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드라마를 볼 때면 작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스타 작가의 원고료가 화제가 되고 수백 명의 작가 지망생이 배출되는 지금, 드라마 작가는 새로운 문화 권력이다. 우리를 웃고 울게하는 11명의 작가.

김수현 | <청춘의 덫>, <사랑과 야망>, <엄마가 뿔났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
드라마 작가로서 김수현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흥행보증수표’라는 말이 습관처럼 따라붙지만, 시청률이라는 잣대로 그를 평가하는 게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쯤 모두가 안다.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김수현 작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발굴한다. 고부갈등과 불륜이라는 클리셰를 제외하고도 가족이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를 극 속에 녹여내는 그는 그야말로 ‘가족극의 여왕’이다. 독립을 선언한 엄마를 통해 가사노동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엄마가 뿔났다>, 동성애 이슈를 끌어들인 <인생은 아름다워>, 황혼이혼과 은퇴한 중년 남성의 우울증을 그린 <무자식 상팔자>가 가까운 예다. 통속적인 가족극에서 ‘막장’으로 치닫지 않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이슈까지 작품에 녹여내는 기술은 내공이라는 단어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 물론 시청률 50%를 넘기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그의 작품을 둘러싼 반응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느껴진다. 작품이 갈수록 무거워진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우려를 샀던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중반부를 지나며 꾸준히 상승세를 타 현재 15%의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두 번 이혼한 여주인공 은수(이지아)를 통해 여자에게 결혼이 행복의 종착역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거다.

김은숙 |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김은숙은 상업성과 작품성, 이 두 가지 요소의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작가다. 김은숙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신데렐라 스토리’의 구성을 따라간다. 전형적인 줄거리를 담은 작품이 비범해진 건 그 과정을 뒤틀어 보여줬기 때문이다. <파리의 연인>의 로맨스가 결국 여주인공 강태영(김정은)의 시나리오였다는 암시를 남기고, 극에서처럼 서로 몸이 바뀌는 기적이 아닌 이상 남녀가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여운을 남긴 <시크릿 가든>처럼 말이다. 한기주(박신양)부터 김주원(현빈), 김탄(이민호)까지 명맥을 잇는 ‘차도남’ 남주인공들이 남긴 대사가 가진 힘도 무시할 수 없다. ‘애기야 가자’, ‘한땀한땀’, ‘나 너 좋아하냐?’ 등 언뜻 유치하기까지한 대사가 캐릭터와 맞물려 적절한 타이밍에 터질 때, 어떤 폭발력을 갖는지 작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PPL에 가장 관대한 스타 작가 중 한 명임에도 PPL이 극의 내용과 상대적으로 부딪히지 않는 건, 이처럼 타고난 타이밍에 대한 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속적인 성공과 별도로, 최근작으로 갈수록 작품성이 이전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신사의 품격>은 40대 남자들의 성숙한 매력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고, <상속자들>은 <꽃보다 남자>와 크게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건 김은숙이 시청 공무원의 이야기를 그린 <시티홀>이나 방송국 이야기를 담은 <온에어> 같은 작품 역시 매우 ‘잘’ 쓴다는 사실이다. 구조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라는 차기작이 김은숙을 어디로 이끌고 갈지, 다음 작품의 유행어보다 그게 조금 더 궁금하다.

