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똑똑한 여자들을 진짜로 인정하고 있을까?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양성평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할리우드 희대의 섹시남.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조지 클루니의 결심을 꺾은 것은 매력적인 국제 인권 변호사 아말 알라무딘이었다. 영어와 불어, 아랍어에 능통한 그녀는 2004년부터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헤어진 로버트 패틴슨은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FKA 트위그스와 데이트를 한다. 춤과 음악에 재능을 가진 그녀의 첫 번째 앨범은 머큐리상을 거머쥐었다.

 

‘Smart is New Sexy’. 국내에서는 ‘뇌섹남’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모두가 두뇌의 매력에 눈뜨고 있다. 여성들 역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거나 지적인 면모를 어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런건 이미 수십 년 전에 이뤄진 일 아니냐고? 하지만 대부분의 똑똑하다는 여성들조차 자신들의 야심이나 능력을 ‘여자다운’ 수준에서 표현하기 위해 애썼던 게 사실이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온화한 여성 리더십 같은 표현에 만족하는 척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여성 리더십은 성공을 거두었나? 페이스북의 최고운영 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는 저서<린 인(Lean In)>에서 고위직 여성들이 남성보다 연봉이 낮은 이유 중 하나로 ‘공격적으로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여자라면 상냥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에 길들여진 탓이다. “연봉이 생각보다 적네요”와 “제가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곳에서 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레드 카펫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최근 할리우드에서 일어난 일들은 꽤 놀랍다. 레드 카펫의 여신들이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녀들이 그동안 사회적으로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난민 구호 활동과 입양 문화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안젤리나 졸리가 대표적인 예다.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인 이들도 많다. 스칼렛 요한슨은 버락 오바마의 든든한 지지자 중 하나였고, 지난해에는 리브 타일러와 케이티 페리가 차기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최근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활동이나 발언은 구체적인 언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지난해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의 드레스 차림을 아래부터 위까지 훑는 카메라를 향해 “남자 배우들한테도 이렇게 하나요?”라고 물었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Guardians of Galaxy)>의 여주인공 조 샌다나는 여성은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여자는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어요. 그러나 할리우드 대본의 절반은 늘 덜 중요하고 부차적인 캐릭터로만 여자를 그리고 있죠.”

 

3년째 골든글러브 시상식의 진행을 맡은< SNL>의 간판 스타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가 공로상을 받은 조지 클루니를 소개한 장면도 기억할만하다. “아말 알라무딘은 인권 변호사로서 엔론 사태를 맡았고, 전 UN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에게 시리아 사태 자문을 제공했으며, 가자지구 인권 침해 조사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남편이 오늘 공로상을 받습니다!” 남녀의 익숙한 성 역할을 뒤집는 위트 있는 소개였다. 아예 직접 영화 제작사를 차린 리즈 위더스푼도 있다“. 똑똑하고 멋진 6명의 여배우가 멍청한 역할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것을 보며 직접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제작자로 데뷔한 그녀가 처음으로 제작에 나선 작품은 지난해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나를 찾아줘(Gone Girl)>이다.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와일드(Wild)>에서는 제작과 주연을 함께 맡았다.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상실감을 잊기 위해 대자연 속으로 떠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개봉 첫 주 박스 오피스 6위에 오르며 의미 있는 성공을 거뒀다.

 

