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예전에 바뀌었는데 왜 드라마 속에는 신데렐라만 넘쳐날까? 진짜 신데렐라는 밤 12시면 귀가행 호박열차를 타지만, 드라마 속 신데렐라는 공중파와 케이블을 넘나들며 24시간 동안 활약한다. 지겨운 신데렐라 드라마를 고소합니다.

마침내 염원하던 백학그룹에 입성한 주다해의 앞날이 다시 풍전등화다. 쟝띠엘샤와 극적 화해를 이뤄 청담동 입성에 성공한 한세경은 잘살고 있을까. 시청률 40%대를 달린 서영이는 마지막회에서 우재와 자식까지 낳으며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주다해는 악으로, 한세경은 성실함으로, 서영이는 똑똑함으로 마침내 재벌가에 입성한 신데렐라가 될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예전에 바뀌었는데 드라마 속만은 여전히 ‘재벌가’를 빼면 돌아가지 않는다니.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미국의 심리테라피스트 콜레트 다울링이다. 그녀는 1982년 자신의 책을 펴내며,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독립을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무의식적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을 바라고, 자신의 일생을 변화시켜줄 사람의 출현만을 기다리는 심리적 의존 상태.’ 그렇다면 신데렐라는 누군가? 신데렐라는 한동안 ‘페미니즘’의 적이었고, 페미니즘에 동화된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신데렐라>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류의 동화를 읽어주는 것을 거부했다. ‘신데렐라’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을 상징한다. 아름답고 마음이 착하지만 그 때문에 여자들은 신데렐라를 시기하고 미워한다. 그럴 때 왕자가 나타나 결혼으로 구해준다.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좀 더 복잡하다. 홀로 서고 싶지만 홀로 서는 것이 두렵다. 독립에 대한 불안 때문에 독립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심리적 갈등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 신데렐라 스토리는 구전 동화 시절부터 지금까지 베스트셀러 아이템이다. 영화 <귀여운 여인(The Pretty Woman)>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바이블이 되었다. 젊고 건강하지만 가난한 창녀와 부와 명예를 지녔으나 외로운 남자는 그 후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복제되었다. 자신의 왕국 안에 모든 걸 가졌으되 딱 하나 사랑이 없어서 고독하고 불행한 사람! 사랑스러운 여자가 딱 나타나 마지막 퍼즐을 끼우는 순간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자막이 오르는, 그것이 신데렐라가 사는 판타스틱 월드다.

영화보다 대중적인 드라마 속에서 신데렐라는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신데렐라에 막장 코드를 결합하면 <백년의 유산>, <가시꽃>이나 <당신의 여자>가 되고, 사회 고발 코드를 넣으면 <돈의 화신>이 된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의 드라마가 차라리 나았다. 벤츠 타는 왕자가 등장할지언정 여자의 꿈, 성공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아나운서, 디자이너, 모델, 스튜어디스, 의사, 변호사,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의 여주인공들이 성공을 위해 달렸다. 그때 성공의 의미는 부나 명예가 아닌 자아실현에 가까웠다. 사회에서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전여옥)’거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고 외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대였고, 라디오에서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광고카피가 흘러나왔다. 여자들에게 세상을 다가지라고 말하고, 남자처럼 일하라고 가르쳤으니 드라마 역시 그랬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는 다시 거꾸로 돌아가, 부자 남편을 만나는 신데렐라들로 전파를 채운다.

학자들은 유독 신데렐라 스토리가 흥하는 이유를 여전히 노동시장에 여성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학력 여성의 취업률은 OECD 국가의 평균 83%에 한참 못 미치는 50%대를 달리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지위는 아버지의 지위와 남편의 지위에 좌우되곤 했다. 잘 교육받고 사회생활도 완벽하게 해내는 여성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지 못하는 한,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을 유지할 수조차 없다.’부유한 남자와의 결혼만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약속한다.’ 드라마에는 바로 그 전제가 깔려 있다.

