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편을 들자니 후배에게 미안하고, 후배 편을 들자니 상사에게 미운털이 박힐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중간관리자의 입장이다. 상사 편을 들자니 선배가 무섭고, 선배 편을 들자니 인사고과가 무섭고, 가운데에 낀 후배도 있다. 상사와 선배, 상사와 후배 사이에 껴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서바이벌 커리어 응급 처치법.

프리랜서 생활을 2년 남짓 만끽하다 잡지사에 입사한 지 딱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1월호 마감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데스크는 “내일 기획회의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피로에 지친 후배들은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내 뒤로 모여들었다. “선배, 부장님께 회의 하루만 미루자고 해주시면 안 돼요?” 마감의 피로에 지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고, 몇 시간 만에 기획안을 준비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데스크에게 “부장님, 하루만 미뤄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입사 열흘 만에 상사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은 둘째 이유였다. ‘마감 후 기획회의’라는 데스크의 오래된 원칙을 부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0년 차 기자가 되다 보니 기획회의를 서두르는 데스크의 마음도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가 됐다. 후배들은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섰다.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후배들은 모를 것이다. 선배가 지각하는 후배들을 제대로 혼내지 않고, 후배들에게 좌지우지되면 ‘조직 관리 못하는 중간관리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을. 마음씨 좋은 선배가 상사에게 능력 없는 중간관리자로 보이기 쉽다는 것을. 조직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상사와 후배 사이에 낀 나는 ‘아, 이제부터 어쩐다? 예전엔 어떻게 극복했더라?’라고, 옛날을 회상하기에 이르렀다. 상사와 후배 사이에 낀 것이 나만은 아니다. 어느 회사건 중간관리자들은 저마다 비슷한 고민을 한다. 10년째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선배 A는 “선배는 후배와 비슷한 위치에서 상사의 마음을 아는 존재인 것 같아. 상사는 관리자지만 선배는 실무자잖아. 실무자는 일하는 과정을 다 아니까 후배를 지적하는 게 쉽지는 않지. 후배를 이해하는 면이 커지니까. 그런데 일이라는 게 결국 결과를 내는 것이고, 상사는 굉장히 결과지향적이거든. 결과가 흡족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상사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사와 후배 사이에 최대한 오해가 적도록 조정하는 게 결국 중간관리자의 역할인 것 같아. 은근히 아랫사람을 잘 못 보는 상사가 많아. 편견과 오해가 많은 거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실 상사의 말을 아랫사람에게 전달할 때가 가장 어렵지. 가끔 상사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가 있지만, 중간관리자가 후배들에게 상사를 깎아 내리면 안 돼”라고 덧붙였다.

사실 ‘낀’ 처지에 있는 것은 중간관리자만은 아니다. 상사와 선배 사이에 낀 후배는 더 난처하다. 상사가 시킨 일을 선배가 못마땅해하는 경우, 혹은 선배가 시킨 일의 방향을 상사가 180도 뒤집어놓는 경우, 후배는 입장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대개 선배와 상사 사이에서 몇 번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모든 일의 끝이 상사의 뜻대로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고는 후배가 선배를 은근히 무시하게 되는 것이 이 갈등의 결말이다. 물론 이때에는 후배와 선배 사이도 금이 가 있다. 팀워크는 기대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후배는 억울할 것이다. ‘아, 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상사와 선배 사이에 낀 후배의 서바이벌 매뉴얼

직장생활 매뉴얼을 Q&A로 풀어주는 백과사전식 저서 <눈치코치 직장매너>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과장님이랑 대리님이랑 싸웠는데 중간에서 너무 피곤해요.” 이 얼마나 ‘끼어 있는’ 입장을 잘 표현한 질문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해결법은 이랬다. “과장과 대리가 싸운 후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있을 때 섣불리 화해시키는 것은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상사들끼리도 위계질서가 있으니 대리에게는 먼저 과장의 체면을 살려주도록, 과장에게는 상사로서 포용성을 보여주도록 ‘은근히’ 부추기는 것이 좋다. 화해를 시키려고 달래면서 그 상대방에 대한 험담이 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둘이 화해하고 지난 얘기를 하다가 오히려 당신이 오해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질문도 있다. “과장님이 시킨 일을 대리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여기에 대한 답은 “과장님께 그 사정을 말씀드리는 건 바로 과장과 대리의 싸움을 붙이는 셈이 될 수도 있으니 일단 신중해야 한다. 제일 좋은 건 대리님에게 직접 그 자리에서 ‘그럼 과장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대리가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라고 한다면, 그대로 과장에게 말씀드려도 된다. 단, 과장님께 얘기할 때 최소한 하루 이틀은 뜸을 들이고 나서 얘기하는 것이 좋다. 대리님이 대신 말씀드리겠다고 했다는 얘기도 반드시 덧붙여야 확실한 의사 전달이 된다”이다. 명쾌한 해결법이 아닐 수 없다.

