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의 세월을 버텨낸 신전의 기둥과 콜로세움이 건재한 도시 로마. 하지만 이 영원의 도시가 간직해온 최고의 미덕은 다름아닌 음식이다. 로마 사람들에게 정찬이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닌 친구, 대화, 그리고 인생에서 누려야 할 호사 중 하나를 의미하니까. 그래서 로마의 정찬 테이블을 순례했다.

하슬러 호텔의 테라스에 서면 르네상스 후기에 지어진 교회인트리니타 데이 몬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슬러 호텔의 테라스에 서면 르네상스 후기에 지어진 교회인
트리니타 데이 몬티가 한눈에 들어온다.

로마 정도의 역사를 가진 도시쯤 되면 거의 모든 레스토랑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자랑하기 마련이다. 레스토랑 ‘알 모로(Al Moro)’도 그중 하나다. 한 이탈리아 주재 외교관에게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묻자 그가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한 곳도 알 모로였다. 로마의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유명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곳이지만 다행히도 알 모로의 훌륭한 음식과 서비스는 정치인만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로마에 오자마자 한 일도 알 모로의 좌석을 예약하는 일이었다. 예약한 날짜에 맞춰 말이 잘 통하는 현지인 친구를 찾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음식이 대화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 로마에서는 밥을 먹을 때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도무지 이야기를 멈출 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인 안드레아 푸르가토는 로마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디너 파트너였다. 그가 좋아하는 레스토랑 중 한 곳인 ‘세티미오 알라란치오(Settimio all’Arancio)’에서 정찬을 함께 하면서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지! ‘알 모로’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 이도 다름아닌 그다. 영화 <길(La Strada)>과 <8과 1/2(Otte Mezzo)>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길거리 캐스팅을 했던 인물 중 한 명이 알모로의 오너 트리말치오였다는 내용이었다. “1969년에 만든 영화 <사티리콘(Satyricon)>의 주객 역할이었죠. 그런데 알 모로의 주인장은 정작 대사를 외우는 데 재능이 없었던 거예요. 결국 감독이 목소리는 더빙하면 되니까 아무런 말이나 해보라고 하자 이 레스토랑 주인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부카티니 알라마트리치아나, 스파게티 알레 봉골레, 폴로 아로스토!’ 하고 레스토랑 메뉴를 외쳤다는 거예요. 이후 그의 대사가 더 늘어났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탈리아식 농담 앞에 어떻게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안드레아의 이야기는 레스토랑에 얽힌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정부의 뒷담화까지 범주를 가리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나도 내가 만났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명망 있는 이탈리아 정치가 가문의 남편과 결혼한 그녀는 내가 모던한 건축과 세련된 요리가 역사적인 풍경과 조화를 이룬 로마의 인상적인 풍경을 칭찬하자 따끔하게 충고했다. “21세기의 로마에 현혹되지 마세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전통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머지 늘 똑같은 해변에 가서, 역시 지난번과 똑같은 비치 파라솔 아래에 누울 정도인걸요!”라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드레아는 수십 년간 투스카니 지역의 작은 마을 카팔비오(Capalbio)에서 사용하던 파라솔 번호를 댔다. 의기양양하게 “한번 지정석은 ‘영원한 지정석’이라고!”를 외치면서 말이다.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년에 9백만 명이나 되는 관광객을 맞이하면서도 로마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기적은 이런 로마 사람들의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 시장의 가판대를 보면 정통 로마 요리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다. 이를테면 음식을 완성해줄 이 레몬들처럼!2 얼핏 보면 카르보나라 스파게티와 비슷하지만 다른 치즈와 돼지고기를 사용하고 레드페퍼로 간을 한 ‘알 모로’의시그니처 메뉴인 ‘스파게티 알 모로’를 만드는 데 열중한 셰프. 3 로마 사람들은 보통 피자를 점심으로 먹지 않고이동 중 가벼운 스낵으로 즐긴다. 4 소시지, 버섯, 그리고 계란을 얹은 피자를 맛볼 수 있는 ‘바페토’의 테이블을장식한 피자. 알루미늄 식기가 멋스럽다.

1 시장의 가판대를 보면 정통 로마 요리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다. 이를테면 음식을 완성해줄 이 레몬들처럼!
2 얼핏 보면 카르보나라 스파게티와 비슷하지만 다른 치즈와 돼지고기를 사용하고 레드페퍼로 간을 한 ‘알 모로’의
시그니처 메뉴인 ‘스파게티 알 모로’를 만드는 데 열중한 셰프. 3 로마 사람들은 보통 피자를 점심으로 먹지 않고
이동 중 가벼운 스낵으로 즐긴다. 4 소시지, 버섯, 그리고 계란을 얹은 피자를 맛볼 수 있는 ‘바페토’의 테이블을
장식한 피자. 알루미늄 식기가 멋스럽다.

