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의 여행길에서 면밀하고 생생하게 길어 올린, 내 생애의 잊지 못할 그 맛에 대한 기록을 전한다.

벚꽃 날리는 계절의 통영
선문답 같은 문자를 주고(‘외롭습니다’) 받는(‘떨어지는 벚꽃 혼자 보지 마라, 운다’) 계절이 있다. 굳이 언제라고 말할 필요도 없는 계절, 처음으로 통영을 찾았다. 충무교를 넘어서는데 정말 눈물 나도록 벚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작가놀이를 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책을 쓰고 있었다. 초판도 채 팔지 못한 책을 번역한 뒤, 그 기세를 몰아 또 다른 책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어디에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작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딘가 가서 처박혀 있어보고 싶었다. 물론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과 달리 독촉 전화나 끊임없는 계약 제안 같은 건 없었다. 방해거리 하나도 없었건만, 책을 다시 못 쓰게 될지도 모르니 반드시 이 기회에 작가놀이를 하겠다는 절박함으로 남하했다. 초판도 팔지 못한 불명예의 첫 주자인 번역서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에는 저자의 베니스 여행기가 실려 있다. 너무나도 싱싱한 탓에 레몬즙마저 방해가 된다는 베니스의 해산물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였다. 표준어는 물론 베네치아어까지 들먹여가며 소개하는 베네치아 생선 이름사전과, ‘Sweet’라는 그 흔하디흔한 형용사 때문에 특히 번역에 애먹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어야 그렇다 쳐도, ‘달다’는 형용사를 해산물에 쓰는 이유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먼 옛날, 배낭여행 중에 그것도 딱 하루를 스쳐 지나가 파스타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은 곳이 베니스인지라, 싱싱한 해산물은 언감생심이었다. 억지로 가져다 붙이자면 그것도 인연이랄까, 이탈리아 베니스의 간판주자라는 해산물을 바로 한국의 시칠리라는 통영에서 만났다. 사마귀 새우, 우리말로는 갯가재다. 여러 종이 있지만 앞발이 사마귀의 그것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이놈들이 어시장 수조에서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 할아버지 댁 상에 한 접시 수북하게 올라왔으나 그 생김새에 압도되어 손대지 못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놈들 한 보따리에 늦봄부터 철이라는 갑오징어를 한 마리 사서는, 비수기 헐값으로 빌린 바닷가 펜션으로 돌아와 불부터 피웠다. 어차피 그대로 불에 굽거나 삶는 것 외에 생각나는 다른 방법도, 가진 다른 재료도 없었기에 딱히 ‘요리’라는 거창한 딱지조차 붙일 필요가 없었다. 소금을 팬에 깔고 갯가재를 구워 입에 넣으니, 나의 원작자가 말하던 해산물의 단맛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보통 오징어보다 겉은 덜 질기면서도 속은 살짝 더 씹는 맛이 있어 식감의 균형이 더 좋은 갑오징어 또한, 달기는 갯가재에 뒤지지 않았다. 작가놀이도 효험이 없었는지, 책은 또 초판을 파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뒷맛이 첫 책보다 오히려 덜 쓴 건, 그 벚꽃 날리는 계절, 통영에서 맛본 갯가재 단맛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 이용재 (칼럼니스트)

