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투영하는 드라마. 그래서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5편에서 삶의 지혜를 찾았다. 이 얼마나 쉬운 배움의 길인가!

1. [닥터진]
줄거리 안동 김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1860년대의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인 진혁(송승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19세기 조선의 한복판에 떨어지게 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안동 김씨 세력에게 아첨해오던 이하응(이범수)과 만나며 역사의 변화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교훈 자신을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아버지 이하응에게 후에 고종이 되는 어린 명복은 “군왕이 되면 좋은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이하응은 “군왕이 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군왕이 되어야지”라고 말한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역사적 역할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백성을 위한 정치와, 올바른 지도자 상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보면 <닥터진>은 지난해 높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와도 닮았다. 진혁은 환자들의 환부를 드러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칼을 들었고, 이하응은 권력을 쥐어 이 썩어빠진 나라를 엎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여기에 정략혼인을 취소하고 의술을 배우며 능동적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영래 아씨(박민영)와 민란을 주동하는 그녀의 오빠 홍영휘(진이한)까지 가세하며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지 않고, 능동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유리천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각자 다른 출발선, 그리고 학벌, 지연, 성별, 외모 등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사회의 기준들로부터 능동적으로 싸워야 한다. 역사를 바꾸기에는 미미하겠지만, 좀 더 행복하게 살 수는 있을 거다.

명대사 진혁 “토막촌 사람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그런 거창한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모른 척할 수 없다.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나는 이 아픔을 치료해야 한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21세기에는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하던 진혁은 19세기 조선의 열악한 환경에서 오히려 의사로서 자신의 소명을 자각한다.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소외된,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2. [추적자]
줄거리 뺑소니 교통사고로 딸 수정(이혜인)을 잃은 형사 홍석(손현주)은 차량의 주인이 인기스타인 PK준(이용우)의 것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문제는 PK준과 함께 차량에 타고 있던 서지수(김성령)가 한국 굴지의 재벌 서 회장(박근형)의 딸이자 차기 대권주자인 강동윤(김상중)의 부인이라는 점이다. 이 막강한 정재계의 권력 앞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번번이 차단된다.

교훈 권력의 유착, 재벌과 정치세력 앞에 무능한 검찰과 언론, 사건의 조작과 은폐, 그리고 수많은 음모 등 사회의 병폐를 꼬집던 드라마는 기존에도 많았지만, <추적자>가 기존의 드라마와 명확히 다른 지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던져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추적자>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라는 진리다. 수정의 친구는 이미 돈에 매수된 자신의 아버지가 무서워 ‘수정이 원조교제를 했다’고 위증하고, 홍석의 의사 친구 철민은 병원 빚을 갚을 수 있는 거액을 제시받자 회복 중에 있던 수정의 몸에 약물을 투여해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영원히 김상중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수행보좌관 신혜라(장신영)조차 “저에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라며 반전을 선사할 때, <추적자>에서 거짓말에 농락당하지 않은 유일한 등장인물은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내 약속은 남이 믿게 하고, 남의 약속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서 회장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처절하게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간다워 보이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백홍석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죄 지은 자의 눈동자에서나 보이는 불안함이나 흔들림이 없다. ‘수정이 아빠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올곧게, 자신이 믿는 바를 따라 있는 힘껏 바위에 부딪히고 있는 홍석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추적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답게 사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명대사 동윤 “네가 포기했으면, 네가 포기를 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어!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왜 멈추지 않는 거야. 왜!” 동윤의 자택에 감금당한 홍석보다 더욱 불안하고 신경증적으로 보였던 건 바로 동윤이었다. 가장 나약한 자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이보다 강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3. [각시탈]
줄거리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만주에서 목숨을 잃고, 항일투사였던 형 이강산(신현준)이 모진 고문으로 바보가 되자 차라리 제국 경찰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리기로 결심한 이강토(주원). 일본인 사토 히로시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어머니와 형이 사살당하고, 바보가 된 줄 알았던 형이 일본의 앞잡이를 처단하는 영웅 각시탈임을 알게 되면서 강토는 2대 각시탈이 되기로 결심한다.

교훈 사토 히로시와 각시탈의 두 가지 삶을 살아가게 된 이강토, 강토의 친구이자 조선을 사랑하는 소학교 교사였지만 제국 경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슈운지(박기웅). 시대는 젊은 청춘들을 극단의 선택으로 몬다. 두 남자의 첫사랑이자 독립운동가 담사리의 딸인 목단(진세연)도 마찬가지다. 강토가 각시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각시탈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칠 기세면서도, 사토 히로시에게는 침을 뱉는다. 친구였던 슈운지가 제국 경찰의 옷을 입자 “넌 이제 그냥 왜놈일 뿐이야”라며 총을 겨누는 목단의 지나친 단호함은 슈운지를 더욱더 괴물로 만들며,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이강토를 괴롭힌다는 면에서 비극적이다. <각시탈>에서 국적을 떠나 ‘개인’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주변인물들이다. 총독부 경무국장이지만 조선인인 이강토에게도 균등한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 콘노 고지가 있는가 하면,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의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채홍주(한채아)와 돈을 받고 목단을 밀고한 계순, 그리고 수많은 친일파가 존재한다. 기묘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일부는 가해자였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일본은 분명 악했지만, 극단적인 반일감정만 내세우기엔 우리도 청산하지 않은 역사적 찌꺼기가 많다. 그리고 그 미처 치우지 못한 ‘찌꺼기’들이 각시탈과 목단 같은 이들을 결국 역사적으로 소외시키고 말았다는 슬픈 진실을, 새삼 <각시탈>을 보면서 깨닫는다.

