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기자, 여행작가와 소설가, 그리고 드라마 작가. 고백하건대, 우리 모두는 이들의 팬이다. 다섯 작가가 여행을 떠났고 또 돌아와 새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작정 기다리기엔 너무 목이 말라서, 한 장만 보여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귀하게 얻어낸 작가들의 여행 미리 보기.

산티아고, 궁하면 통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정확히 말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가기 위해 배낭을 꾸렸던 게 꼭 1년 전이다. 2년 가까이 준비했던 드라마 <제중원>이끝나자마자 난 그동안 고생한 내게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선물을 주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결정이었다. 산티아고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순례자들은 보통 6개월 전부터 한 달이 넘게 이 여행(또는고행)을 준비한다고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각종 여행 정보도 교환하고, 때론 배낭을 꾸려서 하루 20km 가까이 걷기도 하며, 심지어 기본적인 스페인어 회화 공부까지 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의 생 장 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장장 800km(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와 비슷하다)를 매일 스페인 사람과 부대끼며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마음의 준비’만 달랑하고 무모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15kg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 프랑스에서 첫 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후덜덜’거렸고,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내 자신에 대한 ‘선물’을 준 행위나 받은 행위 모두를 후회했다. 거의 일 년간 집필에 매진하느라 작업실 밖으로 나가지 못해 내 몸은 그야말로 ‘저질 체력’이었고, 심지어 몸무게마저 15kg나 불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걸어도 무릎이 아픈 판에 30kg(반은 등에 지고, 반은 몸으로 찌워서)를 더 메고 가려니 관절이 이탈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거기서 돌아갈 순 없었다. 우선 배낭 무게를 줄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생명과 관계없는 순으로 물건을 버리면서 갔지만, 3일 동안 2kg도 채 버리지 못했다. 결국, 넷북과 카메라 같은 돈 되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무게가 결코 줄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눈물을 머금고 그것들을 버림으로써 내 목숨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순례자를 위한 위대한 서비스’를 만났다. 나처럼 무턱대고 산티아고로 떠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바로 그런 순례객들을 위해 우체국에서는 집으로 물건을 보낼 수 있는각기 사이즈가 다른 종이 박스를 구비해놓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큰 박스를 구입해 넷북을 포함하여 6kg이나 되는 짐을 서울로 부칠 수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하중이 줄어들자 허리가 저절로 펴졌다. 그제야 난 산티아고 순례길의 아름다움 풍광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고, 거의 한두 시간 간격으로 나타나는 마을의 작은 바에서 생맥주와 와인의 낭만을 비로소 만끽할 수도 있었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의 핵심은 ‘먹고 자고 걷는’ 등의 원초적 단순성에 있다. 순례길을 3일만 걸으면, 집 생각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오늘은 뭐 먹고, 어디서 자고, 어디까지 걷지’ 하는 문제 외엔 관심이 없어진다(이런 단순성 때문에 신경정신병도 자연 치유가 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드라마를 집필하면서 받았던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졌고, 몇몇 사람에 대한 미움도 사라졌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해방되었 다. 물론 이런 건 있다. 순례를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스트레스와 고민, 두려움 등이 다시 원상 복귀한다는 것.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은 힘들지만 꿈같은 시간의 연속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만들어진 지 천년이 넘는다. 때문에 최근에 만든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 등이 따라올 수 없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 순례길을 걸어가면서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가톨릭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체국의 소포 서비스 외에 다양한 순례자를 위한 서비스가 존재한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버스와 택시는 기본에 속한다. 걷다가 힘들면 이동수단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순례객들은 일단 걷기 시작하면 다른 이동수단은 불가능하다고 많이들 알고 있다. 또한 그래서 산티아고에 가고 싶어도 엄두를 못 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 순간부터 할 필요 없다. 정말 그곳은 궁하면 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무슨 극기훈련 장소로 생각해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쉽고 재밌는 길도없다. 가령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배낭을 메고 가기 싫다면, 바에서 택시로 목적지로 짐을 보내고 걸어가면 된다. 천년이란 시간은 순례자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잔머리’까지도 현실로 구현해놓은 것이다.