주꾸미와 나눈 인사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옷차림도 아닌 식탁 위 음식이다. 그 계절의 비, 바람, 공기, 그리고 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제철 음식재료는 밥상 위에서 계절의 인사를 전한다. 제철에 나는 음식을 찾아 맛보는 즐거움을 배운 건 어렸을 때부터였다. 자영업을 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철마다 나오는 음식을 맛보기 위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산지를 찾아가 계절의 인사를 맞이할 수 있었다. 대학 때 상경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 보니 제철 음식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고향인 철원과 달리 서울에는 전국의 음식이 다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도 봄에 주꾸미를 즐길 수 있고, 가을에는 전어 등을 접할 수 있으니 바쁜 생활 속에서 굳이 주꾸미를 찾아 서해를 갈 필요가 없었다. 진한 빨간 양념에 냉동 주꾸미를 볶아 주는 주꾸미 맛에 익숙해져 어렸을 때 부모님과 산지에 가서 먹었던 맛을 잊고 있었다. 올해 4월에도 여러 TV프로그램에서 봄의 음식재료인 주꾸미를 앞다퉈 다뤘다. 올해는 꼭 산지에서 주꾸미를 먹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지만, 그것을 먹자고 주말을 할애해 먼 길을 떠나는 것은 역시 부담스러운 일정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지방의 학교에서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군산지역의 한 학교였다. 제철을 맞은 주꾸미 산지와 가까운 군산에서 하는 강의는 부담스러운 일정을 감수하기에 적절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해 군산의 강의를 마쳤다. 그러고는 바로 사전 정보를 통해 알아둔 군산에서 1시간 거리인 서천의 한 주꾸미집을 찾았다. 철판 주꾸미를 시키고 기다리며 본 광경은 그야말로 주꾸미 무법천지였다. 주방에서 손님상까지 운반되는 살아 있는 주꾸미는 접시 위에서 이탈해 마치 죽기 전 마지막으로 살겠다고 탈출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투명한 자태와 활기찬 움직임으로도 그 신선함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건 붉은 양념이 아니라 고춧가루가 드문드문 보이는 투명한 양념이었다. 식당 종업원이 주꾸미가 담긴 철판을 불에 올리며 지금 바로 생으로 먹어도 된다고 했다. 생주꾸미는 먹어본 적이 없는지라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주꾸미가 아주 싱싱했기 때문에 별다른 양념이 필요 없었다. 주꾸미 자체의 맛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역할을 하는 앙념 맛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치 갖가지 많은 재료를 섞어 만든 드레싱을 샐러드에 뿌려 먹는 것이 아니라 올리브유와 소금만 넣고 채소를 코팅하듯 버무린 샐러드를 먹는 기분이었다. 후자 스타일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딱 맞았다. 생으로 몇 개 맛보는 동안 주꾸미와 미나리가 익어갔다. 양념 맛이 아닌 주꾸미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머리 부분은 밥알처럼 생긴 알이 가득 배어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제 서울에서 주꾸미를 먹지 않겠다며, 봄이면 장거리 운전을 감수하더라도 서천에서 주꾸미를 맞이하기로 다짐했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나의 부모님처럼 자식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음식으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선물하고 싶다. 봄이라는 계절의 인사법은 주꾸미를 만끽하고, 다음 해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충남 서천의 주꾸미를 만날 다음 봄을 애타게 기다린다.
