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최초의 동양인 지국장을 지낸 손지애가 첫 책 <손지애. CNN. 서울>을 펴냈다. 일과 삶의 균형을 훌륭하게 잡아온 그녀가 전하는 따뜻하고 명쾌한 조언. 그녀를 말할 때 이제‘ 최초‘’, 최연소’라는 표현은 지워도 된다.

 

16만5천 명. 지난해 여성 취업자 수다. 16만1천4백 명을 기록한 남성 취업자를 처음으로 앞섰지만 여전히 롤모델로 삼을 만한 ‘ 일하는 여성’은 많지 않다. 손지애의 존재가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다. 초등학교를 미국에서 다니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게 된 그의 커리어는 반짝이는 순간으로 가득하다.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 기자를 거쳐 30대에 동양인 최초로 CNN 서울 지국장 및 특파원을 15년간 역임했고, G20 정상회의 대변인, 대통령실 소속 해외홍보 비서관으로 활약했다. 2011년, 아리랑 국제방송에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 CEO로 발탁된 것도 그다. 남편과 세 딸, 그리고 시어머니와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그녀를 만나 ‘여성으로서 일한다는 것’에 대해 물었다.

Q 첫 책이다.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나?
강연 등에서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이들이 뭔가를 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민이 많은 지금 세대들과 답을 찾아가고 싶었다. 삶에 대한 시선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Q 아무래도 여성으로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 많을 것 같다.
실제로 여성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곳에서 나를 많이 찾기도 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롤모델이라고 꼽을 만한 여성이 많지 않으니까.

Q 당신이 성취한 커리어는 성별과 무관하게 훌륭하다. 그런데도 늘 ‘여성’이라는 성별이 부각된다.
얼마 전 국제기구에 갓 취업한 한국 여성들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그들도 일을 하면서 한국 사람,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까지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건지 고민이 많더라.

Q 결론은 무엇이었나?
남자들처럼 하면 안전하긴 하다. 그러면 트집 잡힐 게 없다. 그런데 그건 결국 자신을 억누르는 거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나는 여자야. 일도 잘하지만 너랑은 달라. 그리고 그 차이점 때문에 나를 채용한 거야’라는 태도를 어느 정도는 갖는 게 중요하다. 성실하게 일을 한다는 전제하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지금 청년들조차 성별의 덫에 걸려 있다.

Q 프레임이 갈수록 다양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녀’ 같은 표현이 주는 새로운 강박이 있다.
충분히 힘든 세상이다. 그런 말에까지 얽매이며 살지 말자.

Q 여성은 업무에 소극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왜일까?
결혼 뒤에는 물리적 측면이 크다. 하지만 나는 여성들이 어떤 면에서는 더 도전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맞벌이의 경우 남성들만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엄청나지는 않다 보니 어느 정도의 모험은 가능하다고 할까? 똑같이 일이 힘들다면 여성이 일을 먼저 그만두는 경우가 많지 않나.

Q 빠른 나이에 임원이 되며 직원들과 문제는 없었나?
일을 잘하느냐가 관건이다. 일을 못하면 그때 ‘젊은 여자’인 것이 부각되며 비난이 쏟아진다.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단면적이다. 리더로서 일을 해내고, 직원인 나한테 돌아오는 혜택이 나쁘지 않다면 불만도 없다.

Q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게 한국 조직에서는 어려운 면이 있다.
회사는 조직에 다 맞추려는 사람보다 회사에 도움이 될 고유의 특성을 가진 인재를 찾는다. 면접관들이 쓴 글을 봐도 ‘남들과 똑같이 하지 마라’는 내용이 많다.

Q 그런 몰개성적인 면이 일을 할 때도 느껴지나?
한국 여성에 대한 해외의 평가는 일은 완벽하게 잘해내는데 시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거다. 업무 수행력은 높지만 창의력은 제로라는 거지.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흥미로운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높이 올라가려면 주어진 일만 하는 게 아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Q 어떻게 해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제도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한국의 여성 임원들은 대부분 외국계 회사 출신이거나, 외국계 기업을 거쳐 한국의 대기업에 스카우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여성이 능력이 없어서 승진을 못한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외국계 기업이라는 환경이 주어지니까 반짝이지 않나. 살아남을 수 없게 내부에서 짓밟고,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기업에 없는 거다.

Q 얼마 전 고졸 학력 중 최초로 삼성전자 임원을 지낸 양항자 상무도 고충을 털어 놓은 바 있다. 여성 신입사원이 많아졌다고, 남녀평등이 됐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올라갈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데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얼마 전 발표한 자료에서도 OECD 남녀임금 격차 1위를 한국이 차지했다. 우리나라처럼 급성장하고, 모든 게 빠른 나라에서 이 부분만 발전이 더디다. 왜인가?

Q 기업이나 정당의 여성할당제에 대한 반발도 있다.
할당률이 적어서 그렇다. 50%는 되어야 동등하게 목소리가 나오는데 10% 정도 주고 대단한 혜택을 베푼 것처럼 말한다. 열 명 중에 한 명인데 어떻게 목소리를 내나? 임원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있으면 식사를 할 때 ‘여성분이 정하시라’고 한다.

Q 페이스북 COO인 셰릴 샌드버그 역시 자신이 받은 차별을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여자들이 어떤 일에 열정적이면 감정적이라고 한다. 그들도 유리 천장을 느끼는데 우리가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거기에 부딪히는 것도 당연한 거다.

Q 여성 리더십을 말할 때 세심함, 공감력이 장점으로 언급된다. 실제로 그렇다고 느끼나?
글쎄. 그렇다면 세심하지 않고 포용력이 없는 여성들은 뭘까.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걸까? 일할 때 남성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여성성도 강조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Q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세 딸을 키운 것을 꼽았다. 출산과 양육, 그리고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직장인 여성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안타까운 현상이다. 나는 스물여섯 살 때 첫 아이를 낳고, 십 년이 지난 뒤에 둘째, 셋째를 가졌다.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지만 가능하다는 걸 안다. 나는 딸들에게도 ‘힘들지만 해볼 만한 일이야’라고 권한다. 너무 겁내지 말길!

Q ‘일과 가정 생활을 어떻게 양립했느냐’는 질문에 ‘남편을 잘 만나야 한다’고 답했다.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야 하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성공한 남자는 ‘일과 가정의 양립’에 관한 질문을 받지 않을 뿐이다.

Q 당신이 신입사원이던 1980년대와는 경제 상황도, 사회적인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20~30대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젊을 때부터 안정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젊을 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계속 배워가며 스스로를 키워가야 40~50대가 됐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다른 길도 한번 도전해보고 틀렸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가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건 정부나 부모 세대가 바꿔줄 수 없는 거다.

Q 지금도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정말 많다! 하지만 오십이 넘고 나니 시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일을 끝낼 수 있을까 조금 불안하긴 하다. 그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