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나이를 세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일 거다. 태어나 가장 먼저 기억하는 명절 음식인 떡국. 떡국은 정결한 마음으로 풍요로운 새해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음식이다. 설 밑에 서서 흰떡이 푸근하게 담긴 떡국을 떠올렸다.

비록 설에 고향도 못 가고 혼자 있더라도 떡국 한 그릇은 필요하다.

비록 설에 고향도 못 가고 혼자 있더라도 떡국 한 그릇은 필요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과 함께 종합 선물 세트처럼 듣곤 하는 인사는 떡국은 먹었냐는 것이다. “식사하셨어요?”가 “안녕하세요?”와 이음동의어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나라는 떡국 그릇으로 나이를 세기도 한다. ‘신정’이라 부르는 1월 1일과 ‘구정’이라 부르는 음력 설이 무게 다툼이 한창이던 때엔, 1년에 두 번 꼬박 떡국을 끓였고, 그때마다 떡국 인사를 건넸었다. 하지만 기나긴 다툼 끝에 구정이 설의 적자임을 인정받은 후부터는 떡국은 음력 설에만 먹는 음식이 되었고, 떡국 먹었냐는 인사는 가족과 함께 보낸 명절을 단란하게 보냈냐는 긴 질문의 축약본처럼 되었다. 본래 예로부터 하던 것이면 흉내라도 내야 하는 가풍 속에서 자란 까닭에 설과 추석이면 늘 차례상을 보고, 대보름이면 다만 호두 몇 알이라도 깨고, 동짓날에는 팥죽을 사서 먹곤 한다. 그런데 설이나 추석처럼 빨간 날이 죽죽 이어지는 명절이 아니라면, 늘 음식을 먹고 나서야 그날인 줄 안다. 약과나 묵은 나물을 한참 먹다가 뒤늦게 정월대보름인 줄 알고, “내 더위 사가라!”를 외치곤 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명절이라서 명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명절 음식을 먹어야만 명절인 줄 알게 되었다니 뭐가 바뀌긴 바뀌었다. 조상님들은 지하에서 개탄하실지는 몰라도, 긍정적으로보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본래의 뜻을 기리고 있는 것 아닐까. 얼마 전 동짓날엔 뷰티 에디터의 시어머니가 잔뜩 쑤어준 팥죽을 먹으며 누군가 물었다. “도대체 왜 동짓날엔 팥죽을 먹는 거지?” 쫄깃한 새알심을 넘긴 다음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밤이 제일 긴 동짓날은 귀신이 좋아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붉은색의 팥죽이 귀신을 내쫓는다고 믿었기에, 이 팥죽을 한 솥 끓였다. 대접에 담아 집안 곳곳에 올려놓고, 식구들은 물론 가까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문이나 벽에 팥죽을 뿌리곤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나도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까닭에 아파트 외벽에 팥죽을 바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화전을 부쳐 먹을 진달래가 없고, 송편을 찔래도 솔잎마저 사야 하고, 집집마다 떡시루와 콩가루가 사라진 요즘이라, 명절 음식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수선스럽고 바빠도 우리 최대 명절인 설을 잊는 사람은 없다. ‘원단’, ‘세수’, ‘신일’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일 년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삼가다’, ‘설다’, ‘선다’라는 뜻에서 ‘설’이라는 말이 다시 생겨났다. 추석과 함께 가장 큰 명절이니, 명절 음식도 가장 많다. 우선 설은 추석과 함께 차례를 지내는 단 두 번의 명절 중 하나고, 그 말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린다는 뜻이다. 부모님을 졸라 옛날 명절이야기를 들어보면, 눈앞에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엄마를 따라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재래시장 등에서 필요한 재료를 한번에 구입해 집에 돌아와 뚝딱뚝딱 차려내는 게 요즘 명절상이라면, 과거에는 몇 달 전, 며칠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가을걷이를 할 때도 가장 좋은 대추, 가장 좋은 곶감을 ‘제수용’으로 미리 보관해두곤 했고, 설이 임박하면 쌀을 빻고, 참기름을 짜고, 떡을 뽑는 등 본격 설 음식 준비에 들어 갔다.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어머니는 설을 ‘조청의 추억’으로 기억한다. “흰 가래떡도 뽑고, 쑥을 넣은 쑥가래떡도 뽑지. 그리고 미리 조청을 만들어. 조청이란 건 쌀가루와 엿기름을 삭히고, 졸여서 만드는 건데, 식혜를 계속 졸여서 만드는 셈이지. 단것이 없고 설탕이 귀하던 시절엔 참 달콤한 간식이어서 남매들이 다 좋아했어. 조청은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달여야 완성이 되는데 그 냄새가 그렇게 좋아. 갓 뽑은 가래떡을 슬쩍 구워서 조청을 찍어 먹는 맛이 설빔보다 좋아서 설을 기다리곤 했지. 가래떡은 금방 뽑으면 말랑말랑해서 안 썰려. 찬 데서 꾸덕하게 말려서 작두로 썰어서는, 설부터 떡이 떨어질때까지 떡국을 끓여 먹었지.”