– 노민영(<씨즐, 삶을 요리하다> 저자, 칼럼니스트)

민어야, 라고 부르면
아리땁던 누나가 하얀 덧니를 드러내며 응, 대답할 것 같다. 민어야, 부르면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이 불쑥 손을 흔들며 인사해올 것만 같다. 민어,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빛나고 큰, 어떤 시간. 여름이면 외가 식구가 모여 바캉스 비슷한 것을 즐겼다. 모두 바다를 가까이에 두고 있기에 따로 해수욕장을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살기가 팍팍하고 괴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한여름 지도 선착장에 모인 다섯 딸의 남편들, 그러니까 동서들은 어이, 자네 왔는가. 형님 이제 오셨소, 하며 투박한 인사를 건넸다. 이모들은 벌써 저만치서 자기들끼리 수다에 한창이고 사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른들을 골탕먹일 묘수를 찾고 있었다. 선착장에 쿨럭쿨럭 도착한 철선 위로 이모부들은 재주껏 차를 대었다. 포텐샤, 엑셀, 에스페로, 프린스 같은 차들이 차례차례 배에 오르면 사촌들이 괴성을 지르며 배에 오르고 이모들이 양산을 접으며 아이들을 단속했다. 흰 거품이 원형을 흩뿌리며 배는 제 갈 길로 앞머리를 튼다. 이윽고, 대가족은 임자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우리는 크고 둥글게 모여 앉아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는 아이끼리 각자의 소리를 내어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며, 뭔가를 먹었다. 임자도에는 민어라는 생선이 많이 잡혔다. 이름에서 갈치나 전어와는 비교가 불가한 미학적 완결성이 느껴진다. 민어는 일단 위풍당당 몸이 크다. 회를 뜨거나 매운탕으로 끓이기 까다로운 편이나 일단 훌륭한 조리사를 만나면 그 빛을 더한다. 광어나 우럭에 그 기품을 비교할 수 없으며, 일명 ‘스키다시’라 불리는 밑반찬의 도움 없이도 한 마리면 웬만한 식구는 모두 배부르게 할 수 있다. 민어의 윤기는 반들반들하고 하얀 속살은 아스라하다. 믿을 수 없이 쫄깃하며 가늠할 수 없이 담백하다. 한 마리를 회로 뜨면 두 가족은 족히 먹고, 다음 날 전까지 부쳐 먹을 수 있다. 민어는 바다생선 특유의 완강함도 덜하여, 회는 네발짐승인 소의 육회와 흡사한 맛과 향이 난다. 와사비나 초고추장보다는 된장이나 매운 고추와 궁합이 잘 맞는다. 보통의 회보다 두껍게 썰어 씹는 입안에서 오물오물 돌아다니는 맛을 더한다. 민어의 살을 바르는 동안, 이모들은 미리 준비해온 반찬을 꺼낸다. 참기름과 참깨로 양념한 된장과, 묵은 김치를 살짝 볶은 것, 큰 이모가 집 앞마당에서 기른 깻잎 같은 것들이다. 어머니의 다섯 여자 형제는 신안군 압해도에서 태어나 전라도의 몇몇 고장으로 시집을 갔다. 목포, 해남, 광주 등지에 그들은 또 다른 섬을 이루어 삶을 지속했다. 매운 고추와 마늘을 썬다. 장난치는 아이의 등짝을 후려치거나(셋째 이모의 손이 매웠다), 과음하는 남편에게 눈치를 줬다. 그리고 민어가 나오면 깻잎에 하얀 민어회 한 점을 턱하니 올리고, 다른 손에는 소주를 들었다. 따라놓은 소주처럼, 시간은 흘렀다. 이제, 이모들은 누구의 할머니가 되었고, 좀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둥글게 앉을 시간을 내지 못한다.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 시간이 되고부터, 민어를 쉽사리 접하지 못했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로, 민어는 더욱 귀한 생선이 되었다. 민어, 라고 발음하면 그때 젊었던 이모들이 역시 젊었던 이모부들을 앞세우고 매운 고추처럼 알싸한 사투리를 들려줄 것만 같다. 조선시대, 민어의 부레는 아교로 쓰였다고 한다. 가내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들던 때, 민어는 오공본드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찾아올 여름에는 더 늦기 전에 이모들을 모시고, 지난 시간을 꼼꼼히 붙여봐야 할 것 같다. 두껍고 차지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민어를 앞에 두고. – 서효인(시인)

가장 아름다운 뽈락들