<여자생활백서> <여자공감>의 저자인 안은영 씨의 해결법은 ‘기브앤테이크의 원칙을 정하라’는 것이다. “중간관리자는 과도한 정의감을 실현하려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윗사람에게는 ‘너는 왜 조직관리를 못하니?’라는 핀잔을 듣고, 아랫사람에게는 ‘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주지 않느냐’는 원망을 듣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어느 한쪽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스스로를 두둔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후배들의 의견을 상사에게 어필할때는 ‘8시 출근을 9시로 옮기는 대신 야근 수당을 없애겠다’라는 조건을 내건다든지, 상사의 무리한 조건을 수락할 때는 ‘대신 3명의 프리랜서를 붙여주세요’라고 대안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안은영 씨는 중간관리자가 ‘온도 조절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사와 후배 쌍방 간의 이야기를 전달할 때, 너무 뜨거운 얘기는 식혀서, 너무 차가운 얘기는 데워서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이에 자신의 조직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아주 사소한 갈등이 생길 때도 있다. 상사와 선배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면 점심시간에도 묘한 분위기가 형성될 때가 있으니까. 중국집에 가자는 상사와 백반집에 가자는 선배 사이에서 선뜻 답을 못하게 될 때도 있지 않나. 이에 대해 인생 매뉴얼 에세이 <건투를 빈다>의 저자이자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 대표는 “사소한 건 사소하게 대처하라”고 조언한다. “와이프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방황하는 남편의 고민과 비슷하지. 이때는 방법이 없어. 와이프 앞에서는 와이프를 두둔해주고, 시어머니 앞에서는 시어머니를 두둔해줘야지. 사소한 건 사소하게 대처하는 게 가장 좋아. 그냥 먹고 싶은 데로 가. 중국집 가고 싶으면 중국집에 한 표, 백반집 가고 싶으면 백반집에 한 표. 직장생활의 모든 일을 상하관계로만 나눌 수도 없으니까. 그것도 못 받아주면 그 상사는 진짜 못난이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데 일의 문제에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지지. 일단 어떤 일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후배편, 상사편이 어딨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해야지. 가끔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사와 어긋날 수도 있겠지. 그 일 때문에 얼굴을 붉히게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상사가 ‘쟤는 일 하나는 잘해‘, ’판단은 정확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유리한 거야. 길게 보자, 이거지. 그런데 어떤 일이 결정된 이후에는 달라. 그때는 후배들이 아무리 반발이 심해도 상사의 편에 서줘야 하는 게 중간관리자의 역할이야”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남자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무리를 짓고, 대장을 알아보고, 서열을 세워.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그 안에서 행동하니까 상사와 후배 사이에 끼거나 하는 일이 별로 생기질 않아. 그런데 여자들은 대장만 모시지, 선배는 편하게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오히려 더 피곤한 일이 생겨버리는 거야. 여자들 세계에서 예민한 정치가는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미움을 받게 되지”라고 말했다.

군대에서 배운 남자들의 처세 매뉴얼

출판사 편집자 A와 ‘남자들의 처세’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잡지사 못지않게 출판사도 여직원이 많은 조직이지만, 사내에서 남자 직원들을 이끌어주려는 남자 관리직이 많기 때문에 중간관리직 역시 대부분 남자. 몇 안 되는 여성 중간관리직인 A는 “남자들은 웬만해서는 여자 후배를 키우지 않아요. 그래도 저는 여자 후배를 키우려고 했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더라고요. 여자 후배들은 상사에게 불만도 많고, 섭섭해하는 게 많거든요. 그런데 남자 후배들은 달라요. 제 입에 혀처럼 굴면서 저에게 완전히 엎드려요. 의식적으로 여자 후배를 배려하려고 하는 저마저도 남자 후배가 더 편한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내 경우도 그랬다. 여초 현상이 두드러지는 잡지사에 근무한 터라 남자 후배를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어느 날 남자 후배가 생겼다. 그는 어찌나 넉살이 좋은지 내가 “지각 좀 하지 말아라.“ ”원고가 재미없다. 좀 더 신경 써라.“ ”데드라인 엄수해라” 등 어떤 타박을 해도 큰 소리로 “넵, 선배님!”이라고 복창을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마치 근위병을 수하에 둔 여왕이 되는 기분이었다. 술자리에서 물었다. “넌 그렇게 자연스럽게 비굴해지는 법을 어디서 배웠니?”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답했다. “선배. 남자들은 군대에서 다 배워요.”

군대에서 가장 첫 번째로 치는 게 서열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군대에 먼저 들어왔으면 상사, 그의 말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비합리적인 일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군대에서 남자들은 비굴해지는 법을 배우고, 약해지는 법을 배우고, 꼬리 내리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사회에서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윗사람에게 복종적이다. 그런데 헛똑똑이 여자들은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부하직원을 보며 ‘권력에 아부한다’고 비웃는다. 바로 그 권력에의 비웃음에서부터 팀워크의 분열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상사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부는 아닌데 말이다. 상사와 후배가 서로 이해한다면 그 사이에 낀 선배가 있을 리 없고, 더욱이 상사와 선배가 한마음이라면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후배는 없을 테다. 마지막으로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부장급 관리직인 노처녀 B가 한 말을 전하면서 ‘낀’직장인의 푸념을 마감하려고 한다. “생각해봐. 국장도 중간관리자야. 너의 상사도 알고 보면 중간관리자라고. 좀 잘해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