순례길 중에는 가파른 경사를 13km나 올라서 1300고지에 이르는 구간이 있다. 꼬박 하루를 잡아야 하는 이 길은 순례길 후반에 위치하기 때문에이만저만 난코스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나라시 택시(자가용 택시 영업)를 이용할 수가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알베르게까지 사람이면 사람, 짐이면 짐 선택해서 올려 보낼 수가 있다. 그리고 순례길 말미에는 아예 짐을 부치고 편히 걸으라고 아주 싼값에 짐을 옮겨다 주는 택배 서비스까지있다. 또한 걸어가는 도중에 호객을 위해 나온 알베르게 주인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 알베르게에 묵겠다고 하면 짐을 실어다 주기도 한다. 걷기도 많이 걸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다양한 이동 서비스를 활용하지 않았다면 순례길에서 낙오를 했을 것이다.

산티아고 순레길은 인생의 길에 많이 비유가 되는데, 인생이 어디 걷기만 할까, 때론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타고, 정말 가끔은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가기도 하는 것이 진짜 인생이지(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아무튼 이쯤 되면 누구나 ‘나도 가겠다’ 맘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언어 문제 때문에 다시 한번 망설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은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궁즉통’으로 해결된 다. 한 달여를 걷는 동안 순례객들은 바에서 알베르게에서 하루에 몇 번씩 똑같은 스페인어를 듣게 된다. 때문에 일주일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간단한 회화가 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면 주문은 물론 에누리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순례 끝물에는 스페인어가 모국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스페인어는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 여행 중에서 꿈꾸는 한 가지. 로맨스.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다. 왜냐? 산티아고는 ‘기다란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한번 만난 사람과 계속 같이 걸어갈 수밖에 없고, 대개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되며, 헤어지더라도 어느 순간 다시 만나는 ’신비의 길‘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산티아고 로맨스의 수혜자다. 하지만 그 얘기는, 로맨스 역시 ‘궁하면 통한다’는 말로 대신하며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책을 사보라!).

글 | 이기원 <하얀거탑>, <제중원> 작가, 사진 | 변정식

미국 사막지대, 그 4천 킬로미터를 기록하는 아홉 장면

#1. 텍사스 서쪽 끝 고원지대, ‘태양의 땅’으로 불리는 엘 파소의 햇살이 절정을 이룬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눈꺼풀은 곧 주저앉을 듯 간신히 버티고 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는 4륜구동 미드사이즈 SUV. 내비게이션을 앞 유리창에 부착하고, 트렁크에 짐을 싣고, 지도에서 고속도로 번호를 확인하고, 주소를 입력하고, 길게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시동을 걸었다. 잠을 포기한 직후부터 계속 마셔댄 커피가 패잔병의 어깨처럼 축 늘어진 몸에 카페인의 저력을 발휘한다. 아직은 괜찮다. 북쪽으로 160킬로미터.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2. 길은, 바짝 마른 땅에 봉긋이 솟은 풀과 수평을 맞추면서 그 끝을 하늘에 기대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수굿한 풀 옆으로 초록색 식물이 버틴다. 뒤편에는 낮고 평평한 돌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집도 사람도 없다. 간판도 현수막도 없다. 땅덩이는 지구 표면의 생김새를 가르쳐주려는 듯 완전히 열려 있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다. 그저 하늘로 뚫린 곳을 향해 곧장 달려가면 될 터이니. 사막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3. 사람들은 마치 사막의 캐러반 행렬처럼 조용하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옹색한 나무탁자 위에 주민들이 펼쳐놓은 수공예품을 둘러보며,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란다는 무성한 이파리의 초록색 나무 한 그루를 지나, 인디언 청년이 들고 나온 풍경화를 감상하며 계속 걸었다. 탈진한 노인들이 중도 하차하며 밑으로 내려갔다. 남아 있는 이들의 표정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열이 온몸의 세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비마저 인색한 황무지에서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늙어가고 또 죽어갔지만, 지금 바깥세상에서 온 손님들은 단 두어 시간 머무는 데에도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4. 사막의 꽃, 산타페.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교과서다. 광장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모두가 느긋하고 여유롭다. 헐렁한 카키색 바지와 리넨 셔츠. 꽃무늬의 긴 스커트와 어깨가 드러난 탱크톱. 사막의 중간색과 멕시코의 원색. 패션디자이너 랄프 로렌과 화가 프리다 칼로가 손을 잡고 만들어낸 작품처럼 중용과 열정의 감성이 산타페를 주도한다. 그 위로 자연의 빛이 내려앉는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그스름한 담벼락을 타고 들어와 광장 한복판에서 꽃을 피운다.

