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숲 위로 노을이 앉는다. 순천만에 곧 달이 뜰 것이다. 달의 움직임에 따라 순천만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진다. 서쪽 바다 끝자락에 있는 순천만은 그렇게 숨쉬고 있다.

용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순천만. 동그란 섬처럼 갈대와 염생식물이 자라는 모습은 생태 여행을 상징하는 풍경이 되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서쪽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갈대가 무성해진다. 그 길 끝에 순천만이 있다. 북쪽으로는 전남 구례를, 동쪽으로는 전남 광양을, 남쪽으로는 여수와 보성에 접해 있는 순천이지만 별량면만큼은 지도의 끝에서 파란 바다를 안고 있다. 굴곡은 심하지만 바다가 잔잔해서 스무 채, 서른 채 정도의 집이 모여 있는 작은 포구마을이 따뜻한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순천중학교와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한 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도 바로 이곳 순천만을 배경으로 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갯벌과 갈대가 어우러진 길은 왜가리를 비롯한 철새들의 휴식처다. 늦여름이 되면 초록이었던 칠면초가 붉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순천만 해안선의 길이는 39.8킬로미터. 세계 5대 연안습지로 손꼽히며 우리나라에서 갈대가 가장 많은 곳이다. 갯벌 면적만도 22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갯벌은 알려진 것처럼 온갖 바다 생물의 안식처다. 갯벌 의 터줏대감인 짱뚱어와 칠게, 농게, 방게부터 맛조개, 참꼬막도 산다. 게다가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아,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와 청둥오리, 검은머리갈매기, 노랑부리저어새, 민물도요, 큰고니, 혹부리오리, 왜가리 등이 여기서 겨울을 보낸다. 이들 철새들이 떠나면 봄과 가을에는 노랑부리백로, 도요 , 물떼새, 저어새 들이 찾아온다.

와온해변 앞에 작은 솔섬이 있다.

순천만의 시간

계절마다 달라지는 순천만의 풍경은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겨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순천만을 잠시 거닐다 마파람을 맞고는 황급히 여수나 벌교, 목포로 떠나지만 여름과 가을 순천만은 가장 예쁜 모습으로 변한다. 긴 겨울이 끝날 때쯤 순천만의 사람들은 갈대를 베기 시작한다. 그래야 봄여름에 갈대가 예쁘게 자라기 때문이다. 겨울 철새들이 이동하는 봄에는 봄 꽃이 화사하게 피고, 여름 갯벌은 이글이글 타오른다. 8월에서 9월에는 온 순천만을 붉은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칠면초의 차례다. 원래 염생식물인 칠면초는 본래 초록색이었다가 색깔이 변한다. 벼이삭처럼 갈대밭이 황금빛으로 익기 시작하는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온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한겨울 이른 새벽에 순천만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바랜 갈대밭 위에 김승옥이 공들여 묘사한 안개가 끼는데, 그 때만큼 아름다운 때가 없다고 한다.

순천만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용산전망대다. 남도삼백리길 중 1코스에 해당하는 길이기도 하다. 산 위에 올라 순천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위치다. 용산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다른 지대가 워낙 낮아 전망대로서 손색이 없다. 동그란 수풀이 점점이 놓인 순천만 풍경은 모두 이곳에서 바라본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순천만의 ‘S자 물길’을 보려면 물때가 맞아야 하는데 순천만생태공원사무소에서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곳에서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순천만의 일몰을 볼 수 있다. 갈대밭 사이에 꼬불꼬불하게 놓인 길을 따라 용산전망대로 향하면 ‘다리 아픈 길’과 ‘사색하기 좋은 길’로 나뉜다. ‘다리 아픈 길’은 계단으로, ‘사색하기 좋은 길’은 완만한 경사의 흙길인데 소요 시간은 별 차이가 안 난다. 중간중간 놓인 의자에 앉으면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순천에서 머무는 이틀 동안 전망대에 올랐다. 같은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 하늘처럼 순천만도 그랬다. 단, 노을 보는 재미에 늦게까지 머물다가 어둠 속에서 산길을 내려와야 하니 주의하길. 여우라도 나오면 어쩌나, 온통 깜깜한 산길을 마음 졸이며 걸어 내려온 수확이 있었다. 평지에 당도했을 때 수백 개의 별이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으니까. 달이 둥글게 뜨면 이 밤길도 밝다. 그 때문인지 순천만에는 천문대도 있었다. 밤에는 천체를 관측하고, 낮에는 지상망원경으로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갯벌에서 자라는 참꼬막

순천만의 이쪽, 순천만의 저쪽

순천만은 물길을 따라 다시 큰 바다로 이어진다. 순천만과 가까운 화포해변은 작은 마을 사이에 있다. 마을 주민들의 작은 배를 매어놓은 바다와 뻘, 갈대가 어우러져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와온해변은 순천만 건너편에 있다. 와온해변과 순천만 사이에 바다가 있다는 게 맞겠다. 차로 40분 정도 시골길을 달려야 도착하는 와온해변은 노을이 예쁜 곳으로도 유명하다. 와온해변 위에 서 있으면 작은 솔섬 너머 저 건너편에 방금 떠나온 순천만이 보인다. 와온해변에서는 갈대밭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뻘과 습지가 더 잘 보인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뛰고 있는 짱뚱어도, 한쪽 집게발을 치켜든 게도 보인다. 다른 한쪽에서는 마을 어른이 뻘 속에서 연신 낙지를 잡아 올린다. 뻘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도랑에도 하늘이 담겨 있다.

순천에는 딱 그것만 있다. 자연과 바다. 그리고 그 넉넉한 품에 안긴 수많은 생명. 그곳에서는 누구나 넉넉한 서쪽 바다에 잠시 기대게 된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안개는 없었지만 내가 본 순천만과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날도 같은 풍경도 없는 곳. 아침, 점심, 저녁마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곳.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각자 자신만의 순천만을 데리고 떠난다. 그건 해마다 이곳을 찾고 떠나는 철새도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