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영화 <마지막 액션 히어로>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소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 영화 시리즈 <잭 슬레이터>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할리우드 키드에게 멋진 판타지를 선물한 이 영화는 어느새 주말의 명화가 되었지만,그래도 우리의 액션 히어로는 영원하다.

못생긴 본드가 나타났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발탁된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 카지노 로얄>에 처음 등장했을 때, 솔직히 본드치고는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스크린에는 커다랗고 뭉툭한 코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그가 후줄근한 셔츠와 아저씨 면바지를 입은 채 무려 7~8분간 폭탄 제조범을 쫓느라 흙바닥에 구르며 두 손 두 발을 사용해 싸우는 모습을 보고서는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본드였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 시리즈는 그간 여자나 꼬시고 폭탄 볼펜과 같은 신무기에 의존했던 제임스 본드의 느끼함과 나이브함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는 불쌍하리만큼 자주 얻어터지고 언제나 피투성이와 땀 범벅이 되어 톰 포드가 열심히 만들어준 수십 벌의 슈트를 더럽히기 일쑤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영국 정보기관 MI6 요원이 아니라 주차요원으로 오인받고 상관에게 자살하지 그랬냐며 핀잔을 들은 그는 급기야< 007 스카이폴>에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요즘 액션 영화의 트렌드를 반영하듯,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역시 잊지 않는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이를 만지며 마티니나 마시는 그런 영화를 할 순 없었다. 그건 이미 하지 않았나.”

물론, 드라이 마티니 대신 진, 보드카, 백포도주에 레몬 껍질 넣어 만든 ‘베스파’를 마시고, 롤렉스 대신 오메가를 찬다고 해서 그가 제임스 본드의 클래식한 매력을 버린 건 아니다.  <007 스카이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작정하고 톰 포드 슈트를 입고 나타나 지붕 위를 오토바이로 날아다니는 장면은 과거 007 시리즈의 매력을 새롭게 재해석한, 역대 007 시리즈 중 최고의 장면이라 할 만하다. 단점으로 부각됐던 그의 엄청난 근육과 남들 보다 조금 작은 키는 그의 액션에 절도 있는 무게감을 만들어줬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입을 앙다문 채 다리를 쫙 벌리고 서 있기만 해도 무슨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는 이상한 믿음을 준다. 처음에는 다소 싫었던 그의 커다랗고 뭉툭한 코는 급기야 액션의 전설 스티브 매퀸을 생각나게까지 한다. 그는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걸처럼 몸뚱이 하나로 영화를 끌고 가는 맨주먹 파이터들의 노동 집약적 쾌감, 고민이 무척 많은 제이슨 본 류의 자기 성찰적 반성, 그리고 007 시리즈의 매끈한 슈트 포르노가 주는 짜릿한 섹시함을 모두 갖췄다. 하지만 고생하는 그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1월에 개봉하는 <007 스펙터>가 그의 마지막 본드 시리즈라고 거의 확정됐기 때문이다. 그를 이어 제임스 본드를 맡 게 될 배우,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 나한테 욕 꽤나 먹을 거다. – 나지언(칼럼니스트)

 

