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을 기다리며 눈이 시릴 만큼 하얀 눈이 쏟아지는 책과 영화를 골랐다. 어쩌면 우리의 진짜 겨울은 이 책의 페이지에서부터,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1 <극장전> (2005)  여름영화와 겨울영화. 홍상수의 영화를 그렇게 나누길 좋아한다. <극장전>은 겨울영화다. 뚱뚱한 파카를 입은 남자(김상경)와 날씬한 모직 코트를 입은 여자(엄지원)가 길을 걷는 장면이 포스터에 쓰였다. <극장전>에서, 겨울은 온통 건조하다. 눈이 온다며, 가난한 연인이 좁은 창을 내다보는 장면은 더없이 촉촉하지만, 눈은 어제 거기에 내렸을 뿐, 오늘 여기엔 흔적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엔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길을 걷던 남자가 이어폰을 꽂는다. 그러자 라데츠키행진곡이 ‘빠바밤 빠바밤’ 힘차게 울려 퍼진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을 견디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쨌거나 다음 계절을 향해 행진하는 것. – 장우철( 피처 디렉터)

2 <노이 알비노이>(Noi The Albino, 2003) 눈이 내리는 풍경은 대개 따뜻하고 아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풍경은, 공포나 무력감과 닿아 있기도 하다. 아이슬란드에 사는 소년 노이의 세계를 두텁게 덮고 있는 눈과 추위는 세상으로부터, 혹은 이상향인 하와이로부터 그를 단절시키고 활력을 앗아가는 벽이다. 청춘은 늘 봄에 비유되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이렇게 혹독한 한겨울 같은 젊음도 존재한다. – 황선우( 피처 디렉터)

3 <율리시즈의 시선>(To Vlemma Tou Odyssea, 1995) 눈 내린 발칸반도를 떠도는 한 남자의 이야기. 영화감독인 주인공은 옛날의 필름을 찾아 유럽의 화약고라 불린 고통스러운 땅을 헤맨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엄청나게 내린 눈으로도 덮이지 않는 상처와 비극이다.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린 광활한 풍경을 바라보고 걸으며 그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했을까. – 한유주(소설가)

4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이별 후에 그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너무나 편리할 것 같지만 영화는 그것을 겨울이라는 시린 계절을 통해 안타깝게 그려낸다. 특히 시각적인 요소들을 통해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을 눈앞에 드러내서 보여주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센스가 돋보인다. 겨울의 찬 바람으로 코끝이 시려질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영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조엘의 얼굴과 함께. – 유지수(뮤지션, 참깨와 솜사탕)

5 (2007) 시규어 로스가 2007년 해외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아이슬란드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펼친 무료 공연이 담긴 필름 에는 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계절의 감각이 담겨 있다. 자연 속의 무대에 나무나 풀들, 바위들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있고, 누군가는 연주를 하고, 그 연주는 공기처럼 계절처럼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털모자와 목도리를 한 사람들과 두터운 니트를 입은 사람들과 반팔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늙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과 어리고 작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피어나게 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감각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른 영화. ‘Heima’는 ‘집에서’ 혹은 ‘고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송은지(뮤지션, 소규모아카시아밴드)

6 <블라인드>(Blind, 2007) 네덜란드 영화인 <블라인드>는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잔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겨울, 그리고 눈의 빛나는 이미지와 눈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어둠이 이미지를 대비시키면서 아름답고 진실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 짙은(뮤지션)

7 <가위손>(Edward Scissor Hands, 1990) 팀 버튼 감독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로 그의 환상적인 채가 짙게 묻어 있다.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아름다운 영상미, 동화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잔잔한 여운은 길게 남는다. 얼음을 조각하며 나온 잔해가 눈발이 되어 뿜어져 나오는 엔딩 장면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로맨스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배척과 편견 또한 잘 그려진 겨울 영화다. – 센티멘탈 시너리(뮤지션)

8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 성촉절 축제를 취재하러 펜실베이니아의 시골마을로 간 기상통보관 필 코너스는 예상치 못한 폭설로 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된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고 나자 또다시 성촉절 아침이다. 그 하루가 마치 블랙홀처럼 계속되는 동안, 까칠하고 이기적이었던 필은 점차 겸허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변한다. 봄에도 겨울에도 심드렁하던 한 남자가 삶의 진짜 봄을 맞이하는 이야기. ‘까도남’ 시절의 빌 머레이와 눈동자, 피부 할 것 없이 물기로 촉촉한 앤디 맥도웰을 볼 수 있다. – 신윤영(<젠틀맨> 피처 디렉터)

