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열두 달,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며 우리를 즐겁게 해준 문화계 원소들이 있다. 음악, TV, 아트, 영화, 책, 공연의 여섯 개 분야를 유영하며 우리는 어떤 것을 읽고, 듣고 보았을까?

Movie

1 여기요!
올해도 역시 세계적 스타들이 홍보차 서울을 다녀갔다. 친절한 톰 아저씨 톰 크루즈부터 브래드 피트와 윌 스미스는 아들을 대동했고, 유일하게 아시아 국가 중 한국만 다녀간 맷 데이먼과 휴 잭맨도 있었다. 특히 브래드 피트는 아들 팍스에게 ‘갈비’를 맛보여주고 싶어서 데려왔다고 화답. 톰 히들스턴은 그 어떤 스타보다 서울에서의 일정을 즐기는 모습으로 우리를 흐뭇하게 했으며, 턱시도를 젠틀하게 차려입었지만 바지 지퍼를 활짝 열어놓고 ‘강남 스타일’을 춘 아이언 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 봐요, 여러분!

2 2013년 흥행 순위
올해에도 한국영화의 강세는 이어졌다. 올해의 흥행순위는?

3 올해의 배우
명실상부 하정우의 한 해였다. 하정우는 올해 흥행 3위인 <베를린>으로 관객 716만 명을, <더 테러라이브>로 552만 명을 불러 모았다. 여기에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은 <롤러코스터>로 숨겨왔던 B급 감성까지 내보였고, ‘먹방’이라는 문화적 코드를 전파했다. 차기작은 강동원과 함께한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 두 번째 연출작 <허삼관 매혈기>에서는 직접 출연도 한다. 하정우는 이제 한석규, 송강호가 그랬던 것처럼 연기력과 흥행성을 갖춘 대단한 배우가 되었다.

4 스크린으로 간 아이돌
<건축학개론>의 수지처럼 홈런을 친 사례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영화에 출연한 아이돌은 작은 배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에는 아이돌이 주연을 맡은 영화가 다수 선보였다. FT아일랜드의 김홍기는 <뜨거운 안녕>, 빅뱅의 최승현(TOP)은 <동창생>에서 주연을 맡았다.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건 <배우는 배우다>의 이준이었다. 엠블랙의 이준은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주연배우로, 아이돌로서 부담스러울 수 있는 강도 높은 노출 신을 소화하며 ‘배우돌’로 인정받았다

5 보고 또 보고
안 보면 손해. 올해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그 영화.
<일대종사> ‘왕가위의 귀환’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영상과 인생에 대한 담담한 성찰로 가슴을 뜨겁게 했으나 흥행으로는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0년대 아이콘이었던 왕가위의 시대는 저문 것일까. 그렇더라도 놓치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블루재스민> 우디 앨런의 또 다른 ‘관광지 영화’인 줄 알고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은 쓰디쓴 농담에 배신감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게 바로 우디 앨런의 영화였다.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케이트 블란쳇이 다시 한 번 길이 남을 멋진 연기를 선보인다.
<문라이즈 킹덤> 자신만의 색깔을 충실히 구현 중인 웨스 앤더슨은 이 영화에서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소년, 소녀의 사랑의 도피 행각을 담았다. 이들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들은 패러디 포스터, 코스튬 플레이 등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애정을 표시했다.

6 7번방의 기적
<7번방의 선물>은 총 관객 1280만 명을 동원해 2013년 흥행 왕좌에 등극한 것은 물론, <괴물>,
<도둑들>에 이어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순위 3위를 차지했다. ‘바보 아빠’가 등장하는 신파성 이A기라는 시놉시스를 들었을 때, 이 영화가 이토록 흥행할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화, 모릅니다.

7 의외의 복병
영화 <숨바꼭질>은 올 영화계의 예기치 못한 복병이었다. 손현주, 문정희, 전미선. 그리고 허정 감독. 훌륭한 배우지만 스타성이나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이 만든 숨바꼭질은 관객 500만 명을 넘기며 ‘대박’ 영화가 되었다. 낡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 무더운 여름과 입소문이 이 무서운 영화의 성공을 이끌었다.

8 꼬리칸에서 진격하라!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의 해외 프로젝트가 베일을 벗었다. 니콜 키드만, 미아 바시코브스카를 앞세운 <스토커>와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의 <설국열차>가 그것이다. 흥행과 영향력으로 보자면 <설국열차>의 승이다. 국내에서 86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해외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김연아의 국제 경기를 보듯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뚜껑을 연 사람들은 미지의 양갱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안심할 수 있었다. 세계 영화 시장의 꼬리칸에서 진격해서 승리한 기분이 이럴까.

