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날고 기는 젊음이라 해도 이들의 섹시함에 견줄 수는 없는 일이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삶의 경험과 깊고 단단한 눈을 지닌 중년들. 그들만의 미학에 대하여.

군계일학, 손석희
외모만 놓고 보자면 손석희의 모든 조건은 나의 이상형과 정반대였다. 너무 지적이고, 깔끔하고, 시크하달까. 1984년 MBC에 입사한 손석희가 대한민국 최초로 아나운서와 기자를 겸한 인물이라는 기사가 나오거나 1992년 MBC 노조 파업 때 주동자로 낙인찍혀 구속 수감되는 뉴스를 보면서도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정보만 얻었을 뿐 인물에 대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도 그저 수많은 앵커와 기자, 아나운서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손석희라는 이름과 이미지를 뇌리에 각인시킨 건 2000년부터다. 그가 진행을 맡은 <시사집중>과 <100분 토론>은 신선한 이슈였다. 시사 이슈와 토론을 이렇게 지적으로 리드하며 통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출근길 버스 안 라디오에서 손석희가 “창씨 개명은 조선인이 희망했다”는 일본 총무성 아소 장관의 망언에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자’의 헛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요? 여기서 ‛자’는 ‘놈 자’입니다”라고 침착한 어조로 일침을 가할 땐 일어나 만세라도 부르고픈 기분이었다. 2013년 그가 JTBC행을 택했을 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말을 아끼던 손석희는 눈에 보이는 행보로 답하고 있는 중이다. 차별성 없던 뉴스는 수장이 바뀐 것만으로 완벽하게 다른 뉴스가 됐다. 세월호 침몰 나흘 후, 직접 팽목항으로 달려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어떤 권력이 눈앞에 있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일갈하던 그가 위로도 잘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중립과 정론의 아이콘인 손석희가 보인 인간적인 모습은 말 그대로 반전이었다. 세월호 이후 더욱 길게 편성된 손석희표 뉴스 <뉴스룸>은 이 시대 가장 뉴스다운 뉴스로 호평과 신뢰를 받으며 순항 중이다. 그가 직접 편집권을 가지고 만드는 앵커 브리핑과 클로징 BGM은 어떤 뉴스에서도 볼 수 없는 <뉴스룸>의 백미다.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 출간 소식에 조지 오웰의 말을 빌려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점을 밝힐 때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핵직구를 날릴 수 있는 언론 파워가 손석희의 뉴스에는 있는 것이다. 1956년생인 그의 나이는 올해 58세다. 최근 브라운관에 비친 손석희는 부쩍 늙어 보인다. 일도, 고민도, 책임져야 할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때의 손석희보다 섹시하다. 지적인 경력에 더해진 노련함과 인간미는 젊음이 결코 넘볼 수 없는 매력이다. ‘새 것’보다 더 끌리는 건 ‘유일한 것’이다. – 나정원(<보그걸> 피처 디렉터)

치열하게 사는 남자, 차승원
묵직한 숫자를 마주하고서도 의아하다. 그를 중년으로 구분해본 적이 없다. 총각이나 아버지, 여느 40대 남자가 가질 만한 다른 역할이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188cm의 마른 몸. 20대나 지금이나 웃어서 생긴 주름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외모가 모든 걸 압도한다. 차승원의 키가 조금만 작았더라면 어땠을까. 야비한 정치가나 사업가 캐릭터로 중견 연기자의 경력을 쌓아갔을까. 웃음이 조금만 더 적었더라면 내내 스타일리시한 ‘모델 출신 배우’로 무게를 한껏 주고 살 수도 있었겠지. 요즘 tvN <삼시세끼>에서 배추를 바닷물에 절이던 ‘차승원 아줌마’를 보면 더 그렇다. 그의 재치는 오늘날 예능 방송도 탐내는 순발력이다. 중년의 섹시함은 지난 세월에 있다. 남자의 섹시함은 남자가 인정할 때 진짜가 된다. 차승원은 엄연히 대중에게 팔리는 상품이다. 상품은 주어진 기능으로 평가된다. 그는 별 일 없는 시기에도 맥주와 자동차 광고를 쉼 없이 찍었다.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만 얻어낼 수 있는 일이다. 남자답다는 말이다. 브라운 밖, 세상 남자들은 그의 리얼 스토리를 섹시함으로 꼽는다. 1998년, 차승원은 고작 열여덟에 데뷔했다. 시꺼먼 눈썹은 다듬지도 않은 근육질. 전형적인 섹시 모델로 금세 소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그는 당시 가장(家長)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남들은 일탈하고 싶은 청년기를 보내는 동안 차승원은 내내 아버지였다. 여느 인터뷰에서건 남보다 일찍 사랑에 눈뜬 남자를 자처했다. 지난해 사회부 뉴스에 오르내린 아들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그 이상을 보여줬다. 차승원은 알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는 남자다. 가슴이 쓰린 아버지이자 품을 여는 남편 그리고 눈물 많은 아들이었다. 삶의 민낯을 드러내고 세상에 나서는 것. 어린 남자는 감히 가질 수 없는 무엇이 그의 늘씬한 몸을 덮은 순간이다. 이제야 차승원이 달리 보인다. 참 섹시하다. – 김미한(<머니투데이> 기자)

