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TV 예능의 채널이 달라졌다. SBS, KBS, MBC를 오가던 TV 리모컨은 이제 케이블과 종편을 넘나든다. 어딘가는 재미있고, 어딘가는 재미없어진 이야기.

월요일 점심이면, 지난 주말의 예능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없던 때가 있었다. 안 본 예능이 있으면 그 반응 때문에 굳이 ‘다시 보기’를 챙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공중파의 예능이 재미없어졌다. 끝없는 동어 반복들, 비슷한 출연자들, 비슷한 포맷…. 반면 처음부터 기대가 없었던 종편 그리고 케이블 채널은 볼만한 예능을 양산하면서 거꾸로 공중파에 영감을 제공하는 중이다.

방송관계자들이 입을 모은 올해 예능 히트작은 단연 <냉장고를 부탁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터질’ 줄은 JTBC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연예인 패널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셰프이고, 요리 프로그램을 누가 보겠냐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냉장고를 부탁해>의 차별점이 될 줄이야. 출연진이 자신의 집에 있는 냉장고를 직접 스튜디오로 가지고 와 그 안에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어느 집 냉장고에나 흔히 있을 법한 재료로 짧은 시간에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요리를 선보인다’는 게 기획 의도였지만, 사실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고 그 요리를 따라 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그 대결과 기발한 요리를 보는 그 자체가 재미다. 성희성 PD는 “초반에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다. 냉장고를 공개한다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연예인 측에서 먼저 출연 제의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지드래곤과 태양이 출연한 회가 7% 시청률을 기록하며 월요 예능의 최종 승자가 되었고, 지금 방송가에 부는 ‘셰프테이너’ 열풍을 증폭시켰다. 최현석, 정창욱, 샘킴 등은 공중파 예능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올리브TV <올리브쇼>에서 전문가 영역에 머무른 셰프들이 이제 어엿한 예능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다양한 도전자가 게임을 통해 최후의 1인이 되는 tvN <지니어스>와 범죄 현장의 범인을 맞히는 JTBC <크라임씬>은 예능의 장르화를 꾀하며 마니아층을 양산했다. <지니어스>는 본방이 시작되면 인터넷 게시판이 <지니어스>로 도배될 정도로 인기다. 과거 미국의 대표적 서바이벌 프로그램 <서바이버>처럼 ‘연합’과 ‘배신’이 난무하며 프로그램의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머리를 쓰는 프로그램이지만, 처세와 전략적 사고를 해야만 우승할 수 있다. 홍진호, 이상민 등이 <지니어스>의 가장 큰 수혜자다. <지니어스>와 <크라임씬>은 공중파의 <1박2일>, <런닝맨>, <진짜 사나이> 등 시종일관 온몸으로 뛰어다니는 예능 대신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쓰는 예능도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적인 예능에 목이 마른 시청자의 욕구를 채워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라임씬>은 국내외 실제 범죄 사건을 재구성, 출연자들이 의문의 사건 현장 속 용의자로 지목되며 진범을 찾기 위해 치열한 추리 공방전을 펼치는 롤플레잉 추리 프로그램이다. <크라임씬2>는 표창원 교수가 등장해 인기와 신뢰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하지만 그는 범인을 놓쳤다!).

비록 시청률은 낮았지만, JTBC <나홀로 연애 중>은 ‘연애’라는 코드를 예능으로 이어가려는 착신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올해의 예능 히트작이 <냉장고를 부탁해>라면 작년과 재작년에는 JTBC <마녀사냥>이 있었다. 지금까지 예능에서의 연애는, <산장 미팅 – 장미의 전쟁>부터 <우리 결혼했어요>에 이르기까지 연예인과의 유사 연애, 가상 연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마녀사냥>은 일반인들의 실제 사연을 주인공으로 올렸다. <나홀로 연애 중>은 <마녀사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지금 현재의 연애를 보여준다. 자의 반 타의 반 연애를 포기한 이 시대 젊은이를 위한 ‘혼자 하는’ 연애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남자편에 등장한 서강준이 스타덤에 오르는 훈훈한 장면을 남긴 채 종영했다.

 

종편과 케이블이 새로운 포맷과 주제로 예능 총공세를 펼치는 사이, 공중파에서는 연예인 가족만 따라다니는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만 양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해요. 종편과 케이블이 엄청난 투자를 하기 때문이죠.” 익명을 요구한 한 예능 작가의 말이다. 다른 작가와 피디의 말도 다르지 않았다. “종편과 케이블은 좀 더 과감한 시도가 가능합니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우선 해보라고 하죠. 실패에 대한 부담도 적죠.” 투자라면, 제작비에 대한 것일까? “제작비는 큰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인적 투자에 대한 것은 다르죠. 종편과 케이블은 능력 있는 작가나 피디를 스카우트하는 데 과감해요. 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건 기회와 돈이죠. 당신이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면서 지금 받는 연봉의 몇 배를 제시한다면, 누가 마다하겠어요? 성공한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이미 예능에서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 만들고 있어요.” 예능의 성공에도 시장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피디, 좋은 작가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회사가 지원한다. 전 국민이 봐야 한다는 압박에 놓인 공중파보다 운신의 폭도 자유롭다. 그렇게 종편과 케이블은 계속 볼만한 예능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작가가 말했다. “나영석 피디가 계속 KBS에 남아 있었다면 <삼시세끼>나 <꽃보다 할배> 등이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 그대로 방송을 탈 수 있을까요?”

 

공중파의 역습
예능춘추전국 시대에서 유일하게 공중파에서 승점을 챙긴 프로그램은 MBC <마이리틀 텔레비전>, 일명 <마리텔>이다. 아프리카TV를 차용한 <마리텔>은 밤 11시라는 비대중적인 시간대에 방송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맞아떨어졌다. 인터넷과 방송계의 화두였던 UCC를 공중파 방송으로 선정한 것은 과감한 한 수였다. 연예인이 아닌 ‘백주부’와 ‘김영만 아저씨’가 시청률과 화제의 돌풍을 이끌어냈고, 두 사람이 하차한 현재는 디자이너 황재근, 마술사 이은결이 인기를 모으는 중이다. 편집된 방송 전에 인터넷 방송을 실시간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재미의 요인이 되었다. 올해 최고의 예능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백종원은 <마리텔> 하차 후 이휘재, 김준현과 함께 SBS의 새 프로그램 <백종원의 3대천왕>의 메인 MC가 되었다. 외식전문가가 공중파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예능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게 된 것이다. <백종원의 3대천왕>은 지난 9월 11일 첫 방송에서 래퍼 도끼가 합류한 MBC <나 혼자 산다>를 꺾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