이십대 초반 전라도 지방의 해안가 도시, 여수에 살던 나는 어릴 적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바다낚시를 다니곤 했다. 대학에 낙방하고 그럭저럭 지내던 시절도 한몫했고 또래 친구들 중에 어린 시절부터 낚시광인 아버지의 부성으로 익힌 ‘채비’에 대해 꽤나 박식한 친구들의 호사나 무용담도 우리를 자주 낚시터로 이끌곤 했다. 사실 낚시 자체보다는 소주 몇 병 들고 낚은 안주를 직접 만들어 먹던 분위기에 이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 시절은 갯내 가득한 소주를 비우며 목젖이 터지도록 바다 바위에 올라 노래를 불러도 좋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질척거리는 가정사로 인해 씁쓸한 친구들과 산란기를 나누던 방담들로 스스로를 가객처럼 여길 수 있는 분위기를 서로에게 제공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낚시 마니아도 아니었고 도무지 익히려고 해도 ‘찌’질이 형편없고 늘 모자란 ‘조과(낚시로 고기를 낚은 성과)’ 점수로 번번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는 횟수가 반복되고 몇 번의 멀미도 겪으며 채비를 익히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제법 낚시에 대해 호기심도 생겨나고 밤낚시에 대한 설렘이 어느 약속 못지않게 귀한 시간들이 되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직접 낚아 올려 요리를 해 먹던 뽈락구이나 뽈락양념찜의 달콤하고 매운맛은 아직도 혀끝에 감미롭다. 뽈락 맛에 반해버린 우리는 밤마다 바다로 떠나는 낚시모임 이름을 ‘뽈락모임’이라 정해버렸다. 뽈락의 정식명칭은 쏨뱅이목, 양볼락과의 바닷물고기다. 주로 연안에 서식하며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전남과 경남 인근에서는 ‘뽈낙이’, ‘뽈라구’라고 부르고 경북에서는 ‘꺽저구’, ‘우래기’, 강원도에서는 ‘열광어’, ‘열갱이’, ‘열기’라 부르며 함경남도에서는 ‘구럭’이라 부른다. 큰 놈보다는 작은 놈이 더 맛이 좋다. 몸은 방추형으로 납작하게 생긴 것이 색깔은 주로 바닷물에 입혀진 회갈색인데 옆구리에 검은색 가로무늬가 대여섯 줄 새겨져 있다. 잡아 올려 대체로 통회로 먹지만 뼈회나 소금구이, 매운탕 등으로도 손색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뽈락에 빠져든 건 맛도 맛이지만 이놈이 우리들처럼 야행성이라는 점에 있다. 밤바다에 녹색 집어를 이용해 초리대를 풀고 미끼로 민물새우나 청개비를 매달아 야행성 바닷고기를 낚는 재미는 해보지 않고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봉돌을 그득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예신(찌가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이 오면 나는 타이밍을 위해 숨을 멈추곤 했다. 그러곤 친구들 말처럼 입질을 넉넉히 즐긴다는 손맛인 ‘챔질’을 즐기기 시작한다. 뽈락은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입질이 오면 바로 당기지 않고 다른 놈들까지 가까이 어른거리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내가 배운 근사한 말이 하나 있다. 뽈락들이 ‘수면에 피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건져 올린 굵은 씨알의 뽈락들을 그대로 바위 위에 놓고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땄다. 그러곤 깨끗한 물에 헹궜다. 비늘과 내장을 벗긴 후 굵은 소금을 뿌리고 구웠다. 뽈락이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입맛을 다시다가 소주를 채워 넘겼다. 처음엔 구이만 해 먹다가 나중엔 코펠을 챙겨가 양념찜과 매운탕도 해 먹었다. 어떤 놈은 집에서 양념장을 챙겨오고 어떤 녀석은 다진 마늘과 후춧가루, 맛술, 간장을 챙겨오고 또 어떤 녀석은 봉돌만 챙겨오기도 했다. 나는 주로 부엌에서 비닐봉지에 붉은 피망과 녹색 피망을 챙겨왔다. 겨울 동안 산란을 마치고 깊은 수심을 건너 얕은 해안에 피어 있는 이 뽈락의 생김새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표정을 많이 닮아 있기도 했다. 몇 년 후 해군에 자원 입대해 군함을 타고 가다가 문득 뭍으로 올라온 뽈락의 놀란 표정을 따라 지어보곤 혼자 씩 웃곤 했다. – 김경주(시인)

거제도 시할머니의 대합조개전
사람은 한평생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고 한다. 한사람의 입맛 속에는 어머니가 오랜 세월 선호해온 메뉴와 재료와 양념이 스며들어 있다. 어머니의 입맛 속에는 분명 할머니가 부엌에서 보낸 오랜 세월, 그리고 그곳에서 익힌 습관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조부모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가던 날이었다. 하늘과 바다를 접어놓은 듯 푸른빛이 예쁜 남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릴적 울산에서 자라면서 보아왔던 바다의 색과는 사뭇 다른 거제도 바다는 통영부터 이어지는 작은 섬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선사했다. 따사로운 햇빛, 반짝이는 바닷가, 선선한 바람이 오감을 자극하는 가운데 시조부모님 댁에 도착했고, 짐을 풀기 전 인사부터 올렸다. 