하이드, 지킬, 예프게니 키신
한 시절 대단해 보이기도 했던 피아니스트는 진정한 피아노 소리를 내는 이들이 아니었음을 약간 모자라 보이는 곱슬머리 남자 때문에 알게 됐다. 피아노 소리를 아름답게 울리는 나무통처럼, 피아노 치는 남자가 멋지게 다가온 건 이 곱슬머리 남자 예프게니 키신의 폴로네이즈를 처음 들었을 때다. 빛보다 빠르게 몰아치다가 텅 빈 공기처럼 고요해지는 그의 피아노 소리는 짜임새가 완벽했고 적절했으며 햇살처럼 따뜻하고 알칼리수처럼 부드러웠다. 쇼팽의 4개의 즉흥곡, 4개의 폴로네이즈를 연주한 <Evgeny Kissin Plays Chopin>은 그의 수많은 앨범 중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알고 보니 그는 어릴 적부터 프레데리크 쇼팽의 곡 해석으로 유명했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나 다니엘 바렌보임,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 아직까지 가장 섹시한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연주를 일삼는 이 천재 피아니스트, 1971년생 예프게니 키신은 국내에서도 엄청난 팬을 가지고 있다. 2009년 내한 공연 당시 34차례의 커튼콜을 받아, 그날 그가 화답한 앙코르 곡만으로도 공연 시간을 훌쩍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2006년 내한 공연에서도 무려 3시간을 연주하고 10곡 앙코르의 기록을 세웠으니 이쯤 되면 예프게니 키신이 너무 자신만만한 천재 같아서 얄미워질 지경이다. 실연에서 더 빛을 발하는 연주자라니, 진짜 거장은 겸손하기보다 완벽하다. 즉흥적이고 기복이 심한 천재 피아니스트가 아니기에, 그럼에도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감성을 가졌기에 그를 정말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예프게니 키신은 최고의 공연을 위해 과학자처럼 자신을 재단하고 훈련시킨다. 밤새워 고데기로 만 것 같은 그의 부푼 곱슬머리와 간격이 넓어 보이는 갈색 눈에 여드름이 난 얼굴은 가끔 조금 모자라 보이기도 하지만(너무 많은 연습량 때문에 자폐 기질까지 의심받은 시절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10곡이 넘는 앙코르 곡을 쳐대며 관중석 구석구석까지 미소를 보낼 땐, 세상을 다 가진 남자처럼 보인다. 무대 위에서는 모든 걸 자신이 주도한다는 말까지 했었으니, 그의 동그랗고 순진한 눈망울만 보면 다른 인격체 같아 보이기도 할 때가 있다. 여전히 곱슬머리였지만 지금보다 훨씬 연약해 보인 그의 10대 시절 여린 모습이 떠올라, 어쩐지 말을 걸고 싶어지게 하는 마력을 가진 남자. 과연 그럴 날이 있기나 할까. – 김수진(<스타일H> 피처 디렉터)

시간이 깃든, 에드워드 노튼 
<프라이멀 피어>의 제작진은 당대의 스타였던 리처드 기어의 상대역으로 당시 두각을 보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원했다. 디카프리오가 거절한 그 자리는 밍밍한 얼굴의 예일대학교 졸업생 에드워드 노튼에게 돌아갔다. 다중인격을 가진 범죄자. 천사가 악마로 바뀌는 그 순간, 관객은 리처드 기어를 깡그리 잊었다. 에드워드 노튼이라는 배우가 탄생한 순간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헐크>부터 <파이트 클럽>의 또 다른 자아, 사랑에 빠진 신부까지 배우로서는 특별한 스캔들 없이, 꾸준히 좋은 작품을 이어온 모범생이었다. 요즘 말로 ‘어좁이’에 정관장을 사주고 싶을 정도로 늘 기운없어 보이는 남자지만 나는 스크린에서 그의 섬세한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그 힘없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한 번만 터치해줬으면! 영 ‘초식남’ 같은 그가 현실 세계에서 ‘육식녀’들만 만나는 것도 섹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었다. 드류 배리모어, 셀마 헤이엑, 커트니 러브가 그의 실제 여자 친구였다. 도대체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걸까? 몇 년 전, <페인티드 베일>에서 비로소 그가 중년의 남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눈가의 주름은 깊어졌지만 부정을 저지른 아내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는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영화를 찍으며 잘 늙어가고 있다. <문라이즈 킹덤>에서 어리버리한 보이스카우트 단장을 연기할 때의 그 천연덕스러움이란! 장가는 언제 가나, 문득문득 궁금했던 그가 비밀리에 결혼해 득남했다는 소식이다. 이만하면 팬으로서 해피엔딩이다. – 허윤선(<얼루어>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