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강예원은 열 편도 넘는 작품에 주연 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그건 이 배우의 운이었을까? 영화 <트릭>의 개봉을 앞둔 강예원의 작업실을 찾았다.

 

루렉스 소재의 러플장식 톱은 페이스 커넥션(Faith Connexion).

루렉스 소재의 러플장식 톱은 페이스 커넥션(Faith Connexion).

사람마다 보고 싶은 게 다 다르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사람들이 강예원을 기억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누군가는 영화 <해운대>와 <퀵>의 흥행 여배우, 혹은 <하모니> 속 노래 잘하는 배우로, 또 누군가에게는 <진짜 사나이> 속 동그란 안경을 쓴 사차원 아로미로 기억되는 강예원의 얼굴은 하나로 쉽게 정해지지 않는다. 지난봄 100만 관객을 동원한 <날, 보러와요>는 배우로서 강예원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살인 용의자로 몰린 여자, 그 극단적인 두 시간을 강예원은 홀로  끌어갔다. 또렷해진 강예원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서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녀의 그림이, 공간이,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강예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실크 소재 슬리브리스 톱과 스커트는 모두 크리스토퍼 케인 바이 마이분(Christopher Kane by My Boon). 양팔에 착용한 뱅글은 노스워크 바이 비이커(North Works by Beaker).

실크 소재 슬리브리스 톱과 스커트는 모두 크리스토퍼 케인 바이 마이분(Christopher Kane by My Boon). 양팔에 착용한 뱅글은 노스워크 바이 비이커(North Works by Beaker).

작업실이 도로를 마주한 1층에 위치해서 놀랐어요. 여배우의 공간이라면 으레 숨어 있을 줄 알았거든요.
유화 작업은 환기가 중요하거든요. 처음부터 2층도 싫고, 딱 1층을 원했어요. 위층은 미술학원이에요.

작업실을 옮긴 지 이제 한 달인데 물건이 많네요.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낸다는 게 느껴져요. 소품은 직접 골랐나요?
그럼요. 빈티지 트렁크는 황학동에서 구했고, 보드에 붙인 스티커도 직접 하나하나 골랐죠. 저에게는 의미가 있는 물건들이에요.

어떤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나요?
사람들이 편하게 침범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으면 했어요.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으니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내 감정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벽을 어두운 색으로 칠했죠.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만 바라볼 수 있게요. 시나리오도 이제는 이곳에서 보려고 해요.

지난 4월 개봉한 <날, 보러와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 0억이라는 예산, 스타 감독 없이 100만 명을 넘겼다는 사실을 의미 있게 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주연 배우로서 어때요?
일단은 여배우 중심의 영화가 별로 없어요. 10억이 그리 작은 돈은 아니지만 제작 여건도 협소하다면 협소하고요. 하지만 그런 걸 불평하기보다는 현재 처해진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걸 잘해내야 다음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요.

<날, 보러와요>와 <트릭>에는 모두 시청률에 목매는 PD가 등장해요. 배우로서 흥행이나 티켓 동원력에 부담을 많이 느끼는 편인가요?
저는 많이 느껴요. 특히 <퀵>을 촬영할 때 그랬어요. <퀵>이 백억짜리였거든요. 다 같이 고생하며 촬영했으니 모두 잘되면 좋잖아요. 연기를 잘하는 것도 힘든데 주변 상황까지 신경이 쓰이니 힘들었죠. 흥행에 대한 강박이 전혀 없다는 건 좀 무책임한 것 아닌가 싶어요.

 

오간자 소재의 비즈 장식 드레스는 프라다(Prada). 면과 울소재 스커트는 미우 미우(Miu Miu).

오간자 소재의 비즈 장식 드레스는 프라다(Prada). 면과 울소재
스커트는 미우 미우(Miu Miu).

<해운대>, <조선미녀삼총사>도 예산이 큰 작품이었어요.
맞아요. 어떻게 보면 좋은 환경을 겪은 뒤에 작은 영화로 온 거죠. 6월에 개봉할 <트릭>은 <날, 보러와요> 예산의 절반이거든요. 사실 배우로서 제가 한단계 발전한다면 상관없어요.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내가 어떤 환경에서든 잘할 수 있겠구나 싶은 자신감이 붙죠.

<날, 보러와요>의 반응을 찾아보면 당신의 연기를 칭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더군요. 어떤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요?
흡입력이 강하다는 말이요. 영화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흡입력이 있다는 건 적어도 두 시간 동안 누군가 몰입해서 내 연기를 봐줬다는 거잖아요. 심지어 좋았다고 하면 정말 날아갈 듯이 좋지 않겠어요? 물론 마냥 신나기만 한 건 아니에요. 계속 이렇게 하라는 채찍질같이 느껴져서 요즘 어깨가 좀 무거워요.

캐릭터를 연구하는 본인만의 방식이 있나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봐요. ‘너한테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떨 것 같아?’ ‘너희 어머니가 이러면 어떨 것 같아?’ 하는 식으로요.

사람들의 대답이 예상과 많이 다른 경우도 있었나요?
없어요. 제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도 그렇고, 감정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보편화된 정서나 감정을 갖고 있죠.