행동 하나, 언사 하나가 조심이고 부엌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보시곤 시할머님은 먼 길 왔으니 편히 쉬라 하셨다. 시할머님이 팔십 평생 꾸려 오시던 부엌살림에 선뜻 나서기에도 민망하고, 가만있기에도 민망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다음 날 아침은 부지런히 시할머님을 도우리라 마음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었고 시할머님은 새벽부터 부둣가에 나가 갓 잡아 올린 뽈락, 가재와 함께 대합조개를 장바구니 가득 사오셨다. ‘아니 저 많은 조개를 어찌 하시려고….’ 시할머님과 부엌 한 켠에 나란히 앉아 조개를 부지런히 손질했다. 대합에 칼을 깊게 찔러 넣어 조개를 벌렸다. 이때 힘줄을 잘라내야 그 단단한 조개껍데기가 열린다. 살을 도려내고 푸른 내장을 잘라냈다. 그러고는 조갯살을 바락바락 여러 번 주물러가며 헹궈 조개의 잡내를 뺐다. 물기가 남아 있는 채로 도마 위에 올려 숭덩숭덩 썰고,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볼에 넣고는 밀가루와 같이 치대어 반죽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불 위에 올린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반죽을 한 숟가락씩 떠 올려 노릇하게 조개전을 부쳤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뽈락은 비늘을 벗겨 노릇노릇하게 지져내고 불 한 켠의 뚝배기에는 된장을 풀어 바글바글 끓인 후 가재를 넣었다. 마침내 완성된 밥상은 평생 잊지 못할 한 끼가 되었다. 가재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온 단맛이 감도는 된장찌개. 부드러우면서도 탱글한 식감으로 입안을 즐겁게 하는 뽈락구이도 맛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바로 조개전이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배어 나오는 대합조개전은 이제까지 맛보았던 그 어떤 전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대합전을 먹어대는 나를 보고 시할머님이 한마디 하셨다. “아야, 조개전이 맛나제? 이기 여기서만 묵을 수 있는 전인기라. 서울서는 비싸서 먹지도 못할 끼다. 마이 묵어라.” 대합은 무척 비싼 조개류에 속한다. 서울에 올라와 나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 대합을 사러 갔더니 한 개의 가격이 5천원을 훌쩍 넘었다. 저렴할 때에도 한 개에 3~4천원이 매겨지는 비싼 몸값이다. 게다가 얼마나 예민한지 쉽게 상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대합조개전에 대합을 아낄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합조개전의 맛의 포인트는 많은 양의 조갯살에 있으니 말이다. 조갯살을 아끼지 않고 잔뜩 넣어야만 깊고 진한, 그리고 씹을수록 달콤한 조개전을 만들 수 있다. ‘아, 할머님이 말씀하신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거제도 바닷가 바로 앞에 살고 있는 지리적 이점이 바로 대합조개전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대합조개전은 거제도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만이 해 먹을 수 있는 특권이리라. 내 남편 노다 씨가 어릴 적부터 먹고 자랐을 맛의 기억, 대합조개전은 나에겐 남해바다를 품고 있는 거제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각인되었다. 그 후로 노다 씨와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저녁상에 대합조개전을 올린다. 이 요리는 시할머님의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하는 과거의 맛, 기억의 맛을 복원하여 나와 노다 씨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요리가 되었다. – 김상영(푸드 스타일리스트, 쿠킹스튜디오 노다 대표)

순천에서 맞춘 퍼즐
‘순천’에 대해 생각했다. 턱하니 떠오르는 음식도 추억도 없었다. 순천은 내게 그저 지도 위에 찍혀있는 어느 점에 불과했다. 나의 모든 여행지는 그곳에서 먹어보고 싶은, 또는 먹은 음식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호감도가 결정되곤 했다. 이번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는 곳을, 더구나 그곳의 먹거리를 탐해볼 여유도 없는 빡빡한 출장의 일정으로 다녀와야 하는 사실이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즐길 틈이란 있는 법! 출장의 일정을 나누고 나누어 두 끼는 순천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만들어냈다. ‘겨우 두 끼니인데 어떤 음식을 만날 수 있으려나….’ 