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고 세련된 옷을 입고 싶다는 여자의 욕망은 슬립 드레스를 낮으로 불러들였다. 관능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았던 슬립 드레스를 입고 출근을 하는 날이 도래한 것이다.

 

올봄에는 어느 때보다 깡마르고 싶다. 허리를 타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선은 탄탄하고, 팔다리와 목에서 쇄골을 거쳐 어깨로 떨어지는 선은 가냘팠으면 좋겠다. 그건 단 한 가지 이유, 슬립 드레스를 입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것도 침실용이 아닌 데이웨어로! 욕망의 발동은 2016년 봄/여름 파리 컬렉션에서부터였다. 쇼 하나를 보고 나올 때마다 머릿속은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슬립 드레스로 채워졌다. 오버사이즈 카디건을 걸친 생 로랑의 슬립 드레스, 약간의 레이스를 더해 관능과 모던을 오간 세린느의 슬립 드레스, 여성미를 극대화한 발렌시아가의 슬립 드레스는 당장 자신을 입어달라고 내게 속삭였다.

디자이너들은 지난해에도 란제리를 밖으로 꺼내 입으라고 권했다. 달라진 점은 작년에는 파자마 셔츠가 압도적이었고, 올해는 에스트로겐이 철철 흘러넘치는 슬립 드레스 쪽에 승부수를 두었다는 것이다. 슬립 드레스로 아름다운 굴곡 속에 숨겨진 관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건 1930년 대 팜므파탈로 명성을 떨친 여배우 진 할로우가 원조격이니 생각보다 일찍이었다. 1950년대에는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슬립 드레스를 입고 농염함을 드러냈다. 영화 속 비현실적인 관능미이지만, 섹스 심벌을 키운 8할은 분명 섬세한 레이스 슬립 드레스였다. 슬립 드레스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건 1990년대. 슬립 드레스는 미니멀리즘과 그런지룩 사이를,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케이트 모스와 귀족적인 우아함을 드러 낸 캐롤린 베셋 케네디를 아우르는 교집합이었다. 그 증거는 수두룩하다 . 9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제니퍼 애니스톤과 기네스 팰트로도 슬립 드레스를 사랑한 스타였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버스 광고에서 살구빛 슬립 드레스를 입고 누워 있던 캐리도 있었고, 디올의 군청색 슬립 드레스를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난 다이애나비도 있었다. 지금 모든 디자이너가 일제히 슬립 드레스를 입길 권하는 것은 여성성을 미니멀리즘에 녹여 쉽고 편하게 입는 90년대 방식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관능에서 모던으로
슬립 드레스를 이루는 요소들, 그러니까 스파게티 스트랩, 바이어스 컷, 레이스 장식, 반짝이는 소재들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것들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가 섹시하다고 규정하는 (지극히 남성의 시각으로) 풍만한 가슴, 터질 것 같은 엉덩이, 탄력 있는 허벅지는 여자들이 원하는 여성성의 정답은 아니다. 내 몸에 거짓을 강요하는 섹시함은 결코 현대적인 사고방식이 될 수 없다. 올 시즌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고, 노출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란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시즌에 슬립 드레스를 입는 지향점은 더없이 쿨한 여자가 되는 것이다. 요염은 은근하게, 섹시는 청순으로 정화할 필요가 있다.

작정하지 않고 노출하는 방법을 컬렉션에서 찾아봤다. 우선 알렉산더 왕, 캘빈 클라인처럼 일자로 툭 떨어지는 실루엣의 슬립 드레스를 고르는 것이 관건이다. 이때 중요한 건 드레스의 길이인데, 키가 작다 해도 허벅지를 드러내는 길이는 피하길. 무릎 아래 미디 길이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맥시 길이야말로 섹시하되 지나치게 섹시하지 않은 슬립 드레스 룩을 완성한다. 다음 단계는 겹쳐 입기의 기술이다. 어떤 속옷과 입을지 고민할 필요 없이 이른 봄에는 얇은 캐시미어 터틀넥 스웨터를, 날씨가 따뜻해지면 질 좋은 폴로 셔츠나 헐렁한 화이트 티셔츠를 매치하자. 더 멋을 부리고 싶다면 오프숄더형 셔츠나 손등을 덮는 긴 소매의 셔츠를 더해도 좋다. 케이트 모스가 그랬던 것처럼 넉넉한 바이커 재킷이나 테일러드 재킷을 덧입거나, 올 시즌 베트멍이 보여준 것처럼 후디 맨투맨 스웨터 등 남성적인 것을 더해 균형을 이루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 면에서 가장 현실적인 가이드가 되어줄 컬렉션은 생 로랑이다. 반짝이는 시퀸 장식의 슬립 드레스는 과해 보이지만 오버사이즈 스웨터나 데님 베스트를 매치하고 웰링턴 부츠를 신는 방식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90년대 케이트 모스를 떠오르게 하는 여유로운 실루엣의 미니멀 슬립 드레스에 스타디움 점퍼를 매치한 알렉산더 왕의 컬렉션에서는 스니커즈와 야구모자를 더해 ‘드레스 다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캐미솔처럼 짧은 슬립 드레스는 데님 팬츠와 함께 입고, 속이 비치는 시폰 소재는 다른 소재의 슬립 드레스와 함께 입으면 안전하고 세련된 룩이 된다.

