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밑 빠진 독은 아무리 떠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로 끝나는 책은 없다.

서점의 여행 책 코너에 가면 심통이 난다. 수북하게 쌓인 여행 책을 뒤적이며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여행을 하지. 한동안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긴 여행을 떠나는 책이 유행처럼 나왔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렇게 용감하게 여행을 하지. 사람마다 인생에서 여행하는 몫이 정해져 있다면, 나도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들 거라고 믿지만 여행이라는 건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떠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로 끝나는 여행 책은, 없다.

본격 휴가 시즌을 앞둔 분주한 서가에서 골라낸 책들은 새로운 여행 트렌드를 보여주기도 하고, 오랜 여행의 노하우를 보여주기도 하며, 인생을 뒤바꾼 여행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예술가의 여행>은 정통 미술사가 요아힘 레스가 추적한 화가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미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앙드레 지드가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 여행에 매료되었다는 걸 안다. 작가들이 여행을 떠나 글을 쓰는 사이에 화가들이라고 아틀리에에만 처박혀 있었을 리 없다. 화가들은 떠나고 그림을 그렸다. 이 책은 15~20세기 초까지 활동한 13인의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시대가 달랐으므로 이들이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모두 달랐다. 루벤스처럼 외교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술탄의 궁전에 초대받은 젠틸레 벨리니도 있었다. 윌리엄 호지스는 제임스 쿡과 함께 태평양을 탐험하는 영광을 누린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남 여행은 아름답고 서글프다. 화가들의 여행의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 그 다음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450엔의 행복, 도쿄 목욕탕 탐방기>는 개운하다. 최근 여행 책의 최고 트렌드 중 하나인 ‘한 우물만 파기’ 테마에서 작가는 목욕탕을 파기로 한 모양이다. 그것도 유후인의 고급 료칸이 아닌 대도시 도쿄의 ‘공중목욕탕’만 말이다. 이 공중목욕탕의 지정 요금이 바로 450엔이다. 최신부터 구식까지 푹 담그며 ‘모두 벗을 준비 되었습니까?’라고 외치는 목욕탕 여행기는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에서 오는 친근함이 있다. 우리가 목욕탕에서 식혜나 요구르트를 마시는 동안 그들은 ‘라무네’라는 밍밍한 탄산 음료를 먹고, 파란 바가지 대신 노란 바가지를 쓴다. 참을 수 없이 배고파지는, 그래서 공복엔 절대 금지인 <열대 식당>은 층층이 덮인 여행의 관록에서 음식만을 덜어냈다. 단 한 번 맛을 본 음식에 대한 호들갑이 아니라 오래, 반복해서 여행하며 곱씹은 그곳의 맛이 뜨겁게 담겼다. 태국, 베트남, 발리, 미얀마의 열대 식당에서 만난 소박한 한 그릇은 때로는 여행자의 마음을 위무하고 다시 걸을 수 있는 동력을 만든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과 <나의 작은 브루클린>,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는 지도의 점을 파고든다. 대도시 대신 덜 알려진 작은 곳을 탐하거나 새롭게 자리 잡은 낯선 동네에서 주민일기처럼 써 내려가는 것도 여행 책의 트렌드 중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가 몰리는 도시답게 끝없이 낯선 얼굴이 들이닥치는 브루클린에서도 매일 만나는 얼굴들이 있다. 브루클린 주민이 쓴 <브루클린 다이어리>를 보며 브루클린에 대해 환상을 가진 작가는, 이곳에 살면서 그 환상이 조금도 깨지지 않고 실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렛에서 패션 아이템을 건져 올리는 대신 집 근처에서 열리는 그린 마켓이나 초여름과 함께 시작하는 윌리엄스버그 마켓 ‘스모거스버그’에 가는 변화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는 남자들의 매물도 여행기다. 그 작은 섬의 이야기는 책 한 권을 뿌듯하게 채운다. 프랑스에서 6년째거주 중인 또 다른 작가는 레보 드 프로방스와 발랑솔, 보리마을, 카시, 에즈, 라 시오타 등 작은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안시나 망통처럼 작은 도시도 있고, 조용한 어촌 마을 빌프랑쉬 쉬르 미르를 꺼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여행 책이 해주어야 할 새로운 일은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곳을 선물처럼 내미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책의 행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어쩌면, 혹시나, 만약에 그곳을 여행하는 나를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