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늘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저히 이상적이거나 지극히 평범하거나 잔인할 만큼 비극적인, 그래서 감히 최고라 말할 수 있는 드라마 속 커플을 꼽았다. 그들의 사랑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

직장인들이 좋아할 만한 커플상 | <파스타> 서유경과 최현욱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서 여주인공들이 근무시간에 일은 안 하고 실장님 방을 기웃거릴 때마다 속 터지는 여자들이 많았을 거다. <파스타>는 주인공들에게 허투루 쓰는 1분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드라마였다. 서유경(공효진)은 트렌디 드라마 역사상 가장 열심히 일하는 캐릭터였다. 작가가 어찌나 일을 많이 시키는지, 오죽하면 최현욱(이선균)이 그녀에게 미련할 정도라고 말했겠는가. 김산(알렉스) 말대로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유경 말대로 ‘그냥 일하는 토끼가 사랑도 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파스타>는, 일과 사랑 사이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고민하기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드러냈다. 둘이 사귀는 사이임이 들통 났을 때 쏟아진 비난 여론과 그에 대해 책임지려는 현욱의 태도,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를 놓고 망설이는 유경의 태도를 보라. 일하고 사랑하는 남녀라면 누구나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할 만한 내용이다.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작가로부터) 특혜를 받는 다른 드라마 커플과 달리 <파스타> 커플에는 ‘공평함’이 있었다. 그 공평함은 일과 사랑에 대한 장애로 작용하고 주인공들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 유경은 일과 사랑 모두에서 뻔뻔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건 시청자뿐 아니라 현욱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녀는 말한다. “주방에서 연애하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걸리면 어떡하나보다 셰프한테 부끄러운 사람 되면 어떡하나, 그게 훨씬 더 겁나요. 다시 보조로 떨어져도 참을 수 있는데 셰프한테 기대기나 하고 모자란 요리사가 될까봐 그게 더 싫단 말이에요.” 사랑하는 남자에게 의지하고 싶긴 하지만 제대로 노력해서 그 앞에서 당당하게 잘 보이고 싶은 여자의 모습,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감싸 안아주고 싶지만 그녀가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꾸짖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파스타>는 직장인들이 좋아할 만한 커플상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여자들의 이상형 1순위라는 ‘배울 수 있는 남자, 존경할 수 있는 남자’와의 짜릿한 비밀 연애라니, 라스페라 레스토랑에 이력서 넣을 뻔했다. – 나지언(<데이즈드 컨퓨즈드> 피처 디렉터)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사랑 | <추적자> 서지수와 강동윤
서지수는 쇠락 직전의 성(城) 같은 여자였다. 짙은 립스틱을 발라도, 비싼 옷을 입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걸어도, 샴페인 같은 목소리로 누굴 깔아뭉갤 때도 그랬다. 그건 공격이 아니라 방어였다. 쓰러지기 직전이라서 필사적이었다. 사람 손 좀 안 탄다고 성이 무너지진 않으니까…. 서지수는 다만 화려하게 낡아가는 여자였다. 거기 있는지 알고, 한때 융성했더라도 서지수를 만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남편 강동윤에게 ‘PK준은 그래도 몸을 준다’고 소리 지르며 침대에 혼자 누워서 강동윤과 찍었던 옛날 사진을 볼 때, 서지수는 온전히 여자였다. 강동윤은 (사랑이 아니라) 그만의 성을 쟁취하고 싶은 기사 같은 남자였으되, 불필요한 기사도는 버린 장수였다. 해야 하는 일은 했고, 방해요소는 제거했다. 그래도 꼿꼿했다. 꼿꼿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성취 말고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는데,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이미 갖고 있었던 것도 모조리 잃었다. 강동윤한테 서지수는 코르사주였다. 강동윤한테 필요했던 게 아내의 체온은 아니었다. 서지수한테 강동윤은 가질 수 없는 사랑, 만질 수 없는 몸이었다. 한쪽은 사랑을 믿었고, 다른 한쪽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왜곡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극적이었다. 어찌 보면 ‘아름다운 부부’라는 말은 형용 모순 아닐까? 종종 행복해도, 대체로 불행하지 않은 부부가 진짜로 있나? 그게 커플만의 문제일까? 사는 게 으레 그렇지 않나? 매 순간, 영원히 꼭 맞는 마음이라는 건 잔인하고 불필요한 환상이다. 그걸 다 알아도 빠지는 게 사랑 아니었나? 두 사람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염세의 증거는 현실에 이미 즐비했고, <추적자>의 서지수와 강동윤은 그 충실한 재현이었다. 드라마 <추적자>가 똘똘하게 반영한 게 한국의 정치, 경제판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서지수와 강동윤은 같은 정도로 불쌍했다. 다만, 서지수를 보는 마음에는 연민이 있었다. 밉지만 안아주고 싶은 여자도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최고였다. 다른 여느 커플들처럼. – 정우성([GQ Korea] 피처 에디터)

