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앞에 공평한 건 우리가 사랑한 스타들도 똑같다.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시대를 풍미한 그들도 시간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꽃답다. 주름이 파이고, 얼굴이 홀쭉해져도 여전히 그들을 추앙하는 이유.

여인의 향기, 줄리아 로버츠

90년대 중반 웬만한 국내 톱스타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던 두 명의 할리우드 여배우가 있다. 콧주름을 찡긋거리던 말 그대로 ‘귀여운 여인’ 멕 라이언과 <귀여운 여인>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아메리칸 스위트 하트’ 줄리아 로버츠가 그 주인공들이다.

국내에서는 멕 라이언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높았다. <프렌치 키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포스터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샴푸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브라운관에서도 인지도가 높았다. 멕 라이언이 ‘귀여움’이라는 무기로 좀 더 친근한 매력을 어필했다면 줄리아 로버츠는 이를테면 ‘서양 여자’의 전형이었다. 큰 키와 더 큰 입, 그리고 라미네이트 광고를 모두 섭렵할 만큼의 건치가 드러나는 빅 스마일까지. 하지만 귀엽지는 않았던 줄리아 로버츠는 심혜진이 최진실의 인기를 능가하지 못한 것처럼 국내 시장에서는 2인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전세는 역전되었다. 멕 라이언이 사생활과 성형 의혹으로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주저앉았다면 줄리아 로버츠는 꾸준한 작품 활동과 자기 관리로 예년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성숙한 매력을 내뿜고 있다. 2000년에 <에린 브로코비치>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녀는 이후 <클로저>와 <모나리자 스마일>, <백설공주>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등 다양한 작품에서 안정된 연기를 선보이며 여전히 톱 배우 리스트에 당당히 랭크되어 있다. 1967년생. 우리 나이로 마흔여덟의 줄리아 로버츠는 올해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을 통해 괴이한 가족의 신경질적인 맏딸 바바라 역할로 작품을 책임지는 기둥이 되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엄마 역할의 메릴 스트립과 팽팽한 균형을 이루던 그녀의 다무진 입매를 보고 있자니 그 옆에 번진 주름마저도 존경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아메리칸 스위트 하트’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감히 메릴 스트립과 ‘투 톱’ 배우가 될수 있었을까. 광고에 나오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우아한 몸짓 대신 바닥에 뒹굴며 몸싸움을 하고 핏발 선 눈으로 세상의 거친 바람을 그대로 맞아내는 줄리아 로버츠는 낯설었지만 아름다웠다.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진리를 자연스레 몸으로 체득한, 그래서 예쁘고 귀엽게 보이려 애쓸 필요가 없는 배우 줄리아 로버츠에게서 ‘섹시 와일드’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곧 오십 줄에 들어설 그녀가 스크린에 서 보여줄 수많은 매혹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진명현(KT&G 상상마당 팀장)

맷 딜런을 잊지 말아요

‘맷 딜런이라니, 최근 10년간 기억할 만한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던가?’ 라는 냉소적인 문장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맞다. 당신은 절대 몰랐을 그의 최근작 <배드 컨트리>는 시작과 동시에 한숨부터 나오게 하는 영화다. 이 엉성하고 진부한 영화를 2시간 동안 보고 있느니 설거지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때 코팅 책받침의 주인공이었던 배우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탐욕스러운 욕망으로 지배했던 맷 딜런이 거지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둔탁한 몸의 중년이 됐다니. 다행히 벗겨진 이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턱은 없다. 하지만 그를 여전히 좋아하는 게 그런 속물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데뷔 때부터 갖고 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무심함’, 그리고 ‘엄마의 마카로니 찜을 사랑하며 열심히 먹은 미국 중산층의 느긋한 태도’가 여전히 배어 있다. 맷 딜런의 데뷔작< 오버 디에지> 제작진이 캐스팅을 위해 웨스트체스처 카운티의 학교들을 돌던 중 모두가 수업에 들어가려고 허둥지둥할 때 학교 복도에서 짐짓 터프한 척 어슬렁거리는 그를 발견하고 캐스팅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 이후 그는 소설가 S.E. 힌튼의 페르소나로서 그녀의 책을 스크린에 옮긴<텍스>, <아웃사이더>, <럼블 피쉬>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노동계급 청춘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인기를 할리우드의 돈을 움직이는 상업적인 배우로 발돋움하는 데 썼겠지만 그는 자신이 지구에서 민소매 티셔츠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인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아름다운 청춘 스타였던 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인디 감독 구스 반 산트와 카메론 크로의 작품과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졸작을 오고 가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뒤죽박죽 만들어왔다(놀라운 건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는 한 편도 없었다는 것). 두 팔을 걷어 올린 밑바닥 인물을 주로 연기한 그는 2005년 찰스 부코스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삶의 가장자리>에서 그간 연기한 노동계급의 청춘이 어떻게 초라하고 고독한 성인이 되어가 는지 씁쓸하게 보여줬다.