설렘과 불안감을 안고 터미널에 내려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그곳의 자연과 사람, 그들이 차려먹는 밥상을 한눈에 담아낼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박물관이다. 시장은 순천의 특색 있는 신선한 재료로 활기차고 푸짐했고 상인들은 순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좋은 징조였다. 와글바글 함지박 속에서 바다 소리를 내는 작은 게들에서는 갯벌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순천이 바다 가까이에 있었지.’ 말로만 듣던 순천만이 있는 그 순천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뭔가 대단한 사실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염려했던 순천에서의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순천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기사님에게 물었다. “순천은 뭐가 맛있어요?”, “아무 데나 들어가도 웬만하면 다 맛있어요.” 내 귀를 의심했다. 한 끼 이상은 밖에서 사 먹어야 하는 택시기사가 아무 식당이나 다 맛있단다. 집밥과는 달리 식당밥은 질리는 법이라 외식문화 천지인 홍대에서 일하는 우리도 먹을 게 없다고 푸념하는데 말이다. “여기는 바다, 산, 들이 비옥해서 재료가 다 신선합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슥슥 비벼 먹어도 다 맛있어요.” 정보 없는 여행길에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맞는 말이었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은데 뭐가 더 필요할까? 발길을 따라 걷다가 아무거나 먹기로 했다. 그러고는 낙지를 탕탕 잘게 토막 내서 참기름, 김가루를 살짝 넣고 비벼 먹는 낙지비빔밥을 먹었다. 싱싱하고 담백했다. 이제까지 수없이 먹은 낙지비빔밥인데 같은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위대하고 풍요로운 갯벌로서 이미 순천의 퍼즐은 반 이상 맞춰진 채 가려져있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순천만 갯벌 위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이제 한 끼가 남았다는 사실에 더욱 비장해졌다. 저녁거리를 찾아 어두운 시내 골목을 배회하다 보니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맛집 정보를 너무 안 찾았나? 마지막 한 끼인데 실패하진 않을까.’ 이윽고 눈에 들어온, 열었는지 닫았는지 모를 수더분한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남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그 음식, 팥칼국수집이었다. 본능적으로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서울에서도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팥죽이나 단팥죽, 팥빙수처럼 팥칼국수의 문제는 ‘팥’이었다. 팥의 맛과 향, 만드는 수고로움이 더해져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런 팥음식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팥칼국수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나온 동치미와 배추겉절이, 열무김치, 텃밭에서 방금 따온 듯한 싱싱한 고추와 익숙하지 않은 색의 집된장을 보고 본질에 가까운 맛을 만날 것 같은 예감에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정갈한 사기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칼국수가 나왔다. 코앞에 내려놓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은 팥향이 훅 밀려왔다. 손으로 밀어 칼로 자른 것이 분명한 허연 면발이 구불구불 붉은 팥죽 속에서 먹음직스러웠다. 대충 삶아 껍질째 막 갈아서 양을 늘린 게 아니라 수고롭게 만든 보드랍고 진한 팥칼국수는 그야말로 수수하고 정갈했다. 배도 안 고픈데 자꾸 손이 가는 엄마의 별식과 같은 맛이었다. 국산팥인지 수입팥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고 맛을 현란하게 표현할 능력도 없지만 그건 분명 순수하고 좋은 맛이었다. 비로소 순천에 대한 퍼즐의 큰 조각들이 맞춰졌다. 팥칼국수의 면발을 감아 올리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람이 좋은 가을이 오면 순천에서의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그곳을 찾을 것이다.
