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클렌저 통이 매끄러운 유리로 되어 있다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기 일쑤였을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화장품에는 생각보다 많은 계산과 배려가 담겨 있다. 화장품 용기에 숨어 있는 특별한 상징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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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립스틱 안에 은밀한 비밀이 숨어 있다? 혹시 샤넬 립스틱을 가지고 있다면 뚜껑을 열고 뚜껑의 안쪽을 들여다보길. 루쥬 코코나 루쥬 코코 샤인, 어떤 종류든 상관없다. 립스틱 뚜껑의 그 어둡고 깊숙한 안쪽에 음각으로 새겨진 샤넬 로고가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평소 립스틱을 바르며 뚜껑 안쪽까지 살펴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겠지만, 브랜드는 이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시슬리의 수프리미아 보므 크림 한 통을 다 썼을 때다. 손가락으로 크림통 안쪽까지 싹싹 쓸어내는데, 뭔가 손가락에 닿는 감촉이 남달랐다. 그저 평범한 원형의 통이 아닌, 크리스털 잔처럼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커팅되어 있는 크림통의 안쪽. 마치 크림을 다 쓴 다음 그것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시각적, 촉각적 감정까지 배려한 듯했다.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다 쓴 크림통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 “크림을 다 사용하고 난 뒤에야 커팅된 단면을 직접 만져볼 수 있어요. 용기 바깥은 매우 간결한데, 안쪽의 단면에는 반전이 숨어 있죠. 전에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디테일을 더하고 싶었거든요.” 시슬리의 아시아 퍼시픽 매니징 디렉터 니콜라스 체스니어는 크림을 다 사용한 고객이 제품의 효과뿐 아니라 시각적인 만족감까지 느끼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우리가 그저 화장품을 담는 기능적인 도구로만 여기는 화장품 용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상징이 녹아 있고, 세심한 배려가 담겨 있다.

화장품 용기라는 예술
설화수 맨의 본윤에센스 제품 뚜껑은 그저 평범한 플라스틱이 아니다. 장인이 직접 수작업으로 뚜껑에 스크래치 가공을 넣었는데, 진짜 나뭇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품의 목선은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의 강인한 어깨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윤조에센스 용기의 유려한 곡선도 백자의 흐르듯 부드러운 선을 차용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소비자가 용기를 손에 잡았을 때의 감정까지 고려해 용기를 백자의 질감처럼 포슬포슬하게 가공했다. 간결해 보이지만 제품의 선과 질감까지, 마치 한 편의 예술작품처럼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비단 설화수만의 얘기는 아니다. 이렇게 용기 디자인에 각종 상징을 담은 화장품 용기의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모던함의 극치인 샤넬의 레 엑스클루시브 향수는 열고 닫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향수 뚜껑을 닫는 순간, 어떤 방향으로 닫더라도 뚜껑에 부착된 자석 덕분에 뚜껑 위 샤넬의 로고가 정위치에 정렬된다. 라프레리의 쎌룰라 파워 차지 나이트의 매끈한 은색 용기는 사실 안쪽에 두 개의 관을 숨기고 있다. 흰색의 레티놀 크림, 푸른색의 산소 파워젤이 분리되어 있다가 펌핑과 동시에 섞여 나오는 형식인데, 고급스러운 용기만 봐서는 이런 과정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미학적 노력은 용기 모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랑콤의 압솔뤼 렉스트레 라인의 경우, 블랙과 골드의 화장품 용기도 멋스럽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보석함과 같은 금빛 박스다. 장인에 의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마치 장을 열 듯 박스를 열면 예술 작품처럼 화장품이 놓여 있다. 소비자가 화장품 박스를 풀고 열어서, 화장품을 손에 잡는 그 과정까지도 고려한 것이다. 라프레리나 라메르와 같은 고급 브랜드들에는 실제로 이를 위해 어떻게 제품을 포장하고 리본을 묶으며, 쇼핑백을 어떻게 잡고 어떻게 고객에게 전달할지에 대한 별도의 지침이 있을 정도다. 끌레드뽀 보떼의 라크렘므의 리뉴얼에 담긴 의미 또한 특별하다. 언뜻 봐서는 잘 알아채기 힘들지만, 용기의 빛에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람들이 자칫 차가운 메탈 느낌이 날 수 있는 골드보다 붉은빛이 도는 골드 컬러를 더 고급스럽고 아름답다고 인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기존의 골드에서 벗어나 붉은빛이 도는 골드 컬러로 용기에 변화를 줬죠.” 끌레드뽀 보떼 글로벌 홍보 담당자인 유미 오시노미는 설명했다. 소비자들의 미세한 시각적 인식 변화까지 제품의 용기에 반영한 것이다.

화장품 용기가 만들어지기까지
물론 모든 용기가 그런 것은 아니다. 화장품 용기에는 대략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화장품 용기를 전문적으로 디자인하고 제조하는 업체에서 용기를 구입해서 사용하는 경우다. 패션으로 치자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성복을 구입하는 것과 같다. 용기 제조 업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용기 샘플 중 적합한 용기를 구입해 각각 브랜드의 특성에 맞춰 소재를 달리하거나 라벨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미 용기의 안정성이 보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디자인 개발 비용이 들지 않고 금형(용기를 찍어내기 위한 일종의 틀)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부 대형 화장품 기업에서는 용기 제조 업체 자체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는 브랜드에서 각각의 특징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아예 새로운 형태로 용기를 디자인하는 경우다. 비용도 월등히 많이 들고 과정도 훨씬 복잡하다. “새로운 용기를 개발하고 그것이 고객의 손에 가기까지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해요. 용기 디자인부터 신금형(기존에 없던 새로운 용기의 틀) 제작 기간, 내용물과의 적합성 및 반응성 테스트, 사용감과 심미성 등에 대한 고객 조사 등 여러 가지 프로세스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화장품 용기 디자이너인 김진경에 의하면 비용 역시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용기의 소재를 유리로 할 것인지 플라스틱으로 할 것인지, 용기의 코팅 및 용기 소재에 컬러를 넣는 작업 등 용기에 어떤 후가공을 할 것인지, 또 용기의 소재에 따라서 금형 비용이 달라질 뿐 아니라 라벨의 소재와 인쇄 사양 등 각 과정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용기 제조의 비용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운 용기 하나를 제조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므로, 브랜드 내 모든 제품을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내놓기 어렵다. 따라서 몇 개 의금형을 만들어놓은 다음 그것을 계속해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브랜드 내 화이트닝 크림이나 수분 크림, 안티에이징 크림이 모두 같은 모양의 용기이듯 아이템별로 용기 모양이 동일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중 보틀이나 두터운 소재로 외관상 화장품 용량이 많아 보이게 하는 용기 디자인이 인기였다면, 최근에는 북유럽 디자인, 킨포크 스타일의 유행이 용기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디자인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 화장품 용기 제조 전문 업체의 디자인 담당자는 말했다. 의미는 더욱 깊고 넓게 내포하되 외관은 심플해지는 것이 요즘 화장품 용기의 트렌드다. 브랜드들이 대놓고 화려한 디자인이 아닌, 세심한 디테일에 승부를 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 이제 화장품 브랜드에서 내놓는 용기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노고가 녹아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라면 더더욱! 무심코 바르던 립스틱 하나라도 대충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속에 숨은 배려들을 충분히 누리고, 즐기며 소비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