설에 차리는 음식인 세찬은 지방마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떡국을 먹는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절에 반드시 떡을 하는 건 우리나라가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 사회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설날의 떡국과 추석의 송편이지만 다른 명절에도 떡을 챙기자면 끝이 없다. 2월 초하루 중화절에는 노비 송편, 3월 삼짇날엔 진달래 화전, 4월 초파일에는 느티떡, 5월 단오에는 수리취절편, 6월 유두에는 떡수단, 9월 중구절에는 국화전, 음력 10월에는 시루떡을 만들었고 동짓날엔 새알심을 빚었다. 지금은 명절 때면 떡집으로 향하지만, 1950년대만 해도 설 밑이면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떡메 치는 소리가 명절이 오는 소리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떡 중에 가장 담백하고 정갈한 맛을 내는 흰 가래떡을 먹는 것은 흰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깨끗하게 시작한다는 의미고, 긴 가래떡을 먹는 것은 재산과 수명이 늘어나길 기원하는 의미였다. 엽전처럼 동글납작하게 썰어 새해에 재복을 가져다주길 바랐다. 개성 지방에서는 독특하게 조롱박 모양의 조랭이 떡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건 어린 아이들이 설빔에 조롱박을 걸고 다니면 불운을 막아준다는 풍습이 반영된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는 흰 떡과 꿩, 닭, 쇠고기를 이용해 떡국을 끓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완성된 떡국은 그릇에 담아 육수를 우리고 남은 고기를 죽죽 찢어 따로 양념해 올리고 달걀 지단으로 장식했고, 고기와 파를 번갈아끼운 파산적을 올리기도 했다.

떡국 재료를 마련했으면 다음에는 전을 부친다. 예로부터 명절에는 기름냄새가 돌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기름 냄새는 전 부치는 냄새다. 기름 넉넉히 두르고, 불만 잘 맞추면 온갖 전을 부칠 수 있다. 손은 많이 가지만 일단 재료만 준비해두면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이 전. 두부를 부친 것 한 판, 빈대떡 한 판, 그리고 생선이며 쇠고기며, 버섯 등을 달걀물 곱게 씌워 붙여내는 모둠전이면 명절 준비 다 했다 싶다. 또 전은 어머니가 딸과 일손을 나누는 첫 번째 명절 음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간 쇠고기전과 생선전, 표고버섯전을 부치다 최근에는 간, 허파, 고추, 육전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자, “시집가서 이런 것도 안 해봤다고 할까 봐 이것저것 부치기로 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전은 엄마 손끝에서 딸 손끝으로 이어지는 명절 음식이 맞는 것 같다. 집집마다 즐기는 전도 다르지만. 먹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집은 간장만 찍고, 어떤 집은 초간장을, 파무침을 곁들이기도 하며,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다는 집도 본 적이 있다. 보통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의 설상은 떡국과 전, 삼색나물, 나박김치에 식구들의 입맛에 따라 갈비찜 등을 곁들이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차례를 지낸다면 ‘조율이시’인 대추, 감, 배, 밤부터 포, 산적, 생선 등 준비할 것이 훨씬 많아진다. ‘조율이시’가 차례상과 제사상의 기본이 되는 이유는, 대추가 암수 한 몸인 나무라 열매를 많이 맺고, 씨가 한 개여서 다산과 절개를, 처음 싹을 틔운 밤톨을 그대로 간직하는 밤나무가 자신의 근본을, 배의 흰 속은 순수함을, 감은 부모님의 은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 차례상에는 반드시 한과를 올리는 데, 특히 약과를 놓는 건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온 풍습이다. 제사 음식에는 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요즘 지키는 사람은 잘 없다.