– 고영주(쇼콜라티에, 카카오봄 대표)

봄날의 맛있는 강원도
“강원도만 빼고 다 좋아”라고 그는 말했다. 강원도 양구 백두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던 이유로 그곳에 대한 환상도 미련도 없다는 말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구황작물을 좋아하는 입맛을 가졌다. 뭐든 생명력 강하게 잘 자라는 것들은 그 맛도 구수하다고 생각하니까. 감자, 고구마, 메밀, 때에 따라서는 옥수수 혹은 옥수수가루, 메밀가루로 만든 그 무엇이든 두루 입에 맞는다. 나는 강원도를 정말 좋아한다. 처음에는 춘천으로 타협했다. 당일로 다녀오기도 좋고, 철판닭갈비와 숯불닭갈비 중에 골라 먹든지 아님 ‘양양집’에서 철을 맞은 도루묵을 조려 먹든지 하자 했다. 춘천 다음은 정선 오일장이 행선지가 되었다. 때는 2006년 월드컵이 한창이었고 정선장에서 실컷 놀고 강원도 막걸리에 메밀 음식에 기분 좋게 취해 돌아온 여인숙에서 대한민국 대 프랑스의 경기를 보았던 기억이 꽤 오래갔다. 그 후로 박수근 미술관을 가기 위해 다시 양구로, 고기 취재를 위해 횡성으로 다니다 보니 강원도는 우리가 가장 자주 다니는 미식여행의 코스가 되어버렸다. 횡성을 지날 때에는 휴게소 정육 코너에서 산지가 확실한 강원도 소고기까지 좋은 가격으로 살 수 있으니 남편은 더 이상 1100m고지에서 보초 서던 기억 때문에 강원도에 가지 않겠다고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강원도의 봄은 특히 맛있다. 산나물 때문이다. 자주 다니던 고깃집이라도 봄에 가면 다른 찬이 나온다. 인심 좋게 담긴 나물과 쌈 채소가 그것이다. 그때 나오는 푸른 것들은 그냥 먹어도 향그럽고 깨소금과 들기름을 조금 넣고 무치기만 해도 ‘요리’가 된다. 월정사 인근 오대산 식당이나 진부의 부일식당, 부림식당 등은 모두 산채정식을 하지만 나물의 종류나 간이 달라서 몇 끼 연속으로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봄나물을 한 상 먹고 행복한 기분이 올라 진부 오일장을 걷다가 모종을 몇 판 사고 돌아오는 길이면 봄볕에 얼굴이 까매져도 마냥 좋다. 사실 강원도에 가면 모든 음식이 다 맛있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긴장이 풀리고, 눈앞에 보이는 나무와 산과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에 있는 동안 만큼은 천천히 여유를 부리고 싶어진다. 그러니 많이 먹고 푹 자게 된다. 강릉 해안가의 소나무 밭을 걷다가 시내 시장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가면 깔끔하게 누른 족편이며 그 자리에서 부쳐주는 메밀전이 있다. 술한잔은 기본이다. 어차피 내일 아침은 황태국을 먹을 것이니 세월아, 네월아 늑장을 부리며 시장 골목 의자에 엉덩이를 쭉 빼고 눌러 앉아본다. 한 잔, 두 잔에 기분이 좋아지고 허생원이 동이의 아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먹은 맛은 긴 추억이 된다. 봄 산채, 여름 복숭아, 가을 메밀을 돌아 겨울에는 황태와 도루묵이 지천이니 꼭 메밀꽃 필 무렵이 아니어도 강원도로 향할 이유는 충분하다. – 박재은(<어느 날, 파리에서 편지가 왔다> 저자, 푸드 스타일리스트)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해안도로와 중산간도로를 번갈아 갈아타며 겨우 모슬포항에 도착했지만 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코앞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요, 배는 떠났습니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느라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고 배를 놓친 그 순간부터 허기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식당을 찾아보자. 고등어조림이나 고기국수를 맛있게 만들어내는 식당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여긴 제주도고 게다가 모슬포니 말이지. 방어회를 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동차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개미집을 찾는 개미핥기처럼 엉금엉금 나아갔다. 개미핥기는 산방산 아래에 자리한 제주식 밀면이라는 간판 앞에서 멈춰 섰다. 부산이 아니라 제주에도 밀면이 있었군. 아마도 이삼십년 전쯤, 부산에서 밀면 가게를 하던 누군가가 바다 건너 이곳 산방산 아래까지 흘러 들어와 밀면 가게를 차린 것이리라. 