해프닝의 디자이너 차진주는 소재, 컬러, 프린트의 변화가 모던한 슬립드레스 스타일링을 만든다고 말한다. “실키한 소재의 슬립 드레스보다는 슬립의 분위기만 살린 도톰한 면 소재를 추천해요. 안에 레이스 속옷을 의도적으로 아주 살짝 보이게 연출하면 더욱 센스 있는 스타일이 되죠. 원색 등의 과감한 컬러를 더하는 것 역시 모던하게 슬립 드레스를 입는 방법이죠. 프린트도 꽃무늬보다는 그래픽적인 것을 선택하세요”. 노랑 슬립 드레스에 의도적으로 카디건의 한쪽 어깨를 늘어뜨리고 네크 라인에 기하학적인 프린트를 더한 슬립 드레스를 선보인 크리스토퍼 케인의 컬렉션을 참고하면 차진주의 팁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더 스튜디오 케이의 홍혜진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저는 정말 란제리처럼 보이는 매끄러운 실크 소재의 슬립 드레스를 입을 거예요. 물론 그것만 입고 외출한다면 우스워 보이겠지요.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안에 입고 도톰한 양말을 접어서 흰색 스니커즈와 신는 거죠. 이때 슈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요. 스니커즈, 슬립온, 첼시 부츠, 혹은 투박한 슬리퍼와 같은 덤덤한 디자인의 슈즈를 고르세요. 한 가지 팁을 더하자면 실크 소재의 슬립 드레스를 입을 때는 올이 나가지 않도록 금속 액세서리나 장식이 과하지 않은 가방을 선택해야 한다는 거예요. 팔찌나 반지보다는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잘 어울려요.” 마지막으로 에디터가 전하는 슬립 드레스 연출법은 홍혜진의 의견과 다르다. 캘빈 클라인의 컬렉션처럼 체인 액세서리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캘빈 클라인은 1994년 슬립 드레스 컬렉션을 선보이고 바로 당대의 패션계를 평정한 호시절을 추억하며 세련된 재단으로 우아하게 몸을 드러내는 롱 슬립 드레스를 대거 선보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디 하니스(Body-Harness, 몸에 걸치는 액세서리)인 얇은 체인 액세서리를 매치했다는 것이다. 슬립 드레스에 고요한 에로티시즘을 더한 건 바로 이 요물 같은 액세서리 덕분이었다. 현실에서는 슬립 드레스 안에 얇은 니트 소재의 톱을 입고 체인 목걸이를 여러 겹 겹쳐서 보디 하니스처럼 보이게 하거나 알렉산더 맥퀸처럼 목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보디 하니스를 착용하고 그 위에 낙낙한 카디건을 걸쳐 슬쩍 보이게 연출하는 것이다. 혹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후프 귀고리를 한쪽에만 하는 것도 멋질 것 같다. 그리하여 ‘아무리 유행이라도 평소에 슬립 드레스를 어떻게 입고 다니겠어요’라고 말하는 이들의 생각이 빗나갔음을, 지금은 슬립 드레스를 입고도 출근할 수 있는 시대임을 입증할 것이다.

제목 없음-3

1 레이온 소재 슬립 드레스는 22만8천원, 해프닝(Happening). 2 폴리에스테르 소재 슬립 드레스는 15만8천원, 럭키 슈에뜨(Lucky Chouette). 3 폴리에스테르 소재 슬립 드레스는 5만9천원, 자라(Zara). 4 실크 소재 슬립 드레스는 8만9천9백원, 카린 로이펠트×유니클로 (Carine Roitfeld×Uniqlo).

Editor’s Pick
관능을 쿨하게, 현대적으로 조율하기 위해 필요한 슬립 드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