사랑은 너를 고독하게 하지 않는 것 | <고독> 조경민과 민영우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 커플보다 아름답게 사랑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사랑의 억울함을 거의 날마다 느껴야 했던 그 즈음, ‘사랑은 원래 어느 한쪽이 완전하게 헌신할 수밖에 없다’며 위로를 건네준 드라마 <고독>을 붙잡고 가을과 겨울 사이를 보냈던 것 같다. 고통을 감싸 안아야만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고독>에 등장했던 민영우(류승범)에게 새삼 확인했고, 세상 끝에 서 있는 듯한 위험한 눈빛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사랑스러운지, 그런 눈빛을 가진 조경민(이미숙)에게 반했다. 강하다는 것보다 약하다는 게 무서웠던 때였고, 내 몸이 날카로운 무기가 된 듯한 모난 감정으로 외롭고 쓸쓸했던 청춘의 한때였고 “이 관계를 잘 승화시킬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누군가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청춘이었지만 마음만큼은 늙고 병든 노년이 되어버린 것 같았던 그때, 어떤 것도 배제된 채 사랑의 아름다움만 들려주었던 친구가 <고독>의 극본을 쓴 노희경이었다. 노희경은 가끔 인터뷰에서 2002년 만든 드라마 <고독>에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다고 회고한다. 배우가 가진 스타일마저도 변화시켜버린 이 드라마 덕분에 이미숙이 사실은 정말 입담가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고,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는 그녀의 캐릭터를 반신반의해야 했다. 변덕스러운 성격과 감정 때문에 영화 현장에서 다루기 힘든 배우가 류승범이라는 것도 괜한 루머처럼 들렸다. 중학생 딸이 있는 40대 중년 여성과 20대 중반 남자의 사랑 이야기. 15살 차이가 나는 상사와 부하 직원인 데다 여자는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니 이건 너무 신파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원래 신파에 진리가 있고 클래식이 영원하지 않던가. 손을 잡아줄 수는 있어도 손을 내밀수는 없는 여자. 이 관계는 어쩌면 남자의 사랑만으로 지탱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은 절대 도망가지 않아야 한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당신을 고독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외롭게 살아가는 이미숙을 사랑하는 류승범의 대사가 사실은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 갑작스럽고 아무 생각 없이 다가오는 사랑은 늘 우리를 무너뜨린다. 정형화된 틀도 없다. 이 사랑은 맞고 저 사랑은 틀리다는 말로 사랑을 재단할 수도 없다. 그래도 그런 사랑 때문에 마음이 쓸쓸해지고 있다면, 드라마 <고독>을 찾아보는 게 어떤지. 소장하고 싶은 최고의 사랑, 최고의 커플 이야기다. – 김수진(<스타일H> 피처&리빙 디렉터)

연애의 끝에서 시작된 관계 | <연애시대> 이동진과 유은호
<연애시대>는 은호(손예진)의 입을 빌려 사랑은 여러 이유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랑은 뜻밖이고, 오해에서 시작되기도 하며,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기도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사랑은 언제 끝나는 걸까.’ 당시 여타의 한국 드라마들이 시작하는 사랑 안에서 무언가 트렌디한 것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면 <연애시대>의 궤도는 좀 달랐다.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 연애의 종착역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일러줬다. 은호와 동진(감우성)의 관계는 언제 끝날지 몰라 하던 사랑의 끝에서 시작한다. 이혼 후 친구처럼 지내는 것 같지만 보기와 다르게 쿨하지 못하다. 인연의 실타래를 냉정히 끊는 데 주저한다. 그렇다고 중앙에 그어놓은 선을 과감히 넘는 것도 아니다. 끝난 사랑이란게 그렇다. 머리카락에 붙은 껌마냥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 끝난 게 아니다. 팝업 창처럼 늘 제멋대로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다. 은호와 동진의 로맨스가 설렘과 떨림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안타까움과 슬픔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연애시대>는 드라마를 통해 현실보다 달콤한 로맨스를 동경하던 시청자들을 배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니아를 양산할 정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단단히 동여맨 것은 남녀의 이별 후를 드라마틱한 기교나 장치 없이 보통 남자와 보통 여자의 이야기로 그린 덕분이다. 은호와 동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연애의 끝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이들에겐 남의 추억이 아니었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예쁘게 보이려 하지 않은 손예진과 이에 화답하듯 담담한 연기로 일관한 감우성의 연기는 가장 보통의 로맨스가 더욱 ‘삶 내음’을 풍기도록 만들었다(남자치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스타카토식으로 짧게 끊어 말하는 감우성의 화법과 다소 어눌하고 느릿한 손예진의 말투는 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고통은 고통으로 잊는다고, 언젠가 한 번 지독한 이별의 열병을 앓은 후에 <연애시대>의 전편을 꺼내 본 적이 있다. 일부러 마지막회는 보지 않았다. 현실은 당연히 해피엔딩이 아니니까. 은호와 동진 커플에 대한 유일한 불만이었다. – 김영재 (<바자>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