#5.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허수아비가 태양을 받으며 오롯이 서 있다. 오색 창연한 꽃다발이 쓸쓸한 무덤 곁을 지킨다. 십여 명의 인디언 남자가 말을 타고 벌판을 달려간다. 길 한편에는 뿔 달린 동물 하나가 죽은 채 널브러져 있고, 다른 쪽에는 한 떼의 양들이 마른 풀을 뜯어먹고 있다. 지평선가까이에 삿갓처럼 솟은 민가의 지붕이 보이고, 길 옆으로 기이한 형상의 돌 조각이 툭툭 나타난다. 나는 소원을 풀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먼 길을 돌아왔다. 나는 차 안이 떠나가도록 음악을 크게 틀고는 땅을 가로질러 달렸다. 하늘이 다가오고 구름이 빗겨간다. 이게 바로 자유라면 지금 나는 자유로운 게 맞다. 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를 만큼 가벼워져 있다면 이미 내 마음에 날개가 달린 것과 같다.

#6. 언덕 위까지 걸어 오르던 나는 속삭임을 듣는다. 바람이 스치고, 바위틈이 울리고, 풀잎이 바시랑거리는, 사각사각 살랑살랑 윙윙 부스럭부스럭…. 그리고 태양의 빛을 본다. 구름을 느끼고 땅의 냄새를 맡는다. 자연이 보내는 이야기들이다. 이때 또 하나의 ‘음(音)’이 보태진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피리 가락이다. 나는 지금 나바호 부족의 ‘탄생신화’ 어디쯤에서 머뭇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남자’와 ‘첫 번째 여자’, 그리고 코요테와 오소리와 함께 여러 색깔의 ‘다섯 번째 세상’에 막 발을 디딘 것일 수도 있겠다.

#7. 비탈이 점점 가팔라지더니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천둥소리만큼 요란하다. 희희낙락 내려가던 사람들은 그들의 힘겨운 얼굴과 마주치면서 멈칫한다. 그때 아찔한 비탈 아래쪽에서 당나귀 몇 마리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주저앉을 듯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등에는 물건이 한 가득 실리고 공원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 불쌍한 동물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 걱정을 해야 할 때다. 이정표 하나 없는 길. 몇 킬로미터쯤 왔는지도 모르겠다. 섬처럼 보이던 바위산의 윗면이 현저히 줄어들고, 암벽의 단면이 점점 몸 위쪽으로 넓어질 즈음, 나는 걸음을 멈췄다.

#8. 사막의 풍경에 이단자가 나타났다. 막막한 벌판 속에 콘크리트가 보인다. 마치 모래언덕과 바위산이 어딘가를 성곽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 같다. 누런 풀을 헤치고 고가도로가 겹겹이 포개졌다. 모래 틈으로 고층빌딩이 세워졌다. 무채색이던 자연에 오색의 광고판이 들어섰다. 삭막하던 벌판이자동차와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로 메워졌다. 이제 내 앞에는 높이 솟은 카지노호텔들이 그 현란한 몸뚱이를 완전히 드러냈다. 라스베이거스다.

#9. 시간은 얄밉도록 현재에 와 있다. 나의 사춘기와 청년기를 물들였던 책과 음악과 영화들, 그 시절을 버티게 해준 꿈과 공상들이 이 길 위에까지 따라와 고마운 동행자가 돼주고 있지만, 나는 새로운 감상에 젖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뭉클해 뒤돌아볼 새가 없다. 비록 몸과 마음도 쉽게 지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서 넘어야 할 산이 더 크고 힘겹게 보이지만, 어디선가 찬란한 햇빛이 튀어나와 아름다운 삶의 중반을 두 손 벌려 환영해줄지 모른다. 고요한 모하비 사막. 지금의 내게는 희망의 종착역으로 가는 반가운 길목이다.

글과 사진 | 김영주 <토스카나>, <캘리포니아> 여행작가

실트호른, 수리수염의 둥지

날씨를 확인하고 올라와도 알프스 정상의 날씨는 변덕스럽게 바뀌기 일쑤다. 인터라켄에서 출발해서 라우터브루넨에 도착하고, 다시 뮈렌에 오기까지, 하늘은 일관성 있게 흐렸다. 뮈렌에서 버그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도 흐린 하늘 속을 통과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희뿌연 연기 속으로 케이블카가 움직였다. 물론 내가 상상했던 실트호른은 눈부신 햇살로 빛나는 설산이었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을 게 뻔했다. 기대를 접고, 비가 오면 와라, 눈이 오면 와라, 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으니 반전이 일어난다. 케이블카가 안개 속에서 한번 휘청, 하고 춤추더니, 장막이 걷히듯순식간에 환한 하늘이 나타난다.