영화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액션을 사랑한다. 이스트우드의 액션이 변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 인생을 살며 어떻게 늙어가고 또 변화하는지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황야의 무법자>로 대표될 이스트우드의 초기 액션은 한마디로 ‘나쁜놈’ 액션이었다. 무자비하고 비열했다. 시가를 ‘꼬나’ 물고, 한 주먹거리도 안 돼 보이는 상대를 잔혹하게 구타하거나 적이 예상치 못하는 타이밍을 잡아 총을 쏜다거나, 심지어 정통 서부영화에서 금기시됐던 ‘등 뒤에서 총을 쏘는’ 액션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주인공이지만 악당의 풍모를 자랑하던 이스트 우드는 1971년 <더티 해리>로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 연쇄살인범을 잡는 형사 역을 맡았지만 아직도 이스트우드는 무자비했다. 범행을 실토하게 하기 위해 고문을 한다거나, 무방비의 범인에게 권총을 잡도록 유도해 직접 사살한다거나 하는 냉혹한 액션이었다. 하지만 액션 스타도 언젠가는 늙는다. 특히 액션 스타가 늙으면 필연적으로 슬퍼진다. 이스트우드는 노년에도 액션을 피하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예순을 훌쩍 넘어 다시 서부로 돌아간 이스트우드는 젊은 시절 무법자로 살던 악당이 나이 들어 얼마나 가련해지는지를 보여줬다. 옛날 같으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총알을 피하기 위해 비굴하게 숨는다든가, 적을 조준하며 손을 벌벌 떠는 모습 같은 것을 보여주며 서부 액션의 이면을 드러냈다. 연이어 발표한 <사선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무법자의 노년을 그렸다면 <사선에서>는 냉혈 정부 요원의 노년을 그렸다. 영화를 보는 재미의 측면으로 봤을 때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악당을 44구경 매그넘으로 사정없이 사살할 것 같은 느낌의 <더티 해리> 시리즈보다 눈이 침침해져 범인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어진<사선에서>의 이스트우드가 훨씬 더 긴장감을 유발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처럼 액션으로부터 거리를 둔 영화들로 인정받던 이스트우드는 팔순을 앞두고 자신의 액션을 정리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바로 <그랜 토리노>다. 이 영화를 통해 이스트우드는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강자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무협지적 액션의 테마를 향해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달려갔다. 동네 깡패들을 틈 날 때마다 혼내주던 한국전쟁 참전 용사는 라스트 신에서 ‘가장 멋진 액션은 희생이다’라는 것을 증명한다. 감동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던 서부의 무법자가 인생의 말년에 액션을 통해 교훈을 주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 조원희(영화감독)

 

톰 하디, 말보다 몸으로

액션 영화배우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고민에 빠졌다. 총격전이나 카 체이싱에서 가끔 졸기도 하는 나는 액션 영화치에 가깝지만, 잘 달리는 남자를 좋아해서 액션 주인공에 광속도로 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은 냉정한 것, 이상형 월드컵처럼 한 명씩 줄여가다가 보니 두 톰이 남았다. 유네스코 인간 유산으로 남겨야 할 세계 미남 톰 크루즈와 외모는 상대적으로 친근하지만 나른한 눈매가 치명적인 남자 톰 하디. 이 톰들 사이에서 누구 한 명을 고른단 말인가?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서 톰 크루즈는 그의 연기 경력 동안 갈고 닦은 우아한 액션을 하늘, 땅, 물을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선보였고, 톰 하디는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에서 O형 보유자 ‘피주머니’로서 누구에게나 피를 기증할 수 있는 유용함과 과묵한 남자의 멋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리고 적잖은 여성 동지들처럼 정석 미남과 변칙 미남 사이에서 늘 갈등하곤 한다. 둘 다 좋은데.

하지만 궁극적으로 톰 하디가 남은 것은 <매드 맥스>의 맥스라서만이 아니라 <차일드 44>에서의 레오이기 때문이었다. <차일드 44>는 흥행에 성공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매드 맥스>에 이어서 그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성실한 캐릭터이다. 어떤 전쟁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영웅일 뿐 아니라, 아내의 변절을 의심하면서도 그녀를 위해 유배도 마다치 않은 애정 깊은 남편이자 잔인하게 죽어간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진흙탕에 뒹굴면서도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남자. 액션은 절도 있는 무술이라기보다는 그의 근본 없는 러시아 악센트처럼 그럴듯하면서도 어설프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우직함이 그의 장점이랄까. 그리고 강아지 같은 ‘멍뭉미’가 대세인 요즘에 톰 하디는 시사회까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애견인일뿐더러, 본인에게도 대형견 같은 귀여움이 물씬 풍긴다.

<매드 맥스> 시리즈에서 후속편 3편까지 계약했다고 하니, 액션 스타로서 진화하는 그의 모습이 기대된다. 민첩한 느낌은 덜하지만 말보다 몸으로 행동하는 남자를 연기하기에 톰 하디는 최적화된 액션 배우인지도 모르겠다. – 박현주(번역가, 칼럼니스트)