9 <설국열차>(2013)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라 내용을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가 봤더라도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열차는 어디론가 향하는 것 같지만 그저 눈 덮인 지구를 맴돌고 있다. 커티스는 앞으로 가고 있지만 정말 가야 할 곳은 기차 밖이 아닐까. 관객 역시 어느 순간 의심한다. 마침내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맞이할 풍경을, 나는 영화 도입부에서 상상했었다. 잊히지 않을 허망한 풍경을, 우리가 이미 맞이한 종말을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창백한 설국을. 해마다 영화의 배경인 12월 31일이 되면 당신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 김이환(소설가)

10 <북극의 연인들>(The Lovers from the North Pole, 1998) 거꾸로 읽어도 이름이 똑같은 아나(Ana)와 오토(Otto)의 사랑 이야기. 이 영화를 보면 운명을 믿게 된다. 운명이 항상 내 편은 아니라는 사실에 슬퍼진다. 눈처럼,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진다. 한동안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녹아버린다. 봄이 와서 좋을 수도 있지만 가슴속은 아직 겨울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직 녹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계절은 한 바퀴 돌아 겨울은 또 찾아올 것이다. 북극에는 여전히 연인들이 있을 것이다. – 오은(시인)

11 <철도원>(1999) 서정주는 시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에서 눈 오는 소리가 ‘괜찮다, 괜찮다’ 이렇게 들린다고 적었다. <철도원>을 보고 서정주 시가 생각났다. 사실 <철도원> 무지 지루했다. 하지만 그 지루함을 관조하라고, 일부러 지루함을 소박하게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본질은 눈처럼 단순하고 단일하며 고요한 거 아닐까? 눈이 오고, 그리워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고, 그 사람은 곧 떠난다. 눈처럼 녹아서 사라지는 것이 우리 인생이고, 우리 삶의 본질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 이우성(<아레나옴므플러스> 피처 에디터)

12 <삼포 가는 길>(1975) 영달(백일섭), 중년 남자 정씨(김진규), 여주인으로부터 도망친 술집 작부 백화(문숙), 일면식도 없는 세 사람은 눈보라를 헤치고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는다. 갈 곳 없는 그들에게 펑펑 내리는 눈은 아름답기보다 애절하고, 그들 앞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는 꽤 쓸쓸하다. 영화 속에서 따뜻하게 입은 김진규, 백일섭 두 남자배우와 달리 술집 작부인 까닭에 얇은 원피스에 외투만 걸쳐 덜덜 떨어야 했던 문숙의 가녀린 몸은 더욱 앙상해 보인다. 영화 속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고, 몸이 춥다. – 김성훈 (<씨네21> 기자)

13 <눈 오는 날의 왈츠>(An Independent Life, 1992) 원제는 <홀로 된 삶>. 감독 카네프스키는 흑백으로 촬영하길 원했지만 제작자의 반대로 컬러 영화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언쟁이 무색하리만큼 영화 속 배경은 온통 잿빛이다. ‘색’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건 오직 발레르카와 그의 연인 발카의 말간 얼굴뿐이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불온해 끝까지 보는 일마저 고역으로 느껴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이 영화를 떠올리고 만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는 건 아래서부터 위쪽으로 갈퀴질을 하며 그어져 올라가는 눈과 그때의 눈이 만들어내는 명징한 소리이다. – 조소영(<얼루어> 피처 에디터)

14 <맨발 공원>(Barefoot in the Park, 1967) 이렇게 이상한 제목의 영화가 다 있을까 싶지만, 극작가 닐 사이먼의 유명 작품으로, 원제를 그대로 옮기자면 ‘맨발로 공원을’이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 부부가 엉망진창인 아파트에서 새 삶을 꾸리면서 일어나는 귀여운 소동극으로, 그들이 단 며칠 만에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결별의 위기까지 가는 데는 을씨년스러운 추위도 한몫한다. 고장 난 히터,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로 풀풀 떨어지는 눈, 로버트 레드포드의 맨발과 제인 폰다의 겨자색 터틀넥이라는 4개의 키워드로 만든 영화 같다. – 나지언(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