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낯선 듯 익숙한 해방촌을 찾았다. 오래된 연립주택과 모던한 카페, 전통 시장과 독립출판서점, 중동 사원과 주스바 … . 이질적인 것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해방촌 거리를 깊숙이 걸었다.

1 낡은 연립주택 사이에 그려진 그래피티 벽화들. 2 꾸미지 않아 더 멋진 라구 레스토랑에 걸린 꽃.

숙대입구역에서 출발한 용산02번 버스가 후암동을 지나면 해방촌에 다다른다. 낡고 오래된 집 옆으로 카페가 자리 잡았고, 벽면 그래피티 앞으로 리어카를 끄는 노인이 지나간다. 이질적인 풍경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 근사한 풍경이 되는, 조금은 야릇하고 그래서 더 매력적인 동네가 바로 여기 해방촌이다.  

이태원 경리단길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해방촌은 19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부터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월남 실향민들이 지금은 미국 관사로 사용하고 있는 일본군 육군 관사 건물을 차지했고 그 후 미군정청이 이들을 퇴거시키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평지와 가벼운 언덕에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섰지만 남산과 가까운 꼭대기 쪽은 여전히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 사이로 20년은 족히 넘었을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3 영화에서 제목을 따온 카페 린다린다린다. 4 디에스프레소룸의 셔터에 그려진 그림. 5 해방촌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한때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던 해방촌이 몇 년 전부터 천천히 달라지고 있다. 외국인들이 이태원과 한남동의 높은 물가와 임대료를 피해 흘러들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국적인 레스토랑과 카페, 펍들이 하나씩 들어섰고, 어느새 영어로 된 간판이 오랜 세탁소와 슈퍼마켓 사이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해방촌을 자주 찾는다는 그래픽 디자이너 김준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태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어요. 밥이든 술이든, 거품이 빠진 합리적인 가격도 빠뜨릴 수 없죠.” 김무용 대표는 분당에서 경영하던 레스토랑을 접고 지난 여름, 해방촌에 레스토랑 라구를 오픈했다. “이태원도 알아보고 한남동도 알아봤는데, 아직은 조금 한적한 특유의 분위기에 반해 해방촌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분당에서는 연령대가 있는 분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이곳은 확실히 젊은 분들이 많아요. 요리의 어떤 부분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의견도 빠르고 분명하죠. 지낼수록 재미있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맛집과 핫플레이스로 대변되는 가게들이 즐비하지만 다른 볼거리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108계단이다. 용산구청이 추진한 아트 빌리지, 담장 허물기 사업이 올 초 마무리되면서 108계단을 비롯한 동네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고 아기자기한 조형물이 설치돼 볼거리가 더욱 풍성해졌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도 자주 보이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에 바쁜 관광객도 눈에 띈다. 해방촌오거리에서 해방교회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나오는 신흥시장 역시 해방촌의 명물. 반찬가게와 정육점, 분식집, 야채 가게 등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이곳은 해방촌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자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통한다. 

해방촌오거리에서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다섯 갈래의 길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오묘하다. 어떤 곳은 힙한 아이템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또 어떤 곳은 수십 년 동안 간직한 전통을 묵묵히 이어간다. 씨실과 날실의 촘촘한 교차로 만들어진 직물처럼 해방촌에는 현대와 전통이 조화롭게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