박지은 | <내조의 여왕>, <넝쿨째 굴러온 당신>, <별에서 온 그대>
박지은 작가의 작품은 경쾌하다. 데뷔작인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남편의 성공을 기원하거나, 혹은 시댁과의 갈등을 조용히 인내하는 기존의 ‘아줌마’ 캐릭터와는 완전히 달랐다. 한 자릿수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30%를 넘기며 화려하게 종영했고, 이후 김남주는 CF퀸에서 ‘완판 퀸’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윤상현은 스타 대열에 올라섰다. 10년 가까이 <FM골든 디스키 김기덕입니다>의 작가로 일한 그녀는 풍부한 에피소드를 펼쳐놓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장점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최고로 발휘됐다. 당시 30대 후반이었음에도 10대부터 80대까지, 주요 등장인물만 10여 명에 달하는 50부작 드라마를 지루함 없이 풀어낼 수 있었던 건, 캐릭터를 분명히 하고, 매회 악센트가 될 만한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그녀의 저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별에서 온 그대>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재미는 두 남녀주인공 사이에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와 천송이(전지현)라는 캐릭터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극 중반까지 긴장감을 자극한 스릴러적 요소는 너무 쉽게 무너져 내렸고, ‘본편보다 좋다’는 평까지 들었던 에필로그 장면 역시 잦은 카메오 등장과 전생 이야기가 흐지부지되면서 힘을 잃었다. 이후 <별에서 온 그대>를 기억할 때 가장 회자되는 장면은 ‘천송이가 랩을 한다 홍홍홍’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회차별 재미있는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닌, 집중력 있는 드라마를 그려낼 수 있느냐가 지금 박지은 작가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박혜련 | <드림하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
박혜련 작가는 <장학퀴즈>의 문제 출제를 도우며 방송가에 입문했다. <별에서 온 그대>의 박지은 작가와 함께한 <칼잡이 오수정>이 그의 첫 번째 정극이다. 드라마는 ‘엄정화 파워’를 누리지 못하고 평이한 시청률로 종영했지만, 이후 박혜련은 성장물에서 장기를 드러냈다. 그저 그런 청소년 드라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드림하이>가 시청률 17%를 기록한 것에 이어 주연 배우들이 약하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방송사 편성조차 어려웠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2013년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특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성공은 초능력과 법정 드라마라는 낯선 소재를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배우들도 그에게 고마워할 거다. <드림하이>를 통해 연기자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수지와 김수현은 약속이나 한 듯 영화계로 진출했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이종석과 이보영은 톱스타의 자리를 공고히 다졌으니까. 불안한 것은 아직 선보인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소속사인 싸이더스HQ의 발표에 따르면 차기작은 사회부 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궁금한 것은 주연 배우다. 박혜련작가는 신데렐라를 발굴할까, 아니면 ‘눈부신 캐스팅’의 힘을 입을까?

김은희 | <싸인>, <유령>, <쓰리 데이즈>
김은희는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장르극’을 확고하게 파고드는 거의 유일한 작가다. 장르적인 실험을 다양하게 주도하는 김은희 작가의 작품은 국내 드라마보다는 미드의 문법과 닮았다. 메디컬 드라마에 수사극과 스릴러적 요소를 결합한 <싸인>, 사이버 수사극이라는 장르를 최초로 시도한 <유령>, 그리고 대통령이 사라진 3일간을 추적하는 최근작 <쓰리 데이즈>까지. 국내 현실에 맞는 상황을 기반으로 세운 탄탄한 설정 위에서 미스터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식이다. 첫 작품인 <위기일발 풍년빌라> 이후 선보인 <싸인>은 남편인 장항준 감독과의 공동집필 작품이다. 박신양이라는 톱스타를 캐스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힘이 컸다. 하지만 그 이후 보여준 <유령>은 그녀가 홀로서도 우뚝 설 수 있는 작가임을 입증했다. 놀라운 흡입력을 보이는 <쓰리 데이즈>는 방송 단 2회 만에 진범을 드러냈다. 이 대범한 전개를 작가가 어떤 식으로 톱니바퀴를 맞춰갈지, 믿고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 꽤 즐겁다.

하명희 |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둘만 사랑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이 순진한 명제에 정면으로 돌을 던진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는 결혼을 앞둔 연인이 ‘두 사람’ 이외의 문제로 겪게 되는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얼마 전 종영한 <따뜻한 말 한마디>는 불륜에 빠진 남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세대와 무게는 다를지언정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은 같다. 두 작품을 쓴 하명희 작가는 ‘결혼 전문가’라 할 만하다.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랑과 전쟁>의 작가로 활약했으니까. 뒤틀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 막장 같은 상황조차 ‘이해는 할 수 있도록’ 그려내는 작가의 저력은 이런 경험에서 비롯됐다. 하명희의 또 다른 강점은 정제된 대사다. 사위의 불륜을 알게 된 엄마(고두심)가 “불륜은 상대방의 영혼을 죽이는 거야”라고 말하고, 불륜이 끝나는 순간 사과하는 남자(이상우)에게 여자(한혜진)가 “미안하다는 말은 한쪽이 잘못했을 때나 하는 말이에요”라고 받아치는 것처럼. 직접적이지도,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도 않는 대사들이 켜켜이 쌓여 드라마를 만든다. 결혼이라는 한 가지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낼 것 같은 작가가 바로 하명희다.