아버님이 누구시니?
<테이큰>은 그저 그런 영화로 보였다. 리암 니슨조차 이 영화가 극장 개봉은 안 하고(혹은 못하고) DVD로 바로 출시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 개봉한 첫 번째 <테이큰>은 국내외에서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만약 여행 중 알바니아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파리 일대를 휘젓는 아버지가 실베스터 스탤론이나 제이슨 스타뎀이었다면, 그 감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리암 니슨에겐 여느 남자 액션 배우들에겐 없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노미테이트 경력과 큰 체구가 있다. 통화 중 납치되어 끌려가는 딸의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얼굴 근육, 저음으로 빠르고 단호하게 내뱉는 대사들은 액션 연기에도 드라마라는 설득력이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그의 내공이다. 10대 시절 복싱 선수로 활동한 리암 니슨은 <테이큰>에서 상체 위주의 액션을 선보인다.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의 간격이 짧은 직선 동작은 이 영화의 액션 신을 실감 나게 만들어준다. 그러니까 연기 역량과 위엄 있는 신체 조건을 디폴트로 장착한 리암 니슨이 분노하면, 파리는 불타고 인신매매단은 하나씩 사망할 일만 남은 것이다.

그 모든 액션이 가족을 지키겠다는 단순한 일념 하나로 내달린다는 점에서 <테이큰>의 액션은 가장의 액션이다. 가족에게 외면받은 험한 커리어의 정수를 비로소 가족을 위해 발휘한다. <테이큰> 시리즈에서 리암 니슨의 딸로 출연한 매기 그레이스는 한 토크쇼에 출연해 리암 니슨이 그녀가 만난 최고의 영화 속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리암 니슨은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하자 그 남자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내용은 이렇다. “나 브라이언 밀스다. 내 말 똑바로 들어 이 자식아. 넌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첫째는 너보다 수준 높은 여자랑 사귄 거다. 둘째는… 글쎄, 다음 실수는 저지르지 마라. 아니면 네 팔 부러뜨린다.” 이렇게 ‘후덜덜’한 리암 니슨이 <테이큰>을 촬영했을 때 나이가 50대 중반. 이후 그는 군인으로( 와 <배틀쉽>), 범인을 쫓는 해결사로( <툼스톤>과 <논스톱>) 다시 나타났다. 50대 중반을 넘어서야 액션물 시나리오가 밀려드는 배우라니. 시리즈가 시작할 때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가장은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는 전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까지 쓴다. 아버지는 쉴 새가 없다. 복수란 통쾌하지만, 또한 피로한 일이다.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무게가 무거운 것처럼. – 권은영(칼럼니스트)
두뇌형 맷 데이먼
맷 데이먼은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알고 보면 비범한 남자’ 역할에 최적화된 배우다. <굿 윌 헌팅> <리플리> 그리고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그랬다. 보스턴 빈민가에서 미래 없이 비천하게 살던 윌 헌팅은 자신이 비상한 수학 천재라는 사실에도 별다른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를 알아봐준 주변 사람들의 애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지 못하고 끝나버렸을 것이다. 1999년에 영화화된 <리플리>에서 맷 데이먼은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알랭 들롱과는 달리 그야말로 톰 리플리가 되어버렸다. 극 중에서 톰 리플리가 대부호의 망나니 아들 디키(주드 로)를 동경하고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것을 원하기보다 아예 그 자신이 되어버리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리플리의 탁월한 재능(The Talented Mr. Ripley)이라면 사랑하는 대상이든 죽이고 싶은 대상이든 그 대상을 굉장한 집중력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버리는 ‘배우’의 재능이었다. 그리고 등에 두 발의 총성을 입고 기억을 잃은 채 지중해에서 표류하던 남자 제이슨 본이 있다. 비밀 정보기관 트레드스톤에서 최고의 요원으로 키워낸 인물이지만 현재 자신이 가진 힘이 얼마만큼인지 모르던 제이슨 본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팔다리가 그렇게 강한 줄 몰랐고, 펜이나 책, 수건 같은 일상 소품이 자신의 손에서 살인무기급 위력을 발휘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과거 없는 남자는 겁먹은 소년의 표정으로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는 대단한 인간병기였다. 소년의 꿈, 정확하게는 악몽. 아직 보지 못한 맷 데이먼의 신작 <마션>은 그의 초기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공대 출신 ‘너드’ 버전 제이슨 본을 합쳐놓은 듯한 얘기로 보인다. 식물학자이자 기계공학자로 설정된 주인공이 화성에 홀로 남은 뒤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갖가지 과학 지식을 총동원하여 살아남는다는 설정만 들어도, 그의 ‘두뇌 액션’은 과연 어떤 스펙터클로 펼쳐질지 벌써부터 짜릿하다. –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총을 든 천사
1980년대 중반,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이 재개봉관에서 개봉관으로 바뀌었다. 개봉관이라고 해도 크게 화제가 되는 영화나 할리우드 대작을 개봉하지는 않았다. 할리우드 B급 영화나 홍콩 영화였다.< 영웅본색>을 보러 갈 때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자마자 나는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싶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싶었다. 코트를 입고 싶었다. 그냥 영화 속의 주윤발(저우룬파)이 되고 싶었다. 1987년, 나는 대학 3학년이었고, 학교에서 친구들을 붙잡고 그 영화를 꼭 보라고 말했지만 모두가 ‘유치한 홍콩 액션물’에 웬 호들갑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여름방학이 지났다. 학생들이 모여 있곤 하는 도서관 통로에서 한 친구가 입에 성냥개비를 물고 걸어왔다. 학교 근처 동시상영 극장에 <영웅본색>이 걸렸고 통로까지 사람이 찼다는 얘기가 들렸다. 학교에서는 성냥개비를 입에 문 학생이 더 많이 보였다. 주윤발의 영화, 더 정확히 말하면, 오우삼 – 주윤발의 영화에서 주윤발이라는 배우가 내뿜는 힘은 대단하다. <영웅본색> 시리즈, <첩혈쌍웅> <첩혈속집> 등을 처음 영화관에서 본 것이 어느새 사 반세기 전의 일이지만 몇몇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계단 난간에 엉덩이를 붙인 채 미끄러져 내려오며 쌍권총을 쏘는 주윤발,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줄에 매달려 총을 쏘며 아기를 구하는 주윤발.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성당에서 양손에 총을 들고 달려나가는 주윤발. 그런데 오랜만에 디브이디를 꺼내서<첩혈쌍웅>과 <첩혈속집>을 다시 보다가 깨달았다. 주윤발의 액션 장면이 그토록 강하게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은 상반되는 주윤발의 모습이 영화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첩혈속집>은 재즈바에서 색소폰을 부는 주윤발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첩혈쌍웅>에서는 자신 때문에 앞을 못 보게 된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킬러로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지에 내몰려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워야 할 때에도 함께하겠다는 친구를 보며 소년처럼 천진하게 웃는다. 부드럽고 순진한 남자와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것을 위해 총을 들고 불사신처럼 싸울 수 있는 남자. 후자의 모습은 전자의 모습에 도움을 받아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 두 모습을 하나의 얼굴로 완벽하게 드러내는 배우는 주윤발밖에 없다. – 조동섭(번역가, 칼럼니스트)

