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이 전국을 강타한 통에 보쌈 한 번 제대로 못 먹어서 뿔난 전국의 미식가 여러분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봄엔 더 부지런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파릇한 새순이 억새지기 전에, 도다리의 뼈가 굵어지기 전에 이 봄 맛을 즐겨야죠.<얼루어>의 편견으로 선정한 봄의 맛부터 돌아보세요. 봄은 너무너무 짧으니까.

웨스틴 조선 호텔 한식당 셔블에서 정갈하게 끓여낸 도다리쑥국 한 그릇.

봄 도다리, 가을 전어
만석꾼의 금지옥엽 손녀딸로 태어나 세상 귀한 것을 다 먹으며 음식을 잘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사실 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책에서 왔다. <소공녀>를 읽으면서 푸딩의 맛을 상상했고, 패딩튼 역에 버려진 곰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멀레이드와 그레이프 프루트란 녀석은 대체 어떤 맛이더냐를 깊이 고민했다. 낯선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아서, 그 실제를 마주하게 될 때면 희열마저 느꼈 다. 푸아그라, 송로버섯, 러시안 수프 등을 한입 한입 떠 먹을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 기쁨은 미술품에 대한 절정의 욕망과 감동을 나타내는‘스탕달 신드롬’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통영의 일미라는 도다리쑥국도 먹는 것보다 읽는 것이 먼저였다. 제목은 잊었지만 바닷가 사내와 도시 여자가 등장하는 단편 소설이었는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터미널 식당에서 함께한 식사가 이 도다리쑥국이었다. 그날 당장‘죽기 전 먹어봐야 할 음식 리스트’에 도다리쑥국을 올려놨다. 그리고 마침내 도다리쑥국을 먹게 되었다. 아쉽게도 통영은 아니었다. 신문 등에서 봄의 전령사이자 별미로 도다리쑥국을 소개하면서 바닷가 음식을 취급하는 도시 식당에서 간혹 이 국을 끓여냈기 때문이다. 모양새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전골 냄비에 거무튀튀한 껍질, 흰 속살을 자랑하는 도다리가 토막토막 들어 있었고 짧은 쑥이 초록색 뚜껑처럼 한 가득 그 위를 덮고 있었다.‘ 그냥 멀건 생선국이잖아’실망하려던 찰나, 한입을 떠 먹었다. 알쏭달쏭 오묘한 조화였다. 안 어울린다 싶으면서도 시원하고 개운한 맛과 향에점점 빠져들게 되는 마력의 음식. 특히 크림처럼 농후한 맛의 이리와 풀이 죽은 쑥을 함께 먹는 맛이란. 왜 통영 사람들이 목빠지게 봄을 기다리는지 알 수 있었다. 도다리는 돌가자미의 다른 이름이다. 가자미목 가자미과의 생선으로 도시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광어는 넙치과 생선.‘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처럼 국을 끓이기엔 봄의 덜 자란 것이 맛이 좋다. 통영 사람들은 산에 솟아난 쑥을 보면 도다리를, 바다에서 잡힌 도다리를 보면 쑥을 떠올린다고 한다. 이제 3월이면 남쪽의 바닷가 식당은 일제히 입구에 도다리쑥국을 써서 붙인다. 통영에서는 복국으로 유명한 분소식당이 이 쑥국도 잘 끓인다고 소문났고, 웨스틴 조선 호텔 부산의 정통 한식당 셔블도 봄이면 잊지 않고 도다리쑥국 정식을 준비한다. 명동의 충무집, 분당의 남해소반 등에서도 봄이면 도다리쑥국을 판다. 한번 맛을 본 사람에게 도다리쑥국은, 봄의 다른 이름이다.