박경수 | <추적자>, <황금의 제국>
가볍고 트렌디한 드라마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금도 여전히 선 굵은 작품을 써 내려가는 작가들이 있다. <선덕여왕>과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자이언트>, >대조영>에 이어 <기황후>를 집필 중인 부부작가 장영철과 정경순 콤비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박경수가 있다. 우리가 그의 이름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단독집필한 2012년 <추적자> 이후지만 그는 송지나와 함께 ‘김종학 사단’으로 불리며, <카이스트>와 <태왕사신기> 등에 참여한 베테랑 작가다. 박경수 작가의 극은 문학적이다. 배경과 인물의 설정은 더할 수 없이 촘촘하고, 대사는 묵직하며, 또렷한 선악 구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서로 상충될 수 있는지,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바닥은 어디까지인지를 진중하게 묻는다. 스릴러적 요소가 강한 <추적자>와 달리 그 ‘욕망’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황금의 제국>은 한층 특이한 드라마였다. 세 명의 주인공인 장태주(고수), 최서윤(이요원), 최민재(손현주)는 모두 악역에 가까웠고, 서로 독설을 내뱉으며 두뇌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드라마의 절반은 차지했다. <황금의 제국>의 시청률은 10%의 벽을 몇 번 넘지 못했지만 충성도 높은 팬층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의 다음 작품은 그가 자신의 장기와 대중성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가는지 확인하는 기회가 될 거다.

이경희 | <꼭지>, <미안하다 사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남자>, <참 좋은 시절>
치열한 격정 멜로와 휴먼 드라마. 이경희 작가처럼 성격이 또렷하게 다른 두 장르를 양쪽 모두 능숙하게 풀어내며, 시청률까지 보장하는 작가는 드물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죽일 놈의 사랑>, 최근작인 <세상에서 가장 착한 남자>는 상처 입은 남자의 맹목적인 사랑에 관한 드라마였다. 그들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현재 6회까지 방영한 <참 좋은 시절>은 작가의 또다른 장기인 휴먼 드라마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삼형제의 이야기를 그린 >꼭지>, 유사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상두야 학교 가자>, 에이즈에 감염된 소녀를 통해 관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그린 <고맙습니다>의 계보를 잇는 셈이다. >참 좋은 시절>은 언젠가부터 ‘황금 시간대’로 등극한 KBS2 주말 드라마의 자리에 안착했다. 시청률 역시 30% 주변을 맴돌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리고 있는 지금, 그는 다시 주말의 안방극장에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아닌, 따뜻한 시간을 돌려줄 수 있을까?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명불허전 작가들
홍자매(홍정은, 홍미란) 예능작가 출신 작가의 원조격인 홍자매의 작품은 출연 배우와 대본이 들어맞을 때 최고의 시너지를 얻는다. 다른 이가 연기하는 <환상의 커플>의 안나조(한예슬)나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차승원)과 구애정(공효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작인 <주군의 태양>은 성공적으로 종영했지만, 국내에서 시청률 한 자릿수를 기록한 <미남이시네요>와 <빅>처럼 작품에 기복이 있다는 것이 홍자매의 불안 요소다. 현재 차기작은 정해지지 않았다.
노희경 노희경 작가의 작품성에 대해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지만 방점을 대중성에 맞출 때면 상황은 조금 달라지곤 했다. 현빈, 송혜교가 출연한 <그들이 사는 세상>의 방영 당시 시청률은 5~6%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종영 이후에도 여운을 남기는 작품을 그린다는 것이 노희경 작가의 가장 큰 힘이다. 리메이크작이긴 하지만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2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대중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이 희석된 상태. 최근 노희경 작가는 <빠담빠담>에서 만난 김규태 PD와 함께 직접 제작사를 차렸다. 김수현 작가가 거대 제작사인 삼화프로덕션의 이사로 있긴 하지만, 작가가 직접 회사를 차린 것은 최초다. 첫 작품은 올 하반기 방영을 목표로 작업 중인 <괜찮아, 사랑이야>. 주연으로는 조인성과 공효진이 캐스팅 물망에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