9 싸움 구경 1, 2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했나. 국내 최대 극장 체인인 CGV와 수입배급사 중 매출점유율 1위인 소니픽처스의 싸움이 그랬다. 소니픽처스와 CGV는 <몬스터 대학교>부터 외화 극장 부율(수익배분율)을 놓고 갈등을 빚었고, 개봉 2주간 서울지역 CGV에서는 <토르 : 다크월드>를 볼 수 없었다. 결국 극적으로 타결되었지만 양측 모두 조정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함구 중.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 정작 화제가 된 건 강동원과 영화제 조직위원회의 갈등이었다. 강동원 측은 영화제 측에서 개막식 레드카펫에 서지 않으려면 아예 영화제에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며 반박문을 내보냈다. 양측이 갑론을박하는 사이, 술자리에 모인 영화계 사람들은 범인을 찾느라 분주했다.

10 영화도 복고풍
영화계에서도 복고 바람은 예외가 아니다. 재개봉, 리마스터링이 줄을 이었다. <시네마 천국> 같은 클래식 영화부터 <8월의 크리스마스>, <올드보이>, <화양연화> 등 우리가 사랑한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라붐>은 ‘극장 최초 개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1 최고의 목소리
알폰소 쿠아론이 아들 조나스 쿠아론과 함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그래비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관객에 따라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대한 우화가 되기도 하고, 흥미진진한 조난 영화가 되기도 하는 <그래비티>. 산드라 블록이라는, 전성기가 훌쩍 지난 여배우가 망망대해보다 더 아득한 우주에 홀로 남았다. 스크린은 온통 어둠과 그녀의 목소리뿐이었으나, 그 어떤 영화보다 집중하게 만들었다. 오직 목소리만 출연하는 휴스턴 관제센터장은 에드 해리스로, 그는 영화 <아폴로13>에서도 휴스턴 관제센터장을 맡았다.

Book

1 하루키를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둘러싼 판권 경쟁은 올해 출판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이미 전작 <1q84>부터 막대한 선인세가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민음사, 문학동네, 문학사상사, 북폴리오 등 쟁쟁한 출판사들이 뛰어들었고, 최종 승자는 민음사에 돌아갔다. 한편, 하루키는 이달 신작 단편 <내 차를 운전해 - 여자 없는 남자들(Drive My Car- Men Without Women)을 12월 9일 <문예춘추>지에 발표할 예정이다.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 계기가 된 <노르웨이의 숲>처럼 비틀스가 부른 노래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하루키의 장편만큼이나 에세이, 단편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희소식!

2 시가 있는 장면
시는 아름다웠다.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찾는 와우북페스티벌에서 문학동네는 ‘시인이 파는 시집’ 코너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 11월 광화문광장에서는 ‘시를 줍자’ 행사가 열렸다. 광화문광장 곳곳에 놓여 있는 시집을 정해진 시간에 가져갈 수 있었다. 서울시의 ‘시의 도시’ 선언을 기념해 서울시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실천문학, 창비 등 출판사들이 후원한 행사는 사람들에게 우연처럼 시를 안겼다. 시가 있던 또 다른 장면은 이랬다. 강연회를 위해 서울에 온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9월의 마지막 날 백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쌍용자동차 해고자 시민 분향소 앞에 서 있었다. ‘시로 점령하라(詩위, Protestry-Occupy with Poems)’라는 이름의 침묵 시위 퍼포먼스였다. 고은, 심보선 시인도 참여한 이 시위는 소리 없이 서서 15분간 눈으로 각자 가져온 시집을 읽는 게 다였다. 15분 후 사람들은 처음 눈이 마주친 사람과 시집을 교환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3 나도 소설가
<보통의 존재>로 20쇄를 기록한 이석원은 공들여 쓴 첫 소설 <실내인간>으로 소설가 대열에 합류했고 몇 달 만에 판매량 3만 부를 기록했다. 시인 마종기와의 서신집과 에세이를 냈던 뮤지션 루시드폴도 단편 소설집 <무국적 요리>를 출간했다. <나만 위로할 것> 같은 서정적인 여행 에세이로 유명한 김동영 역시 첫 소설 <잘 지내라는 말도 없이>를 냈다.

4 책의 맛
음식과 맛을 다룬 책은 올해 출판계의 핫 트렌드가 되었다. ‘위로’와 ‘공감’, ‘힐링’이라는 수식어를 단 에세이보다는 셀러브리티 셰프가 직접 쓴 인생과 맛의 이야기가 입맛을 돋웠다. 음식 칼럼니스트 이용재의 <외식의 품격>은 잘 만든 음식과 못 만든 음식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만드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이제는 배워야 할 때다.