청년 실업과 장기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불안한 사회에서 드라마가 제시한 유일한 돌파구는 신데렐라가 되는 것뿐이다.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요.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고 <시월애>에서 전지현도 말했었다. 신분제는 철폐되었지만 부와 가난이 새로운 계층적 신분이 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대개 가난을 지긋지긋해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출신 성분 때문에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넣는다. 고아원 출신 주다해는 번번이 대기업 공채에서 탈락하고,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한 한세경은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고 가난하기에 안목이 없다고 단번에 평가된다. 서영이는 더 눈물이 난다. 전교 1등을 달리던 수재가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자장면을 배달하며 아버지의 빚도 갚는다. 이들은 모두 아름다우며 재능이 넘치는 젊은 여자다. 딱 하나 가난이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재벌가의 남자는 이 여자들에게 훨훨 날개를 달아준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별은 내 가슴에>, <파리의 연인>, <발리에서 생긴 일>, <시크릿 가든> 등 최고의 시청률을 구가한 드라마에는 신데렐라가 있었다. 참하고 착한 여자와 완벽한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게 전부였지만 이 신데렐라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있다. 밝고 명랑한 캔디를 안소니, 테리우스, 니일이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설득이 안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과거 캔디들이 지고지순하며 청순가련하며 가난을 의식하지 않으며 다만 씩씩했다면 요즘 캔디들은 명랑하며 똑똑하고 개념 차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칭송받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사랑하면 추한 거야? 그렇다면 난 내 사랑을 ‘추한 사랑’이라고 부르겠어. 하지만 추한 사랑도 사랑이야.”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의 이 대사는 모든 드라마 속 신데렐라의 항변으로 보일 정도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뒤집고 비틀어 새로운 신데렐라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가을동화>에서 “사랑, 웃기지 마.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되겠냐!”라는 물음에 “나…돈… 필요해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던 것에 비해 얼마나 당돌해졌나. 이들은 곱게 자란 남자는 모르는 소박한 생활의 행복과 남자는 모르는 여성적 센스와 감각으로 남자의 사업에 실제적으로 도움까지 주기 시작한다. 법을 아는 서영이는 변호사로서 집안의 사건을 멋지게 처리하고, <메이퀸>의 천해주는 남자보다 대범하다. <착한남자> 한재희(박시연)는 회사에 치명적인 제보 자료를 품에 안고 회장을 찾아가 그의 여인이 된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나름의 ‘현실성’을 넣는 요즘 드라마의 트렌드는 ‘재벌가의 남자와 결혼, 그 후’를 조금씩 다룬다. 만약 재벌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재벌에 입성해도 인정받기가 쉽지 않으며,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출신성분을 평가받는다. 서영이는 거짓말이 들통난 후 집을 나오고 자존심을 되찾은 후에야 다시 당당한 며느리가 될 수 있었고, 한세경에게 청담동 입성 과외를 시켜준 서윤주는 재벌 남편과 시누이에게 ‘이혼!’을 고하며 왕관을 던졌다. 주다해는 시아버지, 시고모 모두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무릎을 꿇었지만 ‘근본 없는 너 같은 것들’이라는 쓴 소리만 듣고 이혼 서류를 받는 신세가 된다. 앨리스가 된 한세경도 자신의 앞날이 녹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신데렐라의 고충과 가진 자들의 암투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인생 별거 없다고 위안한다. 차라리 내 삶이 낫다고 카타르시스도 느낀다. 하지만 드라마를 판타지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지루함을 털어주는 자극적이고 달콤한 환상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은 착한 신데렐라가 그 이상 더렵혀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차피 판타지라면 화려하고 보기 좋은 것이 낫다는 것이다. 재벌가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전무후무한 신데렐라 캐릭터 케이를 그린 <로얄 패밀리>는 수작이었으나 시청률 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일장춘몽이었다는 걸 암시하는 <파리의 연인>이 종영한 후에는 ‘시청자를 우롱했다’는 항의가 빗발쳤으니까. 그러므로 신데렐라는 앞으로도 구두와 옷을 바꿔 입으며 계속될 예정이다. 그걸 너무나 싫어해서 TV를 끄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