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유일한 위안이던 때가 있었다. 귀 밑 5cm로 머리를 자르고 아침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다가 주말에는 공중전화부스 같은 독서실에 칸칸이 들어앉아 공부를 하던때다.

음악이 유일한 위안이던 때가 있었다. 귀 밑 5cm로 머리를 자르고 아침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다가 주말에는 공중전화부스 같은 독서실에 칸칸이 들어앉아 공부를 하던 때다. 지금이야 연애도 하고, 영화도 보고,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겠지만 학생 신분은 거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 엉덩이는 착석 상태여야 하고, 눈은 책을 봐야 하며,손은 계속 문제를 풀어야 한다. 자유로운 기관은 오직 양쪽 ‘귀’뿐. 그때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음악을 들을 건지, 어떤 음악을 들을 건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1981년에 결성된 펫 숍 보이즈는 1980년대 키드가 열광할 만한 그룹은 아니었지만, 시대를 뛰어넘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소년보다는 할아버지가 어울릴 나이. 악기점에서 우연히 만나 시작하게 된 이 듀오는 한 번도 해체한 적 없고, 고유의 스타일을 버린 적도 없다. 그래서 펫 숍 보이즈는 ‘불멸의 연인’이 되었다. 10대부터 50대까지 그들의 음악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펫 숍 보이즈는 그 노선이 주류였을 때도, 비주류였을 때도 일렉트로닉뮤직과 신스 팝을 고수했다. 때문에 에미넴이 모비(Moby)를 두고 “늙은 게이야, 요즘 아무도 그런 음악 안 들어!”라고 ‘디스’ 했을 땐, 잠자는 펫 숍 보이즈를 건드린 거나 다름없었다. 펫숍은 잠자코 공연을 마친 래퍼가 동성 관객을 유혹하는 내용의 새로운 곡 ‘The Night I Fell in Love’를 만들었다. 설마 그게 에미넴이겠냐고? 혹시 헷갈릴까봐 가사로 못박아놓았다. 노래 속 래퍼는 말한다. “설마 너의 이름이 스탠은 아니겠지?” 에미넴을 ‘게이들의 하룻밤’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그들식의 우아한 복수였다. 이렇듯 펫 숍 보이즈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퀴어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1990년대 닐 테넌트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도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름다운 퀴어 무비이며 보이 조지가 부른 주제곡으로 유명한 <크라잉 게임> 역시 펫 숍 보이즈의 손을 거쳤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펫숍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It’s a Sin’은 유독 울림이 크고, ‘Go West’가 단지 이상향이 아니라 ‘게이들의 이상향’이라는 해석도 있다. 펫 숍 보이즈는 또 음악계의 뛰어난 비주얼리스트이기도 하다. 많은 미술평론가는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마찬가지로 영국의 아티스트인 길버트앤조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미술계의 가장 유명한 듀오인 길버트앤조지가 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고 팝 문화의 ‘글램’을 주도했으며, 듀오라는 걸 고려하면 설득력이 있다. 다만 길버트와 조지가 공인된 커플이라면, 크리스 로우와 닐 테넌트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간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산의 땅은 그곳에 모인 몇 만 명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 이글거렸다. 둘째 날, 이 더위에서 사람들을 지킨 두 가지는 바로 ‘곧 펫숍 오신다’는 말과 알코올뿐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시각에, 예의 그 시크하고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그분들이 오셨다. ‘Go West’, ‘Always on My Mind’, ‘New York City Boy’, ‘Love Etc’, ‘Viva la Vida’, ‘It’s a Sin’. 그들의 히트곡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 중 ‘Viva la Vida’는 의외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콜드플레이의 곡을 리믹스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 곡만큼은 펫 숍 보이즈가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7월 혁명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의 화자인 ‘나’는 샤를 10세인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속에서 운명이 바뀌고, 당장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지도 모르며, 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읊조리는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는 원래 남의 집 소유라는 걸 잊을 정도로 그들과 잘 어울린다. ‘Viva la Vida’와 ‘It’s a Sin’을 병렬해 단숨에 부를 때, 공연은 가장 뜨거워진다. 신스 팝의 왕족으로 존경받는 그들의 무대는 압도적이었다.

고백하건데, 내 마음속 펫 숍 보이즈는 ‘일등’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기엔 그들이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났다. 하지만 지산에서 펫 숍 보이즈는 ‘일등’이었다. 그의 열렬한 팬도 있을 것이고, 그냥 놀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뮤즈 보러 온 사람도 있을 테지만 펫 숍 보이즈는 둘째 날의 헤드라이너로서 우리를 붕붕 뜨게 해줬다. 사람들은 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즐기기 위해 모두 무대 쪽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이번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의 절정은 펫 숍 보이즈가 떠난 무대를 향해 팬들이 보낸 송가 ‘Go West’였다. 모든 가사를 외운 사람도 있고, 허밍으로 따라 부른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들을 다시 한번 보기를 원했다. 호소력 짙은 ‘떼창’에 펫 숍 보이즈는 결국 앙코르송을 들려줬다. 알고 보니 모두가, 그들의 오랜 팬이었다. “감사합니다.” 종이 쪽지에 한국 말을 써서 외웠다는 펫 숍 보이즈는 공연 끝에 예의 시크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You are Very Welc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