물미역으로 휘둘러 감은 새조개 샤브샤브와 주꾸미
새조개 샤브샤브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재료로, 4월만 되어도 맛이 떨어진다고 한다. 새조개는 조개 중에서 봄처럼 여린 맛을 낸다. 천북에서 굴구이를 먹다가 새조개를 손질하는 아주머니에게 아양을 떨어 세 점 맛을 보고선, 그 보드랍고 상쾌한 맛에 반했다. 유독 둥그런 껍데기를 자랑하는 새조개는 크기에 비해 손으로 들어보면 사뿐하게 가볍다. 이 조개를 억지로 벌려 살을 꺼내면 그 모양이 새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새조개다. 초밥으로 먹어도 맛있고, 샤브샤브로 해 먹으면 그 부드러운 맛에 반한다. 새조개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도시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되었고,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무게를 달아 팔기도 한다. 하지만 봄기운을 함께 즐기고 싶다면 충남의 바닷가에 한적하게 자리한 남당식당으로 떠나보길. 배추와 시금치 정도를 내놓는 여느 집과는 달리, 남당식당의 새조개 샤브샤브는 차림새만 봐도 봄을 느낄 수 있다. 가지런히 정렬한 새조개 속살 옆에는 갓 채취한 향기로운 냉이와 물미역, 때마다 달라지는 산나물이 수북하다. 야채와 귀한 디웅 조개와 바지락으로 끓인 시원한 육수에, 새조개를 토렴하고 냉이와 물미역, 산나물을 데쳐 함께 먹으면 사람들의 말이 점점 사라진다. 부드러운 첫 맛이 지나간 코끝에 바람처럼 풀향기가 감돈다. 새조개가 안녕을 고하면 바로주꾸미 철이 이어진다. 사철 잡히는 주꾸미지만 4월의 주꾸미에는 알이들었다! 미식가들이 입을 다퉈 극찬하는 밥알 같은 주꾸미알이 고소하니 맛있다. 간혹 징그럽다며 못 먹는 사람들이 있다. 올봄에는 그런 친구와 주꾸미 샤브샤브를 먹어야겠다. 꼭 알 맛이 아니더라도 생물 주꾸미의 부드럽고 쫄깃한 맛은 냉동 주꾸미 볶음과 비교할 수가 없다.

봄, 산나물에 취하다
바닷가 사람들이 봄을 맞은 해물을 건져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면, 산과들의 사람들은 느긋하게 땅 위로 솟아오른 여린 순을 툭툭 거둬들인다. 여린 쑥으로는 쑥된장국을 끓인다. 넙데데한 디포리 멸치와 다시마, 연못에서 잡은 우렁이로 국물을 내서 끓이는 쑥 된장국은 외갓집에서 운 좋으면 얻어먹는 음식으로, 쑥떡을 질색하던 때에도 맛있게 먹곤 했다. 쌉쌀하면서 개운한 맛이 밥도둑이다. 제주에서는 봄에 가장 맛이 좋다는 톳으로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는다. 제주의 상징과 같은 유채꽃으로 만드는 음식도 있다. 제주 토박이들만 해 먹을 줄 안다는 유채된장국으로, 꽃피기 전의 유채잎이 그렇게 연하고 달다고 한다. 봄의 낭만을 듬뿍 담은 국으론 또 보리순국이 있다. 2월 말이 되면 시린 땅을 뚫고 보리순이 돋는다. 보기엔 돌나물처럼 통통하니 순할 것 같지만 생명력이 강해서 시간을 들여 끓인 뒤에야 숨이 죽는다. 된장을 넣어 국으로 끓이면 구수하고 향긋한 맛이 좋아서 남도에서 즐겨 먹는데, 특히 목포의‘홍어애보릿국’은 통영의 도다리쑥국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봄철 별미. 홍어의 간을 말하는‘홍어애’와 보리순, 된장, 매운 고추를 넣어 폭폭 끓인다. 완성된 모양새는 얼큰한 맛의 해장국에 가깝다. 홍어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도가 갈리는 것처럼 홍어애 보릿국도 그렇다. 삭힌 정도를 주문해 먹을 수 있는 홍어회처럼 홍어애 보릿국도 3단계 정도가 있다고. 1단계는 홍어를 잘 먹지 않는 사람도 시도해 볼법하지만 3단계는 눈물 콧물 다 나오는 게 하는 바로 그 홍어의 맛이 국물째 담겼다고 생각하면 된다. 삭힌 홍어회를 처음 먹었을 때처럼 얼굴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서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1단계만해도 강한 홍어의 힘이 느껴졌다. 냄새는 솟구쳐 코에 꽂히는데 홍어애의 고소함이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목포와 나주를 위시한 남도에선 없어서 못 먹는 보양식이며 영원한 소울 푸드 중 하나다.