로마에서 정치와 음식은 종종 한 쌍이 되어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시칠리아의 사진기자 출신인 필리포 라 만티아는 마피아에게 경찰관 살해를 사주한 대가로 악명 높은 팔레르모 감옥에 수감됐다. 운좋게 출소한 이후, 사진이 아닌 요리에 열정을 불태우던 라 만티아는 결국 2003년, 로마에 ‘트라토리아(Trattoria)’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레스토랑의 문을 연다. 그리고 양파와 마늘 대신에 시트러스를 사용하는 그의 요리는, ‘시칠리안 음식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평을 들으며 그를 요리계의 슈퍼스타로 등극시켰다. 미니멀한 목재와 석재를 사용하고, 유리벽을 사용해 다이닝룸에서 주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그의 레스토랑처럼 세련된 요리와 건축 스타일을 조합한 레스토랑이 로마 곳곳에 생겼음은 물론이다. 범죄와 요리의 만남은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이자 부패한 정치인인 베를루스코니는 점점 안 좋아지는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레스토랑은 꽉 찼던 걸, 뭐”라고 답하지 않았던가. “어디 한번 보자”라는 태도로 식사에 임하는 프랑스인과 달리, 이탈리아 사람들은 테이블에서 음식에 대해 논하는 것을 즐긴다. 이들은 요리사를 향해 축배를 들고, 스태프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날 있었던 좋은 일과 나쁜일에 관해 떠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스토랑과 메뉴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개인적인 음식 취향까지 스스럼 없이 밝히기도 하는 게 바로 이탈리아 사람이다. 마치 자신이 이 요리가 만들어지기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 안드레아와의 디너는 이런 로마식 식사의 완벽한 예시였다. 그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은 물론, 여러 손님과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의 메뉴에 관한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소금으로 간을 한, 먹음직스럽게 살이 오른 생선을 주문하더니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는 웨이터에게 ‘지난주에 마신’ 빈티지 와인을 주문했다. 놀라운 사실은 웨이터가 정확히 그 와인을 기억했다가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현재 로마에서 제일 잘나가는 레스토랑이라는 ‘아가타 에로메오(Agata e Romeo)’에서 보낸 시간도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이 떨릴 정도로 콧대 높은 가격표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이 레스토랑은 처음 도착했을 때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에 견줄 정도로 우아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하지만 레스토랑의 매니저인 로메오와 그의 아내이자 셰프인 아가타가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분위기를 주도하자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축제처럼 흥겨워졌고, 여느 이탤리언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로 변모했다.

1 레스토랑 ‘아르만도 알 판테온’의 시그니처 디저트인‘딸기로 속을 채운 리코타 파이’.2 ‘카페 델라 파체’는19세기부터 음식, 음료,대화를 즐길 수 있는로마인들의 메카로자리해왔다.3 콜로세움을 배경으로웨딩 사진을 촬영하는신혼 커플.4 아티스트의 그림, 또는작품을 파는 아티스트들,관광객들, 로마 시민들로가득한 트리니타 데이몬티 광장.

1 레스토랑 ‘아르만도 알 판테온’의 시그니처 디저트인
‘딸기로 속을 채운 리코타 파이’.
2 ‘카페 델라 파체’는
19세기부터 음식, 음료,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로마인들의 메카로
자리해왔다.
3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웨딩 사진을 촬영하는
신혼 커플.
4 아티스트의 그림, 또는
작품을 파는 아티스트들,
관광객들, 로마 시민들로
가득한 트리니타 데이
몬티 광장.

의 속살을 드러낸다. 거리를 걷다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광장, 열린 문 틈새로 살짝 보이는 근사하게 가꿔진 정원, 숨이 멎을 정도로 우아하고 엄청난 규모의 적벽색 건물과 높다란 나무를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 기차역과 콜로세움사이에 자리한 몬티(Monti)는 작지만 글로벌한 거리로, 현재 로마의 모습을 가장 잘 투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훌륭한 인도와 태국, 일본과 중국 음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을 비롯한 근사한 레스토랑이 가득한 이 지역에서 최근 주목받는 레스토랑은 다름아닌 ‘우르바나 47(Urbana 47)’이다. 지역에서 난 식재료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정평이 난 이 레스토랑은 행정상 로마가 속해 있는 ‘라치오(Lazio)’ 지역에서 난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창조적이고 단순하면서도 계절에 맞는 요리들이 주를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세련된 거리로 변모하고 있는 몬티에도 여전히 로마다운 구석은 남아 있다. 자신이 훌륭한 노동계급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고기는 좌파 정치인들에게만 판매하는 한 정육점 주인처럼 말이다. 예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조르지오 나폴리타노가 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제법 의미심장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로마에 도착한 순간부터 기대에 부풀게 했던 ‘알 모로’에서의 식사는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았다. 음식은 하나같이 훌륭했지만 도무지 누구도 나에게 “안녕하세요. 오늘 들여온 근사한 올리브 오일에 대해서 설명해드려도 될까요?”라고 말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친밀하고 활기찬 로마에서의 식사를 몇 번 경험한 나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이탤리언 레스토랑이 미국인을 홀대하는 데 한몫한 것이 바로 2년 전 개봉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탈리아의 음식과 풍요로움을 찬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반감을 샀는지, 그 이유는 이탈리아의 정치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에 실렸던 내용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외국 여자들에게 추근대다가도 마마보이처럼 엄마가 고른 여자와 결혼을 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편견이 가득했다는 거다. 하지만 정작 로마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영화의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이탈리아어를 배운 줄리아 로버츠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어로 음식을 주문하는 장면이다. 주문에는 성공하지만 웨이터와 대화를 시도하거나 그를 현지 친구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주인공이 이탈리아 음식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멀었군’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몬티 거리에서 만난 소년의 티셔츠에는 ‘이탈리아인으로 살지 않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Life is Too Short Not to be Italian)’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곳에서 누린 먹고 대화하는 것의 기쁨을 생각한다면, 어쩜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로마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번쯤 해봤다면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