톰 아저씨의 불가능한 미션
토니 스코트 감독의 <폭풍의 질주>에서 써킷을 발칵 뒤집어놓을 새 레이서라 소개를 받고 톰 크루즈가 등장했던 장면을 기억한다. “애걔, 이 풋내기가?” 곱상한 얼굴과 왜소한 체구를 미심쩍게 훑던 레이싱 팀의 뜨뜻미지근한 눈길은 액션배우로서의 톰 크루즈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기도 했다. 70년대 후반생인 내가 보고 자란 액션 영화 속 배우들은 두 갈래였다. 이소룡, 성룡부터 이연걸까지 홍콩 영화 속의 날쌔고 화려한 무술 고수들, 혹은 실베스터 스탤론,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 걸처럼 스치기만 해도 멍들 것 같은 할리우드 덩치들. 톰 크루즈는 언제나 청춘 스타였고 등장하는 순간 화면을 화사하게 밝히는 미남이긴 해도 강한 형님들의 세계에 속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잘 생긴 액션 배우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가 쉰셋이 되고 내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톰 크루즈의 필모그래피에 액션 영화가 이렇게 여러 줄 적힐 줄은 몰랐다. 시각 기술의 발전 덕분에 액션에서 배우가 감당해야 할 몫은 상당 부분 줄었지만, 톰 크루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개봉 때마다 감독과 제작진의 증언으로 다시 깨닫다시피 많은 액션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대신 그는 스스로 해낸다. 최근 개봉작인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에서 비행기에 매달렸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지미 팰런은“ 돈 참 열심히 버네요” 라고 농담을 건넸지만, 내가 감독이라면 든든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이런 태도가 액션 배우의 장인 정신이 아닐까.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그의 액션 시퀀스 중 최고다.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매달린다는 점에서 시리즈 첫 영화의 상징적인 CIA 침입 장면을 계승하면서도, 수직으로 움직이던 1편의 동선을 아찔한 고공의 수평으로까지 확장했다. 격투를 벌이거나 자동차 추격을 할 때도 멋있지만, 크루즈의 액션 연기 스펙터클이 가장 빛나는 건 혼자 맨 몸으로 어딘가에 침투하거나 빠져나와 달아날 때다. <고스트 프로토콜>과 <로그 네이션>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단 헌트가 바지만 입은 맨발 차림으로 추적을 따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럴 때 그의 작은 몸은 전혀 단점이 아니다. 잘 짜여진 안무를 소화하는 기계체조 선수를 보는 듯한 시각적 쾌감을 준다. 그로 인해 이렇게 잘생긴 액션 배우가 지구상에도 존재하게 되었다. – 황선우(<더블유> 피처 디렉터)

