1916년 비행장이 건립되며 1971년까지는 공군기지로 사용됐다. 여의도 개발은 1968년 인구 440여 명이 거주하던 유인도인 밤섬을 폭파해 얻은 골재로 여의도 제방을 쌓으며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지금의 여의도 공원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유사시를 대비해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라고 한 광장이 1999년 재탄생한 것이다. 여의도의 상징인 63빌딩은 1985년에, LG트윈 타워는 1987년 완공됐다. 2012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완공되며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은 한번 더 바뀌었다. 당시 폭파됐던 밤섬 역시 시간이 흐른 지금 퇴적물이 쌓이면서 현재 조류 49종과 식물 138종이 서식하는 생태서식지로 되살아나고 있다.

여 의 도, 1 9 8 9
마포나루의 백사장이었던 여의도는 1916년 비행장이 건립되며 1971년까지는 공군기지로 사용됐다. 여의도 개발은 1968년 인구 440여 명이 거주하던 유인도인 밤섬을 폭파해 얻은 골재로 여의도 제방을 쌓으며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지금의 여의도 공원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유사시를 대비해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라고 한 광장이 1999년 재탄생한 것이다. 여의도의 상징인 63빌딩은 1985년에, LG트윈 타워는 1987년 완공됐다. 2012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완공되며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은 한번 더 바뀌었다. 당시 폭파됐던 밤섬 역시 시간이 흐른 지금 퇴적물이 쌓이면서 현재 조류 49종과 식물 138종이 서식하는 생태서식지로 되살아나고 있다.

 

독 립 문, 1 9 7 2 서대문구 독립문 자리에는 본디 중국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은문이 있었다.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독립문을 세운 것은 1897년의 일. 사진에 나와 있는 기둥돌은 당시 영은문이 서 있던 흔적이다. 새로운 독립문의 설계는 당시 독일 공사관에 소속된 스위스인 기사가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립문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지금도 영천시장과 금화터널, 무악재로 연결되는 독립문 사거리가 당시에도 꽤 번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 립 문, 1 9 7 2
서대문구 독립문 자리에는 본디 중국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은문이 있었다.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독립문을 세운 것은 1897년의 일. 사진에 나와 있는 기둥돌은 당시 영은문이 서 있던 흔적이다. 새로운 독립문의 설계는 당시 독일 공사관에 소속된 스위스인 기사가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립문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지금도 영천시장과 금화터널, 무악재로 연결되는 독립문 사거리가 당시에도 꽤 번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 포 강 변 빨 래 터, 1 9 6 2 현재의 마포대교 북쪽에 자리했던 마포나루는 한강의 4대 나루터 중 하나로 상인들의 집결지였다. 역시 한강을 따라 형성된 마포 강변의 빨래터는 당시 전차 종점 근처의 수문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각자의 가정에서 빨랫감을 이고 가서 빨래를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복을 입는 이들이 많아서 빨래를 삶는 것이 필수였는데, 소형선박 바지선에 돈을 내고 빨래를 삶곤 했다.

마 포 강 변 빨 래 터, 1 9 6 2
현재의 마포대교 북쪽에 자리했던 마포나루는 한강의 4대 나루터 중 하나로 상인들의 집결지였다. 역시 한강을 따라 형성된 마포 강변의 빨래터는 당시 전차 종점 근처의 수문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각자의 가정에서 빨랫감을 이고 가서 빨래를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복을 입는 이들이 많아서 빨래를 삶는 것이 필수였는데, 소형선박 바지선에 돈을 내고 빨래를 삶곤 했다.

 

서 울 시 청, 1 9 8 8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부청으로 지어진 건물은 이후 여섯 번의 증축을 거듭하며 2012년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이 건립되기 전까지 시청건물로 사용됐다. 1963년 6월 설치된 분수대는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2600여 개의 전등으로 장식한 대형 트리로 변신했지만, 지금의 시청 앞에 춤추는 바닥분수가 설치되면서 40여 년간 서울시청 앞을 지켜온 분수대도 철거됐다. 옛 서울시청 건물은 지금은 서울도서관 건물로 이용 중이다

서 울 시 청, 1 9 8 8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부청으로 지어진 건물은 이후 여섯 번의 증축을 거듭하며 2012년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이 건립되기 전까지 시청건물로 사용됐다. 1963년 6월 설치된 분수대는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2600여 개의 전등으로 장식한 대형 트리로 변신했지만, 지금의 시청 앞에 춤추는 바닥분수가 설치되면서 40여 년간 서울시청 앞을 지켜온 분수대도 철거됐다. 옛 서울시청 건물은 지금은 서울도서관 건물로 이용 중이다.

 

숭 례 문, 1 9 6 0 역시 존 도미니스가 1960년 방문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아래쪽에는 1968년까지 서울시내를 돌던 노면전차의 정류장이 보이고, 남대문이 개방되어 성문으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96년, 한양 성곽과 함께 지어져 도성의 정문 역할을 했던 숭례문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성곽이 허물어지고 그 옆으로 전차와 차가 다니게 된다. 지금처럼 주변 차로를 정리하고 공원을 꾸며 숭례문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2005년의 일.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살아남았던 숭례문은 어처구니없게도 2008년 화재 사고로 소실되었다. 2013년, 숭례문은 양쪽 성곽의 흔적을 일부 복원해 등장했다

숭 례 문, 1 9 6 0
역시 존 도미니스가 1960년 방문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아래쪽에는 1968년까지 서울시내를 돌던 노면전차의 정류장이 보이고, 남대문이 개방되어 성문으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96년, 한양 성곽과 함께 지어져 도성의 정문 역할을 했던 숭례문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성곽이 허물어지고 그 옆으로 전차와 차가 다니게 된다. 지금처럼 주변 차로를 정리하고 공원을 꾸며 숭례문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2005년의 일.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살아남았던 숭례문은 어처구니없게도 2008년 화재 사고로 소실되었 다. 2013년, 숭례문은 양쪽 성곽의 흔적을 일부 복원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