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스타일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 수없이 많은 실패와 성공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는 것. 옷 좀 입는다는 그녀들이 스타일 성공과 실패의 추억을 공개한다.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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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보헤미안
까무잡잡한 피부와 햇빛에 탈색된 긴 머리는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지점이다. 여름에는 무엇을 걸쳐도 잘 어울리지만, 겨울에는 그 매력이 반감되는 게 사실. ‘시크’의 대명사로 불리는 검은색 코트도 내가 입으면 그렇게 칙칙해 보일 수 없으니까. 그럴 때에는 첼시 부츠와 챙이 넓은 모자가 나의 구원투수가 되어준다. 지난 크리스마스 파티는 그 승리의  기억이다. 페이즐리 패턴 블라우스와 벨보텀 데님 팬츠, 그리고 빈티지 밍크 코트를 입은 다음 첼시 부츠와 플래피 모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헤미안 무드로 치장했던 것. 크리스마스 파티에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룩이라는 친구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덕분에 추운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거리를 돌아다니며 파티를 즐겼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아이템을 찾는 것이야말로 스타일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 아닐까. – 유혜영(잘루즈 디렉터)

나도 스트리트 퀸
지난가을, 우연찮게 뉴욕 컬렉션 시즌 동안 뉴욕에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선뜻 입지 못한 볼드한 스트라이프 스커트와 셔츠를 입고 패션 에디터인 친구를 따라 쇼장 앞까지 동행했다가 스트리트 사진가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가만히 서보라 했다가 걸어보라 하는 요구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소호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You Look Gorgeous’라는 찬사를 들었는데, 그걸 증언해줄 사람이 곁에 없음이 안타까웠을 정도. 그때 찍힌 사진이 유명 스타일리스트 레이첼 조가 운영하는 패션 사이트인 ‘The Zoe Report’에 ‘The Street Style Look You Must Copy Immediately’라는 설명을 달고 올라와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침 다가오는 봄/여름 시즌도 스트라이프가 유행이라니, 서울에서도 입어야겠다. – 이혜미(잉크 디렉터)

히트텍의 활약
몇 달 전부터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옷차림이 반이라는 생각에 브라톱부터 양말에 이르기까지 풀세트를 구입했다. 1대1 필라테스 강습이 있는 날이었다. 세심하게 고른 운동복을 허겁지겁 나오느라 그만 사무실에 두고 온 게 아닌가. 시간을 쪼개서 잡은 운동시간이라 취소할 수도 없고, 사무실에 다시 가기에도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라커에 브라톱 하나가 있긴 했지만 그것만 입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이너웨어로 입고 온 검은색 히트텍에 원색의 브라톱을 매치하니 꽤나 근사했다. 히트텍의 발열 기능 때문일까. 평소보다 땀을 좀 더 많이 흘렸는데, 강사로부터 무척 열성적으로 운동한다며 칭찬까지 들었다! – 이진희(쿤 바잉 MD)

베이식이 진리
작년 봄 당시 만나던 남자와 두 번째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함께 자전거를 타기로 했고, 어떤 옷차림이 땀이 나도 티가 나지 않을까 고민 또 고민했다. 각종 잡지와 옷 잘 입는 사람들의 SNS를 훑어봤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매일 입는 흰색 티셔츠와 스키니 진 그리고 흰색 운동화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 옷차림이 통했다! 운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그도 나와 똑같이 입고 나온 덕분에(심지어 같은 브랜드의 티셔츠였다) 서로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가까워진 것 같다.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진리요, 생명이다. – 이소민(플랫폼 플레이스 마케터)

아름다운 하객
원색과 프린트 의상을 즐기는 나도 하객 패션만큼은 모노톤을 선택한다. 지난 5월,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야외에서 있었는데, 조금 과감한 색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에 인디고 핑크 색상의 드레스를 골랐다. 빙고! 하얀 드레스와 대비를 이루며 신부를 돋보이게 한 것은 물론 5월의 녹음과 싱그럽게 어우러지며 모노톤 일색의 하객들 사이에서 나의 드레스는 빛을 발했다. 이날 예뻐졌다는 말을 도대체 몇 명에게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칭찬 세례를 받았다. 단정해 보이는 것도 좋지만, 모노톤 의상에서 벗어나보면 어떨까. 특히 야외 결혼식이라면 컬러풀한 의상을 입는 것이 신부를 빛내주면서 자신의 매력도 뽐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하객 패션! 슈즈나 클러치백 같은 액세서리에 컬러를 더하는 것도 방법이다. – 정재인(제인마치 대표)

스커트의 재발견
지난여름 리조트 여행에서의 일이다. 휴양지라고 너무 캐주얼한 옷만 가져간 탓에 레스토랑에 입고 갈 옷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낮에 입었던 실크 스커트를 튜브 드레스처럼 입어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랬더니 짜잔! 원래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튜브톱 드레스인 것처럼 완벽한 실루엣에 한층 날씬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편 역시 내가 가진 어떤 드레스보다 우아해 보인다고 말했고, 그 여세를 몰아 다음 날 수영장에서는 비키니 위에 입기도 했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은 스타일에서도 통한다. – 최은경(래비티 디자이너)

셔츠의 전화위복
셔츠는 언제나 옳다. 소재나 디자인에 따라 색다른 룩을 연출할 수 있는 최적의 아이템이라는 말이다. 비즈니스 미팅이 있는 날에는 화이트 셔츠를 입고, 드레스업을 해야 하는 행사나 파티에 갈 때는 실크 셔츠의 단추를 두세 개 풀어서 청바지와 함께 연출한다. 얼마 전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있었는데 전날 새벽까지 촬영이 이어진 탓에 늦잠을 자, 허겁지겁 눈에 보이는 남편의 화이트 셔츠를 입고 갔다. 소매가 길어 재킷 밑으로 셔츠가 훌쩍  내려왔는데 ‘베트멍 제품이냐, 역시 스타일리스트는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최근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셔츠가 유행인데 새로 사지 말고 남자친구나 남편의 셔츠를 빌려 입길 권한다. – 김지혜(스타일리스트)

