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에 속옷 바람이 불자 여자들은 란제리를 당당하게 겉으로 꺼내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쁘게 입는 거, 그게 쉽지 않다. 란제리 룩에 대해 할 말 많은 사람들을 소환해 이야기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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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립 드레스안에 몸의 라인을 잡아줄 슬립을 겹쳐 입을 것! 2 실크 브라톱엔 박시한 티셔츠로 캐주얼함을 더하라. 3 30대라면 섬세한 레이스의 모노톤 란제리를 고를 것. 4 레이스톱과 레이스 블라우스를 겹쳐입는 아주 적절한 예. 5 슬립 드레스 위에 오버사이즈 재킷을 걸치는 건 가장 안전한 선택.

2016년 봄/여름 시즌 트렌드의 중심에는 ‘언더웨어’가 있다. 세린느, 지방시, 발렌시아가, 디올, 알렉산더 맥퀸, 캘빈 클라인의 컬렉션에는 옷 안에서 일탈을 꿈꾸던 속옷이 현실과 타협을 청하며 밖으로 드러났다. 란제리 스타일이 화두가 된 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올여름은 그 기세가 대단하기도 하거니와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우리를 유혹한다. 관능의 미학을 보여주는 판타지적인 클리셰라기보다는 목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선을 조심스럽게 드러낸 슬립 드레스와 캐미솔, 매끄러운 실크 가운이 다양한 형태로 제안되었다. 몸을 가두지 않는 유연한 실루엣, 레이스를 곁들인 슬릿 장식은 란제리를 현실적인 옷의 범주로 끌어들였다.이들을 테일러드 팬츠나 티셔츠 등의 실용적인 아이템과 스타일링한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마음껏 여성성을 드러내라고 주문하는 옷들을 보고 있자니 당장 슬립을 입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거리에도 티셔츠에 브라톱, 슬립드레스를 레이어드하여 입은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렇다면 적정 선을 지키며 란제리를 겉옷으로 아름답게 입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올 시즌 나체라는 에로틱한 주제를 담백하고 가볍게 표현한 로우 클래식의 디자이너 이명신, 속옷 전문가이자 란제리 룩의 실천주의자인 라펠라의 브랜드 매니저 김유미, 여성의 섹시함을 담담하게 연출하는 스타일리스트 임지윤과 함께 란제리 룩을 멋지게 입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입체적으로 탐했다.

ㅡ 안녕하세요! 오늘은 란제리 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모이게 되었어요. 전 오늘의 만남을 위해 이렇게 티셔츠에 캐미솔을 겹쳐서 입어봤어요.
김유미 란제리 브랜드를 홍보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란제리 룩이 익숙해요. 청바지를 입고 위에 캐미솔, 뷔스티에, 슬립을 번갈아 입으면 일주일을 보낼 수 있을 정도죠. 뷔스티에 위에 셔츠를 입거나 캐미솔 위에 재킷만 걸쳐도 근사해요. 밑단에 레이스가 달린 슬립 위에 스커트를 레이어드하는 것도 멋지죠.
임지윤 저는 살짝 비치는 얇은 소재 옷을 좋아하는데, 브래지어를 비치게 입는 스타일링을 즐겨요. 선 하나로 본래의 디자인처럼 보이게 하는 거죠. 드러내놓고 ‘나 란제리 입었어’ 하는 연출보다는 그냥 스타일링에 재미를 더하는 정도?
이명신 맞아요. 요즘의 란제리 룩은 노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속옷이나 겉옷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입었다는 이미지를 주는 것 같아요.

ㅡ 로우 클래식의 올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란제리 룩의 아이디어를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선정적인 사진을 프린트한 티셔츠 위에 브라톱을 더 하고, 펜슬 스커트를 매치한 스타일링이 진짜 좋았어요.
이명신 남녀 간의 성에 눈을 뜬 소녀의 모습을 노골적이거나 심각하지 않게, 재미있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티셔츠나 얇은 스웨터 위에 슬립드레스를 매치하는 식으로요. 슬립을 티셔츠와 입을 때에는 사이즈에 유의해야 해요.

ㅡ 정말 유행이긴 한가 봐요. 주변에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더라고요. 그런데 솔직히 이렇다 할 만큼 잘 입은 사람은 별로 못 봤어요.
김유미 슬리브리스 톱이나 셔츠 위에 캐미솔을 매치할 때에는 과해 보이지 않아야 해요. 보통 캐미솔이나 슬립의 경우 광택이 나는 실크 소재가 많잖아요. 그런데 면 소재의 티셔츠 위에 겹쳐 입으면 이질감이 들 수 있거든요. 여타 다른 장식이 없거나 프렌치 자수처럼 극도로 섬세한 레이스가 좋아요. 라펠라의 시그니처인 메종 라인처럼 자수 레이스가 두꺼운 것은 컬러를 모노톤으로 선택해서 재킷 안에 입는 게 좋고요. 아무래도 안에 입는 속옷이니 다른 옷보다 세심하게 챙겨야 할 것이 많죠.