5 우리들의 맥주 같은 자화상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고, 한국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한국 금융회사에서 일하기도 한 다니엘 튜더는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한국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를 썼다.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일하는 기계’이며 ‘새로운 것에 집착’하고 ‘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는’ 우리에게 이제는 남들과 비교하며 우울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단다. ‘한국 맥주 맛없다’는 기사로도 유명한 그는 맥줏집 더부쓰를 운영 중이다. 이 책은 바로 맥주 맛과 닮았다. 시원하면서도 씁쓸하다.

트루먼 커포티 선집(마음산책)과 밀란 쿤데라 전집(민음사)

6 나의 아름다운 전집
올해도 출판사가 집중한 키워드는 ‘고전’이었다. 출판사들이 제각기 멋스럽게 창조한 세계문학전집을 이어가는 동안, 한 작가의 마스터피스 같은 전집도 속속 선보였다. 마음산책에서는 국내 최초로 시인을 넘어 신화적 아이콘이 된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을 <벨 자>와 함께 냈다. 시공사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의 트루먼 커포티의 선집을 내면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인 동시에 파티를 즐기는 낭만적 셀러브리티였던 그의 사진을 표지로 썼다. 일본 병풍처럼 세심하게 결을 살려 만든 현암사의 나츠메 소세키 전집도 있었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밀란 쿤데라 전집>은 그의 소설, 에세이와 유일한 희곡까지 챙긴 열다섯 권으로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표지로 썼는데, 작가도 흡족해했다는 후문. 작가의 문학 세계와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채택함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발굴하고 기존 작품을 새로 번역하는 등 완벽을 기하는 작은 전집. 위대한 작가에게 표하는 경의이며, 독자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갖고 싶은 책이 되었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블랙홀에, 새로운 우주가 펼쳐진 셈이다.

7 그 책
올해 ‘문제작’이 있었다면 정유정의 <28>이다. 정유정의 새 장편 소설 <28>은 출간 즉시 독자들의 환호와 열광이 쏟아졌다. 이 소설은 ‘불볕’이라는 뜻의 도시 ‘화양’에서 28일간 펼쳐지는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존을 향한 갈망과 뜨거운 구원에 관한 이야기. 마치 좀비 바이러스처럼 도시를 집어삼킨 전염병과 그 속의 사람들을 문학적으로 그렸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아는 사람을 닮았다.

8 개츠비 전쟁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이 무려 60여 종이나 쏟아져 나온 것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영향만은 아니었다. 작품의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모든 출판사가 자신들의 ‘개츠비’를 출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다양한 번역과 표지, 저렴한 가격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번역 논란은 더욱 커졌다. 세련되고 위트 있는 피츠제럴드 특유의 글을 우리말 번역으로 옮긴 결과가 번역가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로서 번역에 뛰어든 김영하와 김욱동 같은 유명 번역가 등이 도마에 올랐고, 독자와 편집자들은 무엇이 좋은 번역인가에 대해 토론의 장을 열었다.

9 놓친 책
올해 놓치면 너무나 아까운 책. 작가들이 직접 골랐다.
<비자나무 숲> 권여선 이 책을 겨우 3천 명 읽는 사회, 그러나 <오로라 공주>는 3백만 명이 보는 사회. 우리는 망해도 싸다. 하지만 이대로 망할 수는 없다. 나는 훌륭한 서사가 우리를 구원할 거라 믿는다.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러한 신뢰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 서효인(시인)
<연필 깎기의 정석> 데이비드 리스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 이론과 실제’라는 이 책은 다양한 연필 깎기의 교본이다.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연필 한 자루로 뻗어나간 황당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다. 저자가 연필을 깎아주는 비용은 35달러라고 한다.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 윤고은(소설가)
<모든 게 노래> 김중혁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기발한 상상력의 소유자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집. 일상의 비트를 재치와 감각, 유머 넘치는 디제잉으로 편곡하여 보고 듣는 이를 흥얼거리게 만든다. 교묘하게 허탈하면서도 짜릿한 김중혁만의 통찰 또한 여전하다. – 유희경(시인)

10 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는 2010년 <오빠가 돌아왔다>는 작품을 냈다. 올해 여름 출간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바로 그 ‘오빠의 귀환’을 알렸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작가의 말. 1990년대 가장 강력하고 예민한 작품을 줄줄이 써 내린 김영하. 스스로 ‘담배 같은 책’을 쓰고 싶다던 그는 2000년대에 들어 어쩐지 힘이 빠진 느낌이었고, 줄줄이 범작만을 쏟아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우리가 사랑했던 김영하가 있었다.

11 올해의 책
올해의 베스트셀러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차지했다. 2012년 출간된 이책이 올해도 계속 호응을 얻고 있는 것. 비소설 분야에서는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이 뒤를 이었고, 소설에서는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 여행>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차지했다. 올해 서점가에는 여전히 자기성찰과 자기계발에 관한 책이 강세다. 하지만 작년처럼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강력한 책 한 권이 아쉬운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