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모든 음식에 싫증이 나고 삼시세끼를 챙기는 것도 마냥 귀찮아질 때가 있다. 바로 그때 떠오른 당신의 음식은? 셰프와 미식가가 말하는 그 여름 음식의 맛.

1 파스타의 차가운 매력
여름 면 요리의 서정. 보통 냉면이나 국수에서 발현되는 그 산뜻한 감정을 나는 엉뚱하게도 파스타에서 찾는다. 따뜻한 파스타가 아니라 채소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한 푸릇푸릇한 냉파스타. 그런데 이 냉파스타라는 것이 돈 받고 팔기에는 좀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레시피인지라 제아무리 약아빠진 파스타집이라도 여간해선 팔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대개는 만들어 먹는다. 무더위와 순후한 바람이 갈마드는 이맘때가 적기다. 하릴없는 주말 오전이면 더 좋고. 어쨌든 냉면과 달리 지금이 아니면 딱히 먹을 구실 찾기가 쉽지 않은 음식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토요일 아침. 잠옷 차림 그대로 손만 씻고 주방으로 향한다. 물을 넉넉하게 부은 냄비에 소금을 조금 넣고 팔팔 끓인 뒤 파스타 면 중 가장 가늘다는 카펠리니 면을 한줌 넣는다. 엔젤스 헤어, 말 그대로 천사의 머리카락이라고도 불리는 이 낭창낭창한 면은 우리네 소면과도 비슷하다. 다만 소면과 달리 쉬 불지 않아 샐러드 고명으로 맞춤하다. 면이 익는 동안 껍질 벗긴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깍두기처럼 썰어놓고, 마트에서 산 어린잎채소를 한 봉지 뜯어 얼음물에 담가둔다. 카펠리니는 워낙 날씬해서 3분이면 금세 탱탱해진다. 익힌 면을 얼음물에 착착 헹군 뒤 물기를 털고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쯔유에 조물조물 버무려 그릇에 담는다. 그 위에 앞서 준비한 재료들을 욕심껏 올리고 간이 민숭민숭하면 케이퍼 몇 알을 곁들인다. 마지막으로 곱게 간 파르메산 치즈를 눈처럼 솔솔 뿌려주면 끝. 그릇을 랩으로 감싸 냉장고에 넣어둔 뒤 샤워를 하고 나와 설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탁탁 털며 다시 그 냉랭한 그릇을 꺼낼 때의 즐거움이란. 여름은 음식을 먹는 데도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계절이다. 냉파스타에는 그런 수고로움이 없어 좋다. 만드는 과정이 간단한 만큼 단시간에 함부로 먹어야 제 맛이다. 왱왱 돌아가는 선풍기 옆에 주저앉아 그릇째 들고 포크로 둘둘 말아 먹는다. 국수 가락처럼 야들한 면이 아삭한 채소의 찬 기운을 타고 식도를 훑을 때면 눈앞에 온갖 초록 것들이 아물거린다. 육류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싱그러운 물기의 맛. 이 음전한 여름 나기. 그래, 여름에는 역시 냉파스타지. 이가 덜덜 떨리도록 차가운 국물 요리는 본래 겨울 풍류라지, 아마? – 강보라(<루엘> 피처 에디터)

 