농부의 밥상, 스님의 공양
봄이 되면 마트나 백화점 식품코너에도 봄나물이 빽빽이 들어서지만, 우리가 사 먹을 수 있는 나물은 극히 일부다. 이 시대의 스콧 니어링이자 헬렌 니어링이라고 할 수 있는 유기농 농부 10인의 소박한 밥상을 기록한책 <농부의 밥상>을 보면 농부들이 제철 식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상세한 묘사가 펼쳐지는데, 푸성귀가 가득한 밥상이 그렇게 입맛을 당기게 할 줄이야. 농부들은 이야기한다. 봄에는 산나물에 취해 있느라 상추 같은 건 먹을 시간이 없다고. 특히‘귀전우’라고 부르는 산나물이 맛있는데“시퍼렇게 삶아서 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완전히 죽여준다”고 한다. 농부들이 읊어주는“싸브리하면서도 맛있는” 낯선 나물을 듣다 보면 냉이나 달래가 시시하게 느껴진다. 사찰 음식을 소개한 책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선재 스님의 사찰 음식>은 절에서 해 먹는 채소 요리를 사계절로 나눠 쉽고 자세히 적고 있다. 특히 재료부터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약이 되는 재료부터 손질법을 꼼꼼히 적어 놓았는데 단아한 불가의 음식의 면면에 마음을 뺏긴다. 원추리처럼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부터 스님 같은 채소 전문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재료까지 다양한 봄 음식을 알 수 있는 이 책은‘계절별 음식 도감’에 가깝다. 두릅으로 담근 물김치나 죽순탕처럼 개운하고 순한 음식이 겨우내 지친 몸을 깨운다.

농부와 스님처럼 나물인지 잡초인지 볼 줄 모르는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채집 음식 전문점이나 한정식집에 가서 봄이 가져다준 맛을 느껴보곤 한다. 채집 음식은 인위적인 재배 없이 바다와 땅의 것을 자연스럽게 거둔 재료로 만든 음식을 말한다. ‘클럽 모우’는 본격적으로 채집 음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봄에는 나물을 주 재료로 한 정갈한 코스 요리를준비한다. 장충동에 위치한‘ 전원’은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곳이지만 늘자리가 없어 무조건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가운데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곳이다. 점심상이 3만원으로, 처음에는 고기 한 점 나오지 않는 것치곤 비싸단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네모난 나무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음식에 정신없이 손이 가고 나서는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주인이 고기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제철 해산물 외에는 모두채소를 재료로 상을 차리는데, 산나물에도 훤해서 갈 때마다 새로운 이름 하나씩을 알게 된다. 여름에는 병어회, 가을에는 전어회, 겨울에는 굴이 등장하고 봄에는 도다리회나 오이 나물과 함께 버무린 주꾸미 숙회가 오른다. 어느 봄날, 이곳에서 땅두릅을 처음 먹어봤다. 나무에서 꺾는 두릅도 진한 향을 자랑하지만 땅에서 자라는 땅두릅의 향은 그 이상이다. 진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태초의 맛에 몇 번이나 더 청해 먹었다. 땅두릅도 햇쑥이나 죽순처럼 갓 올라온 여린 순만 먹을 수 있어서 봄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거창한 별미가 아니더라도 달래 넣은 된장, 살짝 양념만 한 냉이나물 한 접시면 몸과 마음에 봄이 든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쓴 작가 겸자칭 생계형 낙시꾼인 한창훈은 이렇게 말했다. 한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 번도 못 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