할리우드 20대 여배우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제니퍼 로렌스 역시 <베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의 신체 주도권에 대해 중요한 발언을 했다. 전 남자친구에게 보낸 누드 사진이 유출되는 사태를 겪은 그녀가 ‘누드 사진 유출은 스캔들이 아닌 역겨운 성범죄’임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법도 바뀌어야 하고 우리도 바뀌어야 해요. 만약 그 사진을 본 사람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죠. 나는 당신들이 내 누드를 봐도 된다고 말한 적 없잖아요.” 애초에 그런 사진을 찍은 그녀의 부주의를 탓해야 할까? “나는 사과할 일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고, 건강했고, 4년 동안 좋은 관계로 지냈던 남자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었죠. 당신이라면 남자친구에게 포르노를 보게 할까요, 아니면 내 사진을 보게 할까요?” 제니퍼 로렌스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 둘의 관계를 위해 찍은 자신의 누드가 전 세계 사람들의 ‘볼거리’가 된 그녀는 피해자지 물의의 주인공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이효리가 쌍용자동차의 최대 주주인 아난드 마힌드라의 트위터 계정으로 자신의 요가 사진을 첨부한 트위터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에게 당신의 나라, 인도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나마스떼’라는 말을 덧붙여서.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복직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똑똑한 여자는 정말 섹시할까?
자신의 관심사나 문제의식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아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많은 여성이 이들을 롤모델로 삼는다. 하지만 과연 세상도, 아니 세상의 절반인 남자들도 똑똑한 그녀들을 ‘섹시하다’고 생각할까? 단적인 예로 동물 권리와 채식, 그리고 인권 운동에 관해 발언한 이후 섹시 아이콘이었던 이효리는 일부 남성들에게 ‘비호감’이됐다. 많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소위 ‘드센 여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성은 상냥하고 순종적일 때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개팅에서 애프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상대 남자의 말에 호응하며 물개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여성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거부 반응을 보이고,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덧붙이는 건 드센 여자처럼 보이는 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기 없는 여자가 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니까! 최근 국내의 한 남성 칼럼니스트는< IS보다 무뇌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자극적인 제목과 여성 혐오를 옹호하는 내용의 글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향한 사회 전반적인 혐오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감히 쓸 수도, 잡지에 실리지도 않았을 수준의 칼럼이었다.

우리는 충분히 평등한가
남자 형제를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가정을 위해 모든 것을 미뤄두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우리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면 양성평등이 실현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몸을 훑는 카메라에 일침을 가한 케이트 블란쳇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수많은 지표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가리키는 ‘유리 천장’의 유무를 확인하는 지표를 만들었다. 노동시장 참여율, 연봉 격차, 여성 임원 비율 등을 기준으로 삼은 이 조사에서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대졸 이상 여성 고용률 역시 60.5%로 OECD 가입국 최하위에 머물렀으며 남녀 임금 격차는 39%에 달했다. 성폭행, 성희롱의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제대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상황은 크게 다를까? 통계에 따르면 같은 일을 해도 여자는 남자가 받는 연봉의 78%밖에 받지 못하고, 하루에 평균 세명의 여자가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다. 이쯤 되면<주노
(Juno)>의 배우 엘렌 페이지의 다음 발언처럼 적절한 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사람들이 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기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페미니즘이 부정적 단어라면 우린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에 살고 있을 게 분명할 텐데요.”

문제는 페미니즘이나 목소리를 내세우는 여자들이 아니다.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 성차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자, 남자들의 이야기에 미소 짓기보다는 직접 농담을 던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통틀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로 대충 묶어버리고,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게 진짜 문제다. UN 양성평등 홍보대사로 선출된 엠마 왓슨은 지난 가을 UN 연설을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포부와 발상이 중요하다’며, 양성평등이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일임을 밝혔다. 여자들이 ‘드센 여자’라는 말 앞에 스스로를 억누르는 것처럼 많은 남자들 역시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한 압박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엠마 왓슨은 말한다. “저는 성공한 남자라는 왜곡된 의식에 의해 남자들이 부서지고 불안정해지는 것을 봤습니다. 남자들 역시 성적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자가 공격적이지 않다면 여자들이 강제적으로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자가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면 여자는 지배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섬세하다고 느낄 자유와 강인하다고 느낄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회답하듯, 남성 역시 여성 인권 운동에 함께한다는 취지의 ‘He for She(www.heforshe.org)’ 캠페인을 향해 로건 레먼, 에디 레드메인, 톰 히들스턴, 조셉 고든 래빗, 러셀 크로우 등이 지지를 선언했다. 진짜로 ‘스마트’하고 ‘섹시’한 순간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