2 뉴욕 여름을 살리는 랍스터롤
한국에 있을 땐 평양냉면과 맥주로 여름을 났다. 그러다 뉴욕에 오게 됐고 시판 물냉면마저 귀한 이곳에서 여름은 그야말로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엉뚱하게 뜻밖의 여름 음식을 뉴욕에서 발견했으니 그건 바로 랍스터롤이다. 랍스터롤로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은 이는 나뿐만이 아니다. 미국인들,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과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 모두라 해도 좋다. 랍스터롤이 미국에서 왜 여름 음식으로 꼽히게 됐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여름에 랍스터롤을 먹어왔다는 정보는 차치하고라도 이건 랍스터 아닌가 랍스터, 허기와 허약을 동시에 충족해줄 수 있는 귀한 식재료. 한마디로 입에도 당기면서 여름에 지친 몸에도 당기니 여름 재료로는 더없이 좋다. 하지만 여기서 포인트는 이것이 단순한 랍스터 찜이 아니라 ‘랍스터롤’이라는 점이다. 랍스터롤은 크게 두 가지 형태인데, 버터에 지진 뜨거운 빵 위에 랍스터를 얹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랍스터를 따뜻하게 조리하느냐 차갑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메인 주 스타일, 코네티컷 주 스타일로 나뉜다. 먼저 메인 스타일은 랍스터에 셀러리, 파슬리, 레몬즙 등을 넣어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으로 빵은 따뜻하지만 랍스터는 샐러드 스타일로 차갑게 먹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코네티컷 스타일은 찐 랍스터를 버터에 다시 한 번 두루치기하는 방식으로, 빵뿐 아니라 랍스터도 따뜻하게 먹는다. 둘 중 무엇이 더 맛있냐는 질문은 사절한다. 다만, 좀 더 시원하게 먹으려면 메인 스타일이, 랍스터 자체의 풍미를 십분 즐기려면 코네티컷 스타일이 맞을 것이다. 그 무엇이 되었건, 뉴욕에서 평양냉면을 목놓아 부르다 지쳐 쓰러진 여름의 나에게 위로가 되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 이현수(<뉴욕 쇼핑 프로젝트> 저자)

 

3 강원도의 맛
나에게 여름의 맛이란 강원도의 맛이다.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 고향이 강원도라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강원도를 찾곤 했다. 강릉 버스터미널 주변을 지날 때면 노상에 자리 잡고 앉은 할머니들이 찜통을 옆에 두고 땀을 흘리시며 술빵과 찐옥수수를 파는 광경에 “더운데 왜 뜨거운 걸 팔까?”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강원도에서 여름이 되면 으레 즐기는 제철 음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식탐이 유난히 강했던 나는 할머님을 뵈러 간다고 하면 들뜨곤 했다. 정동진 곳곳에서 풍기는 소똥 냄새와 유난히 크게 들리던 기차 소리는 싫었지만 담벼락을 지나 넝쿨째 주렁주렁 매달린 커다란 호박과 포도밭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는 음식을 준비하시려 어머님과 바삐 움직이신다. 제철을 맞아 알이 꽉 찬 옥수수와 고소한 들기름 향이 입안 가득하고 차지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감자전, 담벼락 넝쿨에서 방금 따온 큰 호박을 쪼개어 전과 무침을 하시고 산에서 따온 여러 가지 산나물 무침, 앞바다에서 동네 총각들이 잡은 가자미회와 오징어회, 옆집에서 잡은 돼지고기 찌개와 너비아니 구이…. 서두가 길었다. 여름 맛인 강원도의 맛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국수다. 할머니는 손님들 취향에 맞춰 국수를 말아 주셨다. 기본적으로 진한 멸치 국물의 잔치국수를 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고소한 참기름 향과 달큼한 간장양념의 비빔국수, 겨우내 익은 배추김치와 명태식해, 고추장 양념의 시큼하고 달콤한 비빔국수, 차가운 옥수수차에 짭짭한 소면을 넣은 냉국수, 소박하면서 맛깔 나는 국수가 생각나는데 이 중에서 배추김치와 명태식해, 고추장 양념으로 비벼낸 비빔국수가 일품이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명태식해는 김장을 할 때 배추양념과 함께 버무려 배추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데 젓갈 향과 어우러져 김치의 감칠맛을 더하고 겨울이 지나 삭은 명태는 식욕을 자극하는 밥도둑이라 할 만큼 매력적이다. 유기산, 젖산의 영향으로 새콤한 맛이 생기는데 이러한 맛은 입맛을 돋우고 기력과 입맛이 없는 여름에 부담이 없다. 달콤하고 시큼한 김치 비빔국수에 큼큼하고 시큼한 명태식해를 고명으로 올려 먹으면 여름내 더위로 처진 몸에 활력을 준다. 이 비빔국수는 시중에 파는 곳이 없어 어머님이 가끔 만들어 주시는데 국수 위에 명태식해를 올려 한 젓가락 물면, 여름철 정동진 할머니 댁의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가 생각난다. – 현정(SG다인힐 총괄셰프) 

 