명절 음식이 가벼워지는 건 같은 명절을 보내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12월 31일에 메밀국수를 먹고, 설에는 늘 먹는 쌀밥대신 3단 찬합에 담은 ‘오세치 요리’를 먹는다. 우엉, 연근, 새우, 다시마, 검은콩, 무 등을 달게 졸여 만드는 음식인데, 국물 요리가 없고 며칠 그냥 둬도 상하지 않는 음식이라는 게 특징이다. 신을 맞이하는 새해에 부산스럽게 불을 쓰면 한 해가 불길하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명절 음식이다. 보관이 가능한 음식인 까닭에 일본에서는 가정에서 설 음식을 준비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백화점이나 호텔 등에서 미리 오세치 요리 찬합을 사두는 데, 값비싼 도시락이 속출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다. 오세치 음식에도 재료마다 뜻이 있는데 연근은 지혜를, 새우는 장수를, 다시마는 행운을, 검은콩은 건강을 의미한다. 설에는 일본식 떡국 ‘오조니’를 함께 먹기도 한다. 네모난 찰떡을 구워서 어묵과 표고를 띄운 국물에 넣어 먹는 떡국으로 라멘처럼 간장 육수에 끓이기도 하고, 된장 육수에 끓이기도 한다. 일본에서 비교적 조용히 설을 맞이하는 것과 달리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민족 대이동이 벌어진다. 고향으로 가는 차편을 잡기 위한 투쟁이 험하고 고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차표을 꼭 쥐고 고향에 안착한 사람에게는 설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지역마다 음식 문화가 많이 다르지만 만두를 빚고, 찹쌀떡이나 무떡, 복숭아탕을 먹는 것은 비슷하다. 그 외에도 중국의설 음식은 부나 재물, 건강 등과 발음이 비슷한 재료를 먹을 때가 많다. 부유하다는 뜻과 발음이 비슷한 오렌지와 상추, 소유한다는 의미와 발음이 비슷한 자몽, 희망과 발음이 비슷한 생선이 상에 오른다.

세상이 바빠지고, 고향의 의미가 퇴색하고, 식구 수가 줄어들면서 명절도 가족들의 단란한 식탁을 보낸다는 의미에 무게가 더 실린다. 사진 한장 담기지 않았으면서도 20만 부 이상이 팔린 전설의 요리책,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은 설날 음식에 대해 당부한다. “떡국 또는 만둣국, 전 종류, 찜 종류, 구이, 나물, 식혜나 수정과, 떡, 과일 등이면 될 거다. 떡국을 끓일 때는 국물을 많이 넣고, 떡국떡은 찬물에 담갔다가 국물이 펄펄 끓을 때 넣고, 떡이 떠오르면 계란에 참기름을 한 방울 넣어 잘 저으면 된다. 대파도 어슷하게 썰어 넣고. 만두를 싫어하는 분도 있기 때문에 나는 만두는 따로 만들어 미리 쪄 놓은 후에 원하시는 분한테만 넣어드리지.” 과연, 명절은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