 

D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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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어디 있니

지난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따라 중요한 저녁 약속 자리가 잡혀 있어서 아침부터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평소 아끼던 셔츠 드레스를 입기로 결정하고,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다 전에 그 옷을 입었을 때 세 번째 단추가 똑 떨어져서 나중에 다시 달아놔야지 하고 미뤄둔 게 기억났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대충 작은 옷핀 하나로 응급처치를 하고 나갔는데, 설상가상 모임 중간에 그 옷핀마저 사라져버린 것. 맨 살이 보일까봐 신경 쓰느라 자세는 엉거주춤해졌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의 건망증과 게으름 때문에 낭패를 본 그날을 생각하면 얼룩이 묻거나 단추가 떨어졌을 때 바로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법. 아직도 종종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 윤홍미(레이크넨 디자이너)

로고가 너무해
패션 에디터란 자고로 유행에 민감해야 하는 법. 최근에는 문장이나 단어를 프린트하거나 장식한 의상에 푹 빠져 있다.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의 스웨트 셔츠를 구입한 이유도 레터링 장식 때문이었다. 얼마 전 홍콩 출장 에서의 일이다. 도착 당일 디너 행사에 스웨트 셔츠를 입고 참석했는데 홍콩 관계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다이어트 중이세요?”라고 물었다. 진짜 다이어트 중이기도 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모두 박장대소 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스웨트 셔츠에 적힌 문구 중에 한자로 ‘운동’을 뜻하는 단어가 있었던 것. 한자를 모르는 무지함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스웨트 셔츠를 입지 않았다. – 허세련(<엘르> 패션 에디터)

문화의 차이
이탈리아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밀라노 귀족 출신의 친구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고심 끝에 그날 내가 선택한 옷은 당시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입곤 했던 미우미우의 블랙 미니드레스. 전체적으로 심플하지만 레이스로 귀여움을 더한 디자인이었다. 거기에 아껴둔 비즈 장식의 스트랩 샌들을 신고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에게 쏟아지던 수많은 시선의 이유를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바로 유럽에서 결혼식 하객은 화이트나 블랙을 절대 입으면 안 된다는 것, 포멀한 장소에서는 스트랩 샌들을 신으면 안 된다는 공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여행을 갈 때에도 그 나라의 문화에 맞는 T.P.O.를 반드시 확인한다. – 손준희(젬마 알루스 디자인 대표)

아프니까 패션이다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패션 박람회 프리미어 클라세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콧대 높은 바이어와 전 세계 멋쟁이들은 다 모이는 자리인지라 가기 전부터 옷차림에 엄청나게 신경이 쓰였다. 평소 운동화나 슬리퍼 등 편안한 신발을 신지만, 한 패션 하는 파리지엔에게 주눅들고 싶지 않아 앞코가 뾰족한 발렌티노의 하이힐 슈즈를 신고 참석했다. 엄청나게 큰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가 되자 새끼발가락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일정이 끝나자마자 신발을 잽싸게 벗어 던졌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수면 양말만 신은 채 맨발의 자유를 만끽했다. – 서보람(빈티지 헐 우드 디렉터)

트렌드가 뭐길래
간결한 스웨터와 셔츠, 데님 팬츠가 내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이 얌전한 옷들이 지겨워질 무렵 손을 꽁꽁 감싼 ‘롱 슬리브’ 유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트멍과 세린느가 롱 슬리브를 선보였을 때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그러곤 렉토의 롱 슬리브 셔츠를 구매한 후 ‘썸남’과의 데이트에 당당히 입고 나갔다. 하지만 웬걸, 린드라 메딘처럼 멋져 보일 거라는 꿈은 데이트 시작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식사를 할 때나 화장실을 갈 때 길고 커다란 소매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것. 상상 속 스타일과 현실의 간극이 이렇게 클 줄이야. – 김미강(<마리끌레르> 패션 에디터)

숨막히는 멋내기
몇 해 전 여름, 방콕으로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만찬이 있는 날이라 몸매를 우아하게 살려주는 바이어스 컷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 겉감이 속이 비치는 시폰 소재라 따로 이너 드레스를 입어야 했는데, 문제는 이너 드레스까지 입으니 드레스가 몸에 너무 꼭 맞아 땀이 쉽게 찼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만찬 장소는 야외 레스토랑이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의 열기로 얼굴이 빨개졌고, 눈앞에 진수성찬을 두고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서울로 돌아온 몇 달 뒤 그 드레스는 지인에게로 넘어갔다. 그 옷을 보고 있자면 그날의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성미(WWA 대표)

어느 블랙 마니아의 과거
‘튀어야 산다’라는 패션 철학으로 옷을 입던 때가 있었다. 믹스매치 스타일에 꽂혀 있었던 당시의 나를 대면한 건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송년회 때였다. 패션 에디터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한 그날, 나는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작품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총천연색 아이템을 걸쳤다. 어두컴컴한 불빛 속에서 도도한 모습을 유지한 나의 실체는 플래시를 ‘빵’ 터트린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카키색 터틀넥 스웨터에 오렌지색 원피스, 와인빛 타이츠에 네이비 부티까지. 통일감이라곤 전혀 없는 ‘투 머치 컬러’에 호되게 당한 이후 내 옷장의 8할은 검정이 차지하게 되었다. – 사공효은(<그라치아> 패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