4 육개장의 추억
가끔 난 아내에게 혹시 죽기 전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느냐고 가끔 물어본다. 답을 얻기 보다는 내 말을 하기 위해서 던지는 미끼와도 같은 질문이지만 내게는 여름이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음식이 있다. 그것들의 첫 경험을 여름에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중 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어릴 때 모친은 항상 일을 하신다고 바빴고, 난 거의 집안일을 하시는 분이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입이 짧았고 편식이 굉장히 심한 아이였다(지금도 그렇다). 부산에서 자란 난 수산업을 하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생선류를 자주 먹게 되었고, 식단도 그런 쪽이었다. 어느 여름 날, 밖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귀가한 나에게 모친은 맛있는 소고깃국을 사왔다고 해서 먹게 되었다. 그게 밖에서 사온 육개장이었다. 소년에게는 너무나 황홀한 맛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른스러운 맛이기도 했다. 수입육이 없었을 때이니 한우의 부드러움과 대파의 달고 시원한 맛, 그리고 적당한 기름진 맛의 밸런스는 지금 생각해봐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맛의 일치였다. 사실 호텔 주방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 진귀하고 새롭고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업무 관계로 거의 일년에 7~8회 해외 출장을 가고, 그때마다 그 지역의 맛집을 찾아 다닌다. 뉴욕의 다니엘에서 먹었던 프렌치도, 긴자의 스기야바시지로에서 먹었던 스시도, 방콕에서 먹었던 타이식 누들 샐러드 얌운센도 훌륭한 음식이었지만 이 육개장처럼 맛을 상상하면서 그리워한 적은 없다. 내가 살아갈 세월에 또다시 맛보고 싶은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다시 먹기 힘들지도 모른다. 부산 좌천동에 위치한 그 육개장집은 약 35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40년 전에 먹었던 맛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입이 짧은 아이가 ‘소고깃국‛ 사왔다는 모친의 이야기만 들으면 밥 두세 공기를 땀 뻘뻘 흘리며 먹었다. 세월이 몇십 년 지나 지금도 그 맛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먹음으로써 행복이란 것을 난 4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80세가 넘은 모친이 여름이면 그 소고깃국을 사오셔서 “밥 먹으라!”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지금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한승원(스시조 셰프)

 

5 육식주의자를 위한 보양
3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나는 육식주의자다. 사계절 내내 고기를 입에 달고 살기에, 지치는 여름에 날 달래주는 것도 역시 고기.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영양센타’의 삼계탕과 매운 닭, ‘비스테까 꼬또’의 육즙 가득한 T본 스테이크, 그리고 ‘우래옥’의 제육냉면이다. ‘영양센타’의 삼계탕은 보드라운 영계 살을 살살 발라서 뽀얗게 우러나온 국물과 함께 한입 먹으면 양기가 몸에 퍼지는 듯하다. 여기에 몸에 참 좋을 것 같은 쌉싸래한 맛의 인삼주를 곁들이면 비단에 꽃까지 더한 격!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한 날엔 메뉴가 달라진다. 무교동 실비집의 폭발적인 매운맛에 대적할 만한 이곳의 매운 닭은 세 입 정도 먹고 나면, 잠깐 후회할 정도로 맵다. 몇 입 먹다가 냉수와 슬러시 상태의 소주를 번갈아 마시며 혀를 식혀가면 아픈 몸과 마음이 어느새 치유된다. ‘비스떼까 코또’의 T본 스테이크는 조금 우아하게 몸을 달래고 싶을 때 제격이다. 여자 3명이 먹으면 딱 좋을 양으로, 미디엄 레어의 굽기로 시켜서 와인 한 잔 곁들이면 거한 점심이나 가벼운 저녁으로 좋다.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함께 나오는 구운 야채와 루콜라 샐러드도 와인에 계속 손이 갈 정도로 스테이크와 좋은 합을 이룬다. ‘우래옥’에서 제육냉면을 주문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그냥 냉면을 시키면 수육 두세 점이 얹혀 나오지만, 제육 냉면을 시키면 돼지고기 다섯 점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고기로 가볍게 전채를 먹고, 냉면 위에 얹힌 제육을 안주 삼아 메인을 즐긴 다음, 시원한 면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 나만의 우래옥 즐기는 법이다. 아무리 비타민을 챙겨 먹어도 음식을 잘 챙겨 먹는 것만큼 건강에 좋은 것도 없다. 내 몸은 내가 안다. 여름에 지칠 때 진리는 역시 고기다. – 이정윤(<와인수첩>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