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학계의 가장 큰 이슈는 새로운 문학 잡지의 탄생이었다. 소설가의, 소설가에 의한 소설 잡지인 <악스트>. 그리고 미스터리 장르를 전문적으로 탐하는 <미스테리아>가 그것이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 모으고 있는 두 잡지의 편집장은 모두 두 번째 호 마감을 하고 있었다.

소설을 위한, 소설가를 위한 잡지 <악스트>, 2천9백원

<악스트> | 백다흠 편집장
  
‘소설을 위한, 소설가에 의한’ 잡지라고 선언했다. 소설가 중 누가 주도적으로 참여 중인가?
소설가, 즉 현재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악스트>를 채운다.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게끔 하고 싶다. 발행인은 은행나무 출판사 대표이며, 은행나무는 인쇄와 유통, 홍보를 주로 담당한다.
  
최근 소설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소설의 수준에 대한 논란, 표절 시비. <악스트>의 창간은 마치 우리에게서 소설 읽는 재미를 빼앗지 말라는 외침처럼 들렸다. 어떤 심정으로 창간을 결심했나? 
소설 그 자체, ‘소설적인 것’에 집중하고자 했다. 나는 촌스럽게도 지금껏 소설, 그 본연이 즐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소설 시장이 빠르게 가라앉는 이 상황에서 소설 편집자로서 해야 할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대놓고 소설만 이야기하는 잡지를 만들면 어떨까? 하고 고민했다. 문학의 거대담론에 기대지 말고 소설 그 본연에 집중하고 싶었다. 
  
최초의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이었나?
잡지를 창간하다 보면 여러 아이디어가 테이블에서 오고 간다. 기본적인 굵은 뼈대는 나와 발행인이 외부적인 유통과 콘셉트 등을 정했고, 잡지 내부적인 콘셉트는 형인 백가흠 소설가와 같이 의견을 나눴다. 

  
<악스트>의 가장 큰 지지자는 누구였나? 
준비 과정에서는 다들 반신반의했던 것 같다. 안팎에서 다들 말렸다. ‘이게 되겠어?’ ‘돈 안 되는 문학잡지를 왜 만들어?’ 등등. 하지만 나는, 그냥 해보는 게 재미있을 거 같았다. 과정도 과정이지만 머릿속에서는 기존 문학잡지에서 동떨어진 ‘커머셜한 이미지’와 문학 텍스트의 조합이 그려지고 있었으니까. 많은 독자가 좋아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와 같은,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동참할 몇몇의 소수 독자에게는 축하를 받겠지 싶었다. 그 몇몇의 동지가 아마 가장 큰 지지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계의 문제를 영화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학계가 없어도 성공한다는 비유였는데, 독자로서 신선했다.

소설과 영화를 단편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는 분명 궤를 같이하는 건 있다. 콘텐츠 소비자들의 의중과 취향이 다양성과 성장을 낳는다는 것. 한국영화판은 관객에 의해 파이가 커졌다.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판이 커진 게 아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학계가 관여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독자들에 의해 시장이 형성되고 크기가 커지는 것이 건너편 이웃에게 제일 부러운 점이다.
  
첫 호에서 ‘문학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와 반성이 느껴졌다. ‘문학 권력’은 확실히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도 그 권력의 혜택을 많이 보지 않았을까 싶은데, 왜 이것을 바꾸려고 하나? 
굉장히 까다로운 질문이자 긍정적인 방향에서 논의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손’ 같은 느낌이 있다. 그 손으로 붙잡고 그 손으로 밀어 넘어뜨린다. 문학은 원론적으로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 문학은 즐거움과 교양과 인문적인 효과를 누리는 데 목표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문학집단이 형성되고, 그 집단이 지향하는 문학성이라는 게 존재하게 된 거 같다. 문학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 부분 하나가 전체라고 우기는 것일 테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문학을 소비하는 독자에게 서비스하는 것에 관심을 두자는 것이다. 다양한 소설을 해석의 여지 없이 보여주자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자 지향점이다.
  
지금 소설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인가? 
아마 원고마감이 아닐까. 하하. 앞서 말했듯이 소설 시장이 위축되어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건 소설책을 만드는 편집자건 소설을 쓰는 소설가건 공통된 두려움일 것이다.  

디자인은 매우 간결하다. 어떤 의도였나? 
간결한 디자인을 선호한다. 또 기존 문학잡지가 가지고 있는 단행본의 물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좀 더 심플하게 간 게 아닐까 싶다.    

‘소설리스트’처럼 웹진을 고려하지는 않았나?
웹진으로 글을 읽는 것보다 종이를 만지고 넘기면서 읽는 맛이 아직까지는 더 좋다. 책의 물성을 좋아한다. 아날로그적인 생각일 수는 있겠지만 당장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아마 독자들은 <악스트>를 통해 여기 실린 ‘좋은 소설’을 읽고 싶거나, 소설가의 인터뷰를 보고 싶거나, 미처 알지 못한 좋은 소설을 추천받고 싶을 것이다. 독자의 욕구를 충족하고 있다고 자평하나? 

충분히 충족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충족을 위해 다가갈 뿐이다. 소설은 매우 다양하다. 취향 또한 다분하다. 다분한 그 취향을 하나로 모을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산만하고 불균형적인 부분에서의 에디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악스트>는 아마 높낮이의 진폭이 큰 소설을 소개하고 추천할 것이다. 그게 내 목표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소설’의 조건은? 
소설이 건네는 즐거움을 다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작품. 그게 좋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글과 내용이 다소 많다는 느낌도 들었다. 글이 많으면 종이와 인쇄비가 더 필요하다. 현재 광고도 없다. 게다가 가격은 2천9백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한 사람의 잡지인으로 <악스트>의 수익이 걱정된다.  
수익 면에서는 나도 머리가 아프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 사람들과 충분히 논의하고 있다. 어렵다.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가격은 좋다는 사람이 70퍼센트. 뭔가 수상쩍다는 사람 30퍼센트였다.   

첫 호가 화제가 되었고, 5천 부 이상 팔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5천 부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첫 호의 반응에 만족하나?  
기대를 넘어선 건 분명하다. 많은 독자에게 감사하다. 얼마 전 할머니 한 분에게 전화를 받았다. 삼십 년 넘게 문학 독자인데, <악스트> 잘 봤다고 하더라. 내심 고마웠다. 하지만 전화 말미에 글자 크기가 너무 작다고 조금만 키워달라고 하셨다. 나이 든 사람도 생각해달라고… 따끔하더라. 고민에 빠졌다. 

  
새로운 소설가를 발굴할 생각도 있나?  
아직까지는 공모전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새로운 소설가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소설을 찾는 데는 열심이다. 

  
왜 우리는 여전히 소설을 읽어야 할까? 
소설이 세상을 읽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도 중요하지만 비껴 서 있는 세상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당위는 없다. 하지만 소설은 세상을 좀 더 다채롭게 보는 시선을 준다. 그게 필요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 소설을 읽는 재미를 얼마간 잊고 지내던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세 권의 소설이 있다면? 
이 질문의 답은 <악스트> 2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