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 신에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 이상만 가득한 전위적인 옷은 현실을 반영하고, 자유로운 정신은 감각적인 무드로 정제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디자이너들을 만났다.


106-109 fa-New Wave in Seoul-re -31 중세의 문장에서 영감을 받은 로고. 2 사진가 홍장현이 찍은 2015년 가을/겨울 시즌 룩북. 3 디자이너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책상. 4 2016년 봄/여름 컬렉션부터 액세서리 라인을 전개한다. 5 디자이너 차진주. 6 루시드 드림이란 테마로 선보인 티셔츠. 이태원에 위치한 해프닝의 쇼룸. 8 한층 여성스러워진 2016년 봄/여름 컬렉션 의상.

4 차진주
해프닝(Happening)은 차진주 그 자체이다. 중세 어느 가문의 문장에서 영감을 받은 로고는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은 클래식의 깊이, 남성적인 뉘앙스, 단순함 속에 숨겨진 비틀어진 요소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차진주는 1 0년간 내셔널 브랜드에서 일하며 축적된 경험을 해프닝을 통해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예전에는 디자이너처럼 보이기 위해 마르지엘라, 꼼데가르송과 같은 전위적인 옷을 즐겨 입었고, 자신의 스타일뿐 아니라 디자인 역시 상품의 가치를 생각하는 데 골몰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전위적인 의상을 선보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랫동안 심취해 있던 아방가르드 요소를 걷어내고 약간의 위트로만 남겨두었다. 대신에 기본에 충실하고 진짜 입고 싶고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 치밀하게 계획된 실루엣과 질 좋은 소재만으로도 멋진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겠다는 의지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해프닝을 입는 여자는 영화 <내 멋대로 해라>의 진 세버그처럼 단순하게 옷을 입되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으며, 남성적인 얼굴과 약간의 반항적인 태도를 지녔으면 좋겠어요. 반항이라는 것은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로움을 뜻하죠.” 차진주의 말처럼 해프닝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오가며 브랜드를 성장시키고 있다. “2016년 봄/여름 컬렉션이 다섯 번째 컬렉션이에요. 처음 두 시즌은 실패가 두려웠기 때문에 가격과 판매에 집중했었죠. 대중적인 로고 티셔츠나 핏이 좋은 매니시한 팬츠에 주력한 것도 그래서였어요. 다행히 선보이는 제품마다 매진되었고, 자신감을 얻었죠. 이제는 디자이너 브랜드답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인 것 같아요. 디자이너 브랜드는 결국 디자이너만의 색이 담겨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자신의 레이블을 선보일 이유가 없죠.” 차진주는 해프닝을 성장시키고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올가을 시즌을 준비할 때부터 슬슬 놈코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어요. 좀 꾸미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 하이힐 슈즈도 다시 신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2016년 봄/여름 컬렉션에는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여성미를 더했어요. 소재와 색이 좀 더 부드러워졌죠. 제가 신고 싶은 구두와 가방도 만들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그냥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요.”

 

106-109 fa-New Wave in Seoul-re -51 컬러가 돋보이는 페이크 퍼 코트. 2 자수 장식 로고가 클래식하다. 디자이너 정지연. 4 셔츠는 렉토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아이템. 5 중성적인 실루엣의 코트. 6 의상의 기초인 패턴.

5 정지연
렉토(Recto)의 정지연은 프로덕트 서울이라는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모아 보여주는 편집매장을 운영했다. 그때에도 좋은 취향과 감각으로 패션 피플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다. 지난 2015년 봄/여름 컬렉션부터 그녀가 선보인 렉토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아 팔을 덮은 긴 소매, 대담한 슬릿이 들어간 간결한 실루엣의 와이드 팬츠, 쿠킹 호일을 연상시키는 스커트로 순식간에 패션 에디터들이 입고 싶어 안달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 비결은 자신을 비롯해 여자들이 진짜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반영해 렉토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이 곧 입는 사람의 바람이었다. 하이패션과 SPA 브랜드의 간극을 이어줄 새로운 장이 필요했고, 책의 오른쪽 페이지, 첫 장을 의미하는 렉토는 정말 그런 시작을 이어줄 것 같은 기류를 형성했다. 렉토의 딱딱한 발음은 억지로 여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멋이 묻어나는 여자를 위한 덤덤한 옷을 만들고자하는 정지연의 각오를 상기시킨다. 렉토의 옷 역시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성스럽지만 옷을 구성하는 직선적인 요소가 중성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클래식하지만 구닥다리 같지 않고 독특한 구석이 있지만 지나치지 않은 적정한 선을 지킨다. 여자들의 일상에 꼭 필요한 가벼운 면 소재의 셔츠는 로고 자수로 클래식한 뉘앙스를 더하고, 스커트는 간결하고 구조적인 실루엣이 매력적이고, 컬러 조합은 강렬하지만 깊이가 있다. 이런 점이 렉토를 서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라 자신 있게 소개하고 싶은 이유이다.


106-109 fa-New Wave in Seoul-re -61 모던한 스타일의 룩북 이미지. 2 모피가 컬러를 입어 현대적으로 변모했다. 3 우리나라 최초의 모피 재봉틀. 4 잘루즈의 디렉터 유혜영. 5 쇼룸 전경. 6 칼 클레이너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컬러.

6 유혜영
젊은 모피 브랜드가 생겼다는 말에 솔깃했다가 디렉터가 데이즈데이즈의 유혜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이 폭발했다. 실제로 마주한 잘루즈(Jalouse)의 옷을 보니, 극과 극처럼 보이던 이미지들이 셀로판지처럼 겹쳐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연결고리는 자유로움이었다. 잘루즈는 모피의 사치스러움이 현대적인 스타일이 될 수 있도록 데일리 웨어의 톱, 재킷, 테일러드 코트 등 우븐 소재 의상에서 착안한 디자인을 더하고, 모피 고유의 화려함에 보헤미안의 정서를 불어넣어 재미를 부여했다. “데이즈데이즈와 잘루즈는 계절, 가격,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다르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당당한 태도를 가진 여자를 위한 옷이라는 점은 같아요. 젊고 트렌디한 소비자에게 어필하고자 했는데, 처음에는 제가 잘 알고 경험한 분야와 많이 달랐죠. 40년 경력의 모피 전문가들에게 배워가며, 생산팀과 디자인팀이 서로 소통하며 디자인을 완성했어요.” 그녀의 말처럼 잘루즈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가득했다. 특히 형광빛을 머금은 파스텔 컬러는 사진작가 칼 클레이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윤기 흐르는 모피의 질감을 더욱 현대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질투하는 여자를 뜻하는 잘루즈는 일과 사랑, 취미, 스타일 등의 균형 잡힌 자기 관리로 남들에게 질투심을 유발하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