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누군가가 깊은 우울에 잠겨 있다면 세 가지 처방을 내리겠다.

읽을수록 푹 빠지게 되는 라틴 문학의 매력.

소중한 누군가가 깊은 우울에 잠겨 있다면 세 가지 처방을 내리겠다. 첫째, 늘 예기치 않은 매혹적인 순간을 선사하는 긴 여행. 둘째, 갑각류 알레르기만 아니라면 슬픔이고 뭐고 당장 집착할 수밖에 없는 꽃게찜. 그리고 라틴 문학이다.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는 공간에서 솔직한 욕망을 풀어놓는 시원함. 비록 현실은 비루할지언정 인생이 눈부시지 않을 이유가 있냐고 되묻곤 하는 이 책을 읽으면 우울한 기분이 훨씬 나아질 테니까. 희극이든 비극이든 경쾌하고 흥겨운 무드가 깔려 있고, 삶의 궁극적인 열망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걸 망설이지 않으며,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환상적인 설정과 묘사가 라틴 문학의 특징이다. 그래서 딱히 허기진 인생이 아니더라도, 이런 추위 속에 라틴 문학을 읽는 건 정신적 보온 효과가 있다. 차가운 러시아 문학과 신경질적인 영미 문학, 심각한 우리 문학 사이에 라틴 문학을 꽂아놓으면 거짓말처럼 책장이 후끈해져서, 집에 아무도 없는 동안 자이브라도 출 것 같다.

라틴 문학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면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으로 살짝 시동을 걸어보는 게 좋겠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일포스티노>는 외국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에 올랐는데,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던 위대한 시인 네루다를 인간적으로 다룬 이 소설은 실제 인물과 실제 에피소드를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감흥이 남다르다. 쿠데타를 비롯한 남미의 암울한 상황과 네루다의 죽음을 조명하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주는 것 역시 라틴의 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원제는 ‘초콜릿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간’이라는 의미다. 가문의 전통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를 언니에게 빼앗긴 여자와 한 집에 살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보는 사이, 도저히 감출려야 감출 수 없는 감정의 결정적 순간이 책 곳곳에서 펼쳐지며 성과 사랑, 음식이 어우러진다. 요리법과 미각, 후각, 청각 등 오감을 곤두세우는 묘사는 지금은 더 이상 특별하진 않지만 이런‘ 요리 문학’은 여성 문학의 중요한 갈래였다. 라틴 문학은 사랑과 개인의 욕망을 중시하고, 노골적으로 통속적인 관계 설정을 하는 경우가 많아 접근하기가 어렵진 않다. 하지만 그 통속성에는 늘 반전이 있다는 걸 알아두길.

<위험한 책>은 코트 주머니에도 들어갈 만큼 얇고 가벼운 양장본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번쯤 선물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이다. 저자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는‘ 책이 운명을 바꾼다’는 간단한 명제를 책을 둘러싼 광폭하고 아름다운 대서사시로 만들어놓았다. 결말에선 세상의 끝에 선 것처럼 황량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순전히 마지막 장면을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서, 여전히 이 책이 영화화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침대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열고>와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는 라틴 현대 작가들의 단편집이다. 전자는‘ 에로스’라는 면에서, 후자는‘ 여성주의’라는 주제로 책을 엮었다. 라틴 작가들의 현재와 라틴 국가의 현재를 볼 수 있는 책이다.

이제 어느 정도 라틴 문학의 매력에 동화되었다면 라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차례로 만날 때다. 세상을 떠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읽어야 하고, 생존하는 라틴 문학의 대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놓칠 수는 없다. 노벨상을 수상한 <백년 동안의 고독>의 거대한 두께가 부담되고,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이미 읽었다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권한다. 150페이지 가량의 얇은 책이지만 신화적이면서 논리적인 마르케스의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고,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고 작품이라고 공공연히 말한 작품이다. 기자였던 마르케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지난해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도 번역 출간된 작품이 많다. <새엄마 찬양>과 <판텔레온과 특별봉사대>는 도발적인 상상력과 음험한 판타지, 유머가 조화된 작품이다. 최근 최신작 <나쁜 소녀의 짓궂음>이 출간되었는데, 이번에는 세계 곳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나쁜 소녀가 등장한다.

끝으로 또 하나의 위대한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소개한다. 백과사전의 형식을 빌려, 히틀러가 사랑한 극우 작가 30명의 삶과 작품을 해설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짐짓 소설이 아닌 체해서 더 흥미로운 소설이 되었고, 단 두 문단(그중 한 문단은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으로 이루어진 <칠레의 밤>은 한정된 형식을 가뿐히 뛰어넘는 천재 이야깃꾼으로서의 볼라뇨를 만날 수 있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단 한 권만 읽어도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이 많다는 것에 행복과 감사를 느끼게 해주는 드문 작가다. 문단의 권위를 부정하고, 세상에 빈정대길 좋아했던, 블랙 코미디를 즐기며 뛰어난 작품으로 소통해온 볼라뇨는 젊은 라틴 작가들의 우상이었다. 라틴 문학 독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식지 않을 불을 당겨 놓고, 볼라뇨는 2003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