<아는 형님>에서 출연자들의 고민 상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어요. 출연자들의 감정이나 상황에 이입한 대답이 적절해서 방송사에서 답변을 정해줬나 싶을 정도였죠.
그건 아니예요. 하지만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긴 해요. 강호동, 이수근 씨 등 네 명 모두 상처가 있는 분들이라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요. 그래도 설정된 포맷이 있는 프로그램이라 걱정되긴 했어요.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는 가상 결혼도 했잖아요.
어쩌면 그 경험이 도움이 됐을 수도 있어요. 제가 막상 상황에 처하니까 말을 또 술술 잘하더라고요!

<트릭>의 영애는 어떤 인물인가요?
우선은 암에 걸린 남편을 돌봐야 하죠. 그러다가 시청률에 집착하는 PD(이정진)의 휴먼 다큐멘터리에 남편과 함께 출연하게 되며 자신도 몰랐던 모습을 알아가게 돼요.

어떤 모습이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슬퍼서 울다가도 문득 거울에 모습을 비추며 ‘아 나 살 빠졌나?’ 하는,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죄책감을 느끼죠.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표현됐을까 궁금하네요.
부부 갈등을 다룬 다큐를 보면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그 사람의 본모습이 나올 때가 있어요. <트릭>에서 저는 관찰카메라 앞에 있는 일반인을 연기하는 거잖아요. 물 한 잔을 마실 때도 카메라가 있는 걸 잊고 본모습을 드러내는 일반인을 연기해야 하는 건 또 다르더라고요.

최근 몇 년 동안 주연급의 작품을 10편 넘게 했어요. 충무로에서 당신의 입지나 사람들이 당신을 찾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하하, 사람들이 저를 찾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레이스 소재의 크리스털 장식 드레스는 마이클 코어스 (Michael Kors).

레이스 소재의 크리스털 장식 드레스는 마이클 코어스 (Michael Kors).

많은 작품을 했다는 건 많은 이들이 당신을 택했다는 거죠.
전 제가 더 궁금해하고, 더 찾아나서는 쪽이에요. 앉아만 있어도 시나리오가 수십 편씩 쌓이는 위치도 아니고요. 그리고 그런 위치에 오르더라도 분명히 나름의 갈증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 나에게 올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거든요. 항상 경쟁자도 있고요.

사람들이 당신과 일하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배우. 저와 작업한 분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에요. <점쟁이들> 때는 영하 10℃가 넘는 날씨에 바다에 직접 들어갔어요. 함께 바다에 들어간 다른 남자 배우는 병원에 실려갔을 정도였죠. 이런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배우가 많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의 샤를리즈 테론처럼 머리를 밀고, 얼굴에 검댕을 묻힐 수 있는 여배우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겠냐는 기사를 읽은 적 있어요.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신인을 제외하면요.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배우들 말고 이미 자리를 잡은 여배우들 중에서 그렇게 할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면 누가 할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영화 속에서 삭발은 해보고 싶어요. 제가 두상이 예쁘거든요.

어떤 맥락에서 삭발을 하게 될지, 상상도 해봤나요?
복수겠죠. 남자처럼 보여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아니면 스님? 하하. 모든 배우들이 지금 촬영하고 있는 이 작품만 생각하며 살진 않아요. 뒤도 돌아보고, 다음 행보도 생각하죠. 그런데 저는 하나에 꽂히면 일단 그것만 하고 나중에 돌아보는 쪽이에요. 그렇게 저를 내던질 용기도 있고요.

확실히 당신은 몸을 사리지 않기로 유명하죠.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 같나요?
정말 모르겠어요. 피가 끓어서 할 수밖에 없다는 말밖에는요. 공동 작업을 하면서 한 장면씩 만들어갈 때의 희열도 있고,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도 있어요. 작업해본 사람들이 ‘엑스표’를 치는 배우와 ‘동그라미’를 치는 배우가 있다면 저는 엑스표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안 한 적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연기할 때를 제외한 혼자만의 시간도 아주 잘 꾸려가는 것처럼 보여요. 여배우 강예원과 개인적인 삶은 잘 분리되어 있나요?
아뇨. 전혀 분리가 안 됐어요. 레드카펫에 설 때나 오늘처럼 예뻐 보여야 할 때만 여배우로서 인식을 하죠.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 새로운 걸 하려고 하는 건 혼자서 제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어서예요. 예전에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놀아봤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다른 방법을 찾은 게 그림이었군요.
10년 전쯤, 달리의 그림을 보고 아, 나도 이렇게 색을 칠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서 바로 재료를 구입했어요.

그림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매력적이던가요?
그림에는 제 감성이 들어가잖아요. 온전히 내가 만든 결과물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느낄 때, 거기에서 오는 희열이 있어요. 그러다 보면 매일 수다 떨고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는 게 아까워지죠.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도 그때그때 다를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싶어요?
색을 막 뿌리고 싶어요. 저 뒤쪽의 그림들은 모두 페인트로 뿌린 거예요.

폴락의 그림처럼요?
네, 폴락처럼요. 그런데 그렇게 흩뿌리듯 흩어지는 것 말고 지금 제 기분을 대변하는 색, 제 감정을 커다랗게 도장처럼 찍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