 

맷 딜런은 이 영화를 위해 대충 살을 찌운 볼품 없는 몸뚱어리로 항상 술을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는 행크 치나스키를 만들어냈는데, 놀라운 건 그 게으른 몸짓 안에 삶에 대한 이상한 기품이 있다는 것이다. ‘기름진 머리와 우수 어린 눈빛’이라는 성장기 호르몬만으로도 스크린을 장악할 수 있었던 그가 그동안 살아온 시간에서 배어 나온 연기를 하다니. 그걸 지켜볼 때의 울컥하는 감정은 그의 튀어나온 배로도 멈출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명성이 쇠락하고 젊었을 때 보다 매혹적이지 못한 건 인생의 당연한 흐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맷 딜런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실수로부터 배우고 언제나 순간을 산다”고 말해왔다. 세상에, 너무나 섹시하지 않은가?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예전 여자친구들이 전화를 걸고 싶을 만큼 멋진 모습으로 두 권의 남성지 표지를 최근 장식했다. M. 나이트 샤말란 제작의 새로운 TV 시리즈 <웨이워드 파인즈>에서 의문의 마을을 파헤치는 비밀 요원으로 나온다니, 아무래도 그의 사진을 코팅해 책받침으로 다시 만들어야겠다.

– 나지언(칼럼니스트)

신화에서 삶으로, 소피 마르소

소피 마르소는 여배우다. 그건 사실이지만, 어린 시절 내겐 아니었다. 여배우라는 현실적인 직업은 삭막한 명칭일 뿐이었다. 그녀는 여신, 아니 당시 어린 내게 외국 여자의 올바른 본이었다. 판타지이자 욕망이며, 간혹 몽중의 대상이었다. 당시 소피 마르소는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와 함께 3대 여신으로 불렸다. 하지만 3종 세트 같은, 마트 생활용품 패키지로 그녀가 묶이는 게 싫었다. 소피 마르소는 달랐으니까. 브룩 실즈는 육감적이었다. 피비 케이츠는 귀여웠지만… 헐벗었다. 소피 마르소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웠다. 자고 일어나면 옆집에 그녀가 이사 올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단지 예쁘기만 해선 이런 느낌을 줄 수 없다<. 라붐>에선 그녀가 그랬다. 첫사랑이 꽤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하다는 걸 알려줄 정도로 친밀한 여자. 예쁜 여자는 많다. 하지만 예쁘면서 편하고 당차면서 여린 여자는 적다. 그런 외국 여자는 더 적다. 소피 마르소가 그랬다. 그 후 <유 콜 잇 러브>에선 소녀에서 여자가 돼 나타났다. CF처럼 예쁜 모습만 골라 보여줬다. 유행한 책받침을 수천 장 모아 상영한 듯한. 같은 여자인데 다른 여자 같았다. 여자란 참 묘한 존재구나, 싶었다. 어쩌면 그녀는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걸 가르쳐줬다. 그걸 배우면 난…거뭇해졌다. 대면하지 않고도 한 남자의 인생에 영향을 준 여자. 이 정도는 돼야 ‘희대의 여신’이라 부를 만하다. 이제 소피 마르소는 그때 그 모습은 아니다. 희뿌연 안개가 걷히자 마흔여덟 여배우가 나타난다. 젖살보다 주름이 친숙해진 모습. 과거 몽환적인 느낌은 한때 내 배에 머문 복근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묵묵히 걸어온 여배우의 후광이 대신 남았다. 삶이 어린 시절과 같지 않다는 걸 아는 나이인 내겐, 그 후광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녀는 여느 여배우와 달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말만 하지 않고 몸소 행한다. 그녀의 지금 모습은 <어떤 만남>이란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아직도 사랑을 하는 역할이다. 브룩 실즈도 가고, 피비 케이츠도 갔다. 소피 마르소는 남았다. 남아서 사랑도 한다. 물론 그녀는 가끔씩 잊히기도 했다. 그건 달뜬 소년의 마음속에서만 잊힌 거였다. 소년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꾸준히 여배우로서 살아왔다. 그 안에선 부침도 있고 환희도 있다. 그녀는 신화가 아닌,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간다. 오래 남는 자가 강한 거라 했다. 여배우에게 강함은 (넓은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다. 소피 마르소는 분명 누구보다 ‘지금도’ 아름답다. – 김종훈(<아레나>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