버그역에서 나를 맞아준 것은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눈사람이다. 세 덩어리니까 머리, 가슴, 배가 자동적으로 떠올랐고 그래서 이 눈사람의 이름을 ‘곤충’이라고 붙였다. 곤충은 다른 눈사람과 달라서 장수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녹아 없어지던 여타의 눈사람들과는 출생 자체가 다르다. 다만,이 눈사람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을 것이다. 고독 말이다. 고지대의 해가지고 모두가 마을 아래로 내려간 후에도, 이 눈사람은 홀로 남아야 한다. 오늘도 밤이 오고 케이블카의 운행이 끝나면, 곤충은 고독해질 것이다.

해발 2,971m 높이의 실트호른(Schilthorn). 오래전, 누군가 뮈렌에서 실트호른까지 케이블카를 놓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다. 실트호른은 무언가를 설치할 수 있을 만한 봉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뮈렌 출신의 한 사람이 그것을 해냈고, 지금 케이블카는 인간의 의지와 힘을 운반한다. 그러나 실트호른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버그의 주인공이 녹지 않는 눈사람이라면, 실트호른의 주인공은 새다. 모든 사람이 카메라와 눈빛과 함성으로 잠시 실트호른을 만끽하고, 때로는 산소 부족을 느끼는 동안, 이 까만 새들은 자유자재로 여유로운 비행을 즐긴다. ‘Bartgeier’, 영어로는 ‘Bearded Vulture’, 우리말로는 ‘수염수리’라고 부르는 새다. 수염수리의 그 빠른 몸짓은 다른 모든 것을 배경처럼 만든다. 알프스의 흰 봉우리들이 수염수리 앞에서는 위용을 잃고 말없는 화선지로 전락한다. 이 까만새는 강렬한 비행 몇 번으로 화선지 위에 새까만 획을 긋는다. 인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알프스 따위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수염수리는 온전히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 바위벽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이 새들에게 실트호른 전망대는 온전히 하나의 둥지일 뿐이다.

360도로 회전하는 피츠 글로리아(Piz Gloria)는 ‘007 여왕폐하 대작전’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필름 속에서나 필름 밖에서나 이 회전 레스토랑이 보여주는 풍경은 여전하다. 피츠 글로리아는 머리 색이 다양하고 눈동자 색이 다양한 사람들을 가득 끌어안은 채 회전한다. 마치 자전하는 지구처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내가 선택한 것은 007 제임스본드 스파게티. 맛은 없지만, 아무도 음식 맛에 집중하지 않는 듯하다. 창밖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시각이 미각을 이기는 자리, 그곳이 피츠 글로리아다. 식탁과 창가가 분리되어 회전하기 때문에 창가에 가방을 두고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가방을 찾아 식당을 두리번거리는 풍경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가끔, 창밖으로 새까만 붓질을 하듯 수염수리가 난다. 얼핏 보면 대낮의 유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몸짓이다. 그것을 포착하려고 하지만, UFO처럼 찍힐 뿐이다.

실트호른의 높이를 실감하는 순간은 묘하게도 실트호른을 벗어나면서부터다. 케이블카가 실트호른을 출발해 다시 버그역에 도달한 순간, 귓속에서 무언가가 확 뚫리는 느낌이 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는 기압차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저 높은 곳에서 천상의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걸까, 한 단계 낮은 곳에 내려와서야 마취제가 효력을 다한 것처럼, 귀가 다시 맑아진다. 알프스의 수많은 봉우리를 향해 각 마을과 마을에서는 거미처럼 케이블카의 선을 뿜어낸다. 케이블카는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다. 왕자를 초대하던 라푼젤의 머리카락처럼 케이블카는 지상과 천상의 경계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설산과 초원이 몇 가닥의 단단한 선으로 이어진다. 케이블카를 운전하는 남자는 문 옆에 서 있다가 사람들이 타면 버튼을 누르고 책을 펼쳐 든다. 몇 분 후, 승객들이 내릴 때가 되면 다시 버튼을 누르고 책을 덮는다. 케이블카가 이동하는 시간은 단 몇 분에 불과하지만, 남자의 독서시간을 모아놓으면 우리가 왕래하는 거리만큼이나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만큼 긴 이야기가 승객들의 입에서 시작되고 있다. 언어는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할 것이다. 케이블카가 한 무리의 승객을 내려놓고 다른 무리의 승객을 태워도 또 비슷한 내용의 수다가 오갈 것이다. 그렇게, 알프스의 자연은 케이블카를 타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닳지 않는 전설로 퍼져나간다.

글과 사진 | 윤고은 <무중력 증후군>, <1인용 식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