그리고 그 가게가 아마도 제주식 밀면의 원조가 된 것일 테고. 제주식 밀면이니 아마도 밀면에 제주 흑돼지를 서너 점 올린 것일 수도 있겠다. 육수는 뭍의 그것보다 약간 느끼할 테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 집을 지나치려는데, 식당 문 앞이 사람들로 어수선한 게 보였다. 시간은 오전 10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여러번 제주에 취재여행을 와서 가이드북에 소개된 유명한 음식점을 가보았지만 특별히 맛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의외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만의 특색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을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은 서울 사람들 입맛에 맞춰져 있었다. 지나치게 달콤하거나 심하게 맵거나 많은 조미료를 사용하고 있었다. 제주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이 간단한 조리법에 있는 만큼 제주의 요리는 조금 투박하거나 단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바다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사철 기온이 따뜻한 탓에 채소 역시 싱싱한 것을 따는 데 어려움이 없다. 좋은 재료에 약간의 된장과 간장만으로 양념한 음식. 이것이 제주 음식의 본질이다.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식당 안은 면발을 감아 올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후루룩거리며 면을 먹는 모습은 뭔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광경을 만들어냈다. 마침 자리가 나 의자에 앉았고 밀면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한 남자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합석이었다. 모르는 누군가와 합석해 음식을 먹은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까마득했다. 낯선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밀면을 먹어야 하다니. 우리는 각자 젓가락을 앞에 두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나의 밀면과 그의 밀면은 동시에 나왔다. 밀면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한 국물에 면이 소복하게 담겨 있었고 붉은 양념장과 돼지고기가 넉넉하게 올라가 있었다. 우리는 잠깐 눈을 마주쳤고 곧 고개를 숙이고 서로의 밀면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밀면은 잘 넘어갔다. 멸치로 우려낸 육수는 진했고 면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했다. 제주의 국수는 보기에는 맛있을 것 같아도 막상 먹어보면 기름기가 많아서 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의 밀면은 담백했다. 면을 다 먹고 그 남자와 나는 동시에 그릇을 들고 육수를 마셨다. 시원했다. 그리고 같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또다시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죠?” “네. 이만하면 됐죠.”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맛이 있다. 나는 요리사도 아니고 음식평론가도 아니다. 맛이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를 평가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맛을 감별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이 음식은 혼자 먹어야 더 맛있겠어. 이 맛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겠군. 뭐 이런 식이다. 그날 내가 먹은 밀면은 어색한 사이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맛이었다. – 최갑수(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