 

장 클로드 반담이라는 사나이
고백하건대 장 클로드 반담은 ‘나의 액션 영웅’은 아니다. 그를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학교 수업을 제치고 극장으로 만나러 달려갔던 성룡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필모그래피 어디를 살펴도 변변한 영화 하나 없고 추문도 많다. 한 마디로, 장 클로드 반담은 몸이 제아무리 덩어리라 해도 누군가의 영웅이기에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하지만 <유니버설 솔저> <하드 타겟> <더블 반담> <타임캅> <서든 데스> <맥시멈 리스크> <더블 팀>을 비롯, 그가 감독한 <퀘스트>나 심지어 그가 카메오 출연한 <프렌즈>, 목소리로 출연한 <쿵푸팬더 2>까지, 이걸 어째, 내 영웅 아니라면서 본 영화가 너무 많다. 리뷰를 써야 하기 때문이라는 핑계가 무색하게, 내 발로 걸어가 본 영화도 꽤 된다.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과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폭발적 인기 이후 몸 좀 쓴다는(혹은 몸만 좋다는) 배우들의 영화가 대거 쏟아져 나왔고, 당시 액션 신을 이끌었던 장 클로드 반담, 척 노리스, 돌프 룬드그렌, 스티븐 시걸 등의 ‘아무 생각 없는’ 영화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 생각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늘 절대악이 등장하는 영화의 뻔한 패턴에 진저리 치면서도, 극장을 나서며 돈 아깝다는 소리를 반복하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그들을 찾았다. 적어도 모든 것으로부터의 그 망각의 순간을 위해서.

장 클로드 반담이 꾸준히 영화를 찍고 있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을 정도로, 그를 영화로 보지 않은 지는 꽤 됐다. 하지만 왜인지, 몸이 쟀던 젊은 날의 장 클로드 반담보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볼보 광고를 위해 다리를 찢으며(사실 그는 발레리노 출신이다) 숱한 패러디를 낳거나 코난 오브라이언 쇼에 나와 <킥복서> 시절의 우스꽝스러운 춤을 기꺼이 재연하는 지금의 그가 더 좋다. 허울 좋은 ‘익스펜더블’이었던 과거의 진지한 그보다 이를 슬렁슬렁 넘기며 유머로 끌어올린 지금의 그가 더 좋다. 액션배우로 활발했던 시기에나 지금에나 어느 정도 희화화의 대상인 건 마찬가지지만, 어쩐지 지금은 스스로도 이를 즐기는 듯 해보여서 더 좋다. 적어도 그는, 소매를 잘라낸 청 셔츠를 입은 나를 보고 ‘장 클로드 반담이냐?’라 놀리는 친구의 말에 ‘태권도복 입고 척 노리스 할까?’ ‘꽁지머리 하고 스티븐 시걸 하랴?’라며 낄낄 받아칠 수 있는 농담거리를 아직도 우리에게 주는 사람이고, 옆에서 이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친구들을 보고 우리가 잊히고 있는 것 같은 속상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우리 세대의 영웅인가. – 이현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