명대사 슈운지 “강토야, 나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아. 무서워.” 순하디 순했던 슈운지가 사랑하는 여자를 채찍질 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될줄 누가 알았을까. 형을 죽인 각시탈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목단에 대한 원망이 뒤섞이며 점차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슈운지. 제국순사로 충실한 사토 히로시의 삶을 살던 강토가 강산에게 “형, 나도 이렇게 살기 싫어. 그런데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모르겠어”라고 술에 취해 울며 고백하던 드라마 초반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시청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4. [아이두 아이두]
줄거리 극강의 커리어우먼 황지안(김선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다. 연애는커녕 아버지의 칠순잔치에도 얼굴을 비치지 못하고, 건강마저 적신호가와 조기폐경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그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신입사원 박태강(이장우)과 실수로 보낸 하룻밤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며 지안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교훈 비록 직원들에게 ‘메두사’라고 불리는 지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인간적인 매력이나 사랑
스러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안은 솔직하고 정당하다. 그녀의 솔직함은 독신주의자였던 맞선남 조은성(박건형)의 마음을 붙잡고, 그녀의 정정당당함은 라이벌 염나라(임수향)를 선의의 경쟁자로 둔갑시킨다. 물론 <아이두 아이두>는 결국 ‘일만 알던 삶에서 눈을 돌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다. 늦은 밤 식탁에 홀로 앉아 “김치 없이 라면을 어떻게 먹어”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지안의 외로움을 직시한다.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리는 아버지를 보며 “예전에는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땐 뭘로 그렇게 웃겨드렸는지… 아무리 상을 받고 승진을 하고, 해외여행에 별 짓을 다해도 점점 힘들어지더라구요”라고 말하는 지안의 모습은 그녀가 고삐를 늦출 시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지안은 싱글맘이 되기를 선택했지만, 이 드라마가 모성의 위대함을 논하며 뻔한 봉합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나와 내 일만 알고 살아가는 삶의 궁핍함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명대사 태강 “이 시간에 혼자 술 먹고 있는 네가 진짜 루저 아닐까?” 취업을 하지 않은 태강에게 지안이 “루저처럼 살지 말고 분노를 에너지로 승화시키라”고 충고하자 태강이 날린 역공. 사회적 성공을 거둔 워커홀릭은 쉽게 그렇지 않은 이들의 인생을 비난한다. 자기네 삶의 기준이 오로지 ‘성공’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승자일까?

5. [로맨스가 필요해 2012]
줄거리 엉뚱하고 귀여운 매력을 가진 음악감독 주열매(정유미), 과감하고 섹시한 구두 디자이너 서재경(김지우), 그리고 소심한 것 같지만 은근히 할 말은 다하는 회사원 우지희(강예솔). 서른셋의 동갑내기 여자 세 명이 수다 떨듯이 그들의 연애와 사는 방식에 대해 털어놓는다.

교훈 “나는 그냥 ‘미안하다’는 그 말 한마디면 됐는데”,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등 여자라면 누구나 폭풍공감할 만한 열매의 독백이 난무하는 <로맨스가 필요해>.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환상에 가깝다. 어릴 때 부터 같은 집의 위아래 층에 함께 살았고, 고등학생때부터 지금까지 다섯 번을 넘게 헤어졌다 붙었다 하며 관계를 이어온 열매와 석현(이진욱)의 관계는 순정만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꿉친구 판타지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능력 있고 훈훈한 시나리오 작가 석현 하나로도 모자라 열매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카페주인 신지훈(김지석)도 있다.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쇼윈도 커플인 서재경의 결혼 생활과 남편의 바람에 맞바람으로 대처하는 쿨한 그녀의 태도도 이례적이긴 마찬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가 필요해>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여주인공들 덕이다. “지금까지 키스한 남자가 10명 이상이면 문란한 거고 이하면 정숙한 거야? 서른세 살에? 넌 지금까지 몇 명이랑 해봤는데?” 같은 수다를 떠는 세 여자들. <로맨스가 필요해>는 로맨스만큼이나 여자들의 우정에 비중을 할애한다. 남편의 바람을 묵과하는 재경을 ‘그게 말이 되냐’고 몰아붙이던 열매가 곧 자기 감정에 앞서 친구를 비난했음을 깨닫고 미안해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래서 로맨스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드라마를 보며 깨닫는 진리는 바로 이거다. “친구가 필요해!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해도 말이 통하는 친구!”

명대사 열매 “나는 이제 부끄러워하는 것이 부끄러운 나이다.” 아직은 젊지만 어리다고는 할 수 없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자가 세상을 대하는 가장 핵심적인 태도를 나타낸 독백 아닐까? 연애, 인간관계, 일 등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어느 정도 쿨하고 능숙하게 넘길 수 있지만 능청스럽기 위해 아직은 스스로 ‘괜찮다’고 주문을 걸어야 하는 이 어정쩡한 나이를 견디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