ㅡ 그렇다면 란제리를 어떤 아이템과 입으면 좋을까요?
이명신 데님 팬츠나 재킷, 카디건처럼 일상적인 의상과 함께 입거나 밀리터리 재킷이나 보이프렌드 핏의 데님 팬츠 등 남성성과 여성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보는 거예요. 오버사이즈 재킷은 가슴과 어깨 부분을 적절하게 가려주어 덜 신경 쓰이죠.
임지윤 20대와 30대의 스타일링도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20대는 컬러를 보다 많이 사용하고 실용적인 옷차림에 유머를 가미하는 등 재미있는 시도를 마음껏 해볼 때이고, 30대는 보다 정돈된 분위기를 전달하면 좋겠죠. 차분한 컬러로 톤을 조절하고 가느다란 주얼리를 매치하는 정도?
김유미 실크 소재를 입을 때에는 에코백처럼 지나치게 캐주얼한 액세서리는 피하는 게 좋아요. 최소한 가죽 소재의 작은 가방이나, 클러치백 정도로 균형을 맞추면 좋겠어요.
이명신 란제리 룩은 가슴 라인을 강조하는 옷이 대부분이라 네크라인이나 밑가슴 선의 위치, 절개선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캘빈클라인 컬렉션의 경우 옷의 가슴선을 낮추고 헐렁하게 연출했는데 굉장히 소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더라고요. 최근에는 가슴을 더 크게, 혹은 허리를 잘록하게 연출하는 란제리 룩보다는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각광받고 있어요. 뭐랄까 그냥 본연의 모습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거죠.
김유미 그냥 내 몸 자체가 아름다운 거잖아요. 란제리 룩이라고 가슴을 ‘푸시업’하는 시대는 끝났어요. 입은 사람이 편해야 자신감이 생기고, 그래야 더 예뻐 보이는 거 아닐까요? 남자들의 눈에 육감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스스로의 장점을 알고,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란제리 룩을 활용하는 거죠.
이명신 여성들이 점차 자신의 가능성을 열고 적극적으로 사회 진출을 하면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비슷해지니까 오히려 남자와는 다른 매력을 확고히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여자를 더 여자답게 만들어주는 경쟁력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란제리 룩이 적절한 대안으로 떠오른 거죠.
김유미 란제리의 경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자가 선물하기 좋은 아이템으로 마케팅을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여자들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드는 장치죠. 기분 전환도 되고요. 거울 앞에 섰을 때 ‘좀 괜찮은데’ 하는 그런 자신감이 나이가 들어도 여자이게 하는 힘이죠.

ㅡ 물론 작정하고 ‘나 오늘 한가해요’라고 드러내기 위해 입는 건 아니지만, 여자다운 아름다움이란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성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젠더-뉴트럴의 시대라지만 저는 여자를 여자답게 만들고, 조금은 긴장하게 만드는 옷이 좋더라고요
임지윤 ’나 한가해요’라고 여기는건 란제리 룩을 노출이라는 코드와 연결시켜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노골적이 아니라 은근한 옷차림이 더 섹시하죠. 가슴의 단추를 세 개씩 풀고 가슴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여자의 몸이 지닌 아름다운 선을 부담스럽지 않게 드러내는 방법에 이너웨어를 적용한 ‘스타일’이라는 인식이 중요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감 있는 태도를 장착해야죠!
김유미 맞아요. 약간의 긴장감은 남녀, 그리고 룩을 떠나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거예요. 예를 들어 새틴 소재의 경우 몸을 타이트하게 조이지는 않지만 광택이 몸을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가면서 몸의 굴곡을 드러내죠. 바람이라도 불면 실루엣이 여실이 드러나요. 배와 허리에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 하는 게 중요해요. 방심하고 있다가, ‘아! 맞다 배!’ 그러죠.
이명신 자신감을 갖고 입되 아무래도 속옷이다 보니 다른 의상을 입을 때 보다는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해요. 말이 좀 어렵나요? 노출이라는 게 민감한 문제라서 근거 없는 자신감은 독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 체형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노출 부위나 매우 사소한 비율 차이에 의해 멋이 결정되거든요.
임지윤 모름지기 스타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죠. 그런데 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자신에게 딱 맞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야 해요. 란제리 룩을 연출할 때에는 더더욱 안에 입은 속옷에 신경 써야 해요. 슬립드레스의 경우 본래 몸의 라인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던 것인데 밖으로 입은 거니까요. 아무리 예쁜 옷을 입어도 브래지어가 떠서 옷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거나 팬티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정말 ‘깨죠’.
김유미 속옷을 밖으로 과감하게 드러내고 그걸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기술이 필요해요. 브래지어 끈이 노출되는 게 싫어서 실리콘 누브라를 하거나 누드 컬러의 속옷을 입는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답답해 보여요. 컬러로 포인트를 준 브래지어나 앞서 언급한 레이스 브래지어를 살짝 보이게 연출하는 것이 훨씬 세련돼 보이고요. 동시에 상대가 보기에 불편한 정도의 노출은 자신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해요.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서상 ‘노브라’가 받아들여지는 건 어렵잖아요?

ㅡ 그게 참 난감해요. 캐미솔을 입을 때 브래지어를 겹치게 입는 것까진 좋은데 패드나 와이어가 있는 것보다는 홑겹의 레이스 브래지어를 매치해야 예쁘잖아요. 그런데 유두가 표 나는 건 좀 문제이고.
김유미 그럴 땐 겉은 면으로 되어 있는 유두 패치를 이용하세요.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싫어 두 개를 사서 맞대어 붙인 후 홑겹 브래지어 안에 살짝 넣어두어요. 그리고 브래지어를 세탁할 때 망에 넣어 함께 세탁하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어요.

ㅡ 유레카!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요?
이명신 란제리 룩은 상대로 하여금 호기심을 부르는 스타일이죠. 누군가 나를 알고 싶게 만드는 것, 그것이 매력이니까요.
임지윤 ‘패완옷’ ‘패완몸’ ‘패완돈’이라고 말하는데, 결국 가장 큰 매력은 ‘패완자’인 것 같아요.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절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