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바람을 피해 서해의 작은 해안을 찾았다. 아직도 푸른색이 남아 있는 수목원을 걷고, 해안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들이 내뿜는 향기를 들이마시며 새해를 준비했다.

태안반도에는 수많은 작은 해변이 존재한다. 사구가 있는 신두리 해변의 겨울.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찬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막막한 겨울 바다가 여름 바다만큼 그리운 이유가 대체 뭘까 생각했다. 겨울에 먹어야제철인 수많은 해산물, 운이 좋으면 마주치게 될 눈 내리는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고요함. 겨울의 바다는 적막하다. 이 계절의 바다는 피서객도, 빼곡한 돗자리와 파라솔도, 호객꾼도 없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 적요함 속에서 우리는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새삼 바다가 얼마나 막막하고 거대한 대상인지 깨닫기도 한다. 약간의 스산함쯤이야 근처 식당으로 퐁당 뛰어들어가 뜨끈한 매운탕이라도 한 접시 들이켜면 금세 해결될 일이다. 그리고 적막과 고요가 겨울 바다를 찾는 가장 큰 이유인 사람에게, 태안은 훌륭한 선택이다. 서울에서 두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 이곳에는 해운대가 머금고 있는 도시의 번화함도, 강릉 바다의 분주함도 없으니까.

어떤 바닷가 동네를 찾더라도 해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과연 이곳에 바다가 있기는 한 걸까, 싶기 마련이지만 태안의 경우는 한층 더 그렇다. 눈이 내리기 전까지 태안의 겨울은 도무지 겨울 같지 않다. 안면송으로 이름난 소나무를 비롯해 편백, 측백 등 수많은 침엽수와 누런 갈대가 만들어내는 풍경 때문이다. 나지막한 산들이 도로 사이로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솔밭이 무성하니 아무래도 바다를 향해 가고 있다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해변을 하나 지나면 그 다음 바다가 계속 이어지는 곳이 태안반도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만리포 옆에는 천리포가, 천리포 옆에는 백리포, 그리고 십리포가 꼬리처럼 이어진다. 해안사구로 유명한 신두리 해변과 학암포도 이들 바다와 멀지 않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안면도와 꽂지가 있고, 그 중간쯤에는 몽산포, 달산포 등 비슷한 이름의 바다가 또 있다. 각각의 바다 표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겨울철 식사를 할 만한 가게와 식당이 문을 여는 곳은 많지 않다는 것은 비슷하다. 거듭 말하지만 태안의 겨울 바다는 고요하다. 그리고 차분함을 재킷처럼 걸친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바로 천리포수목원이다.

수목원에서 윤종신의 노래 ‘수목원에서’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연인과 찾았던 수목원을 혼자 찾았을 때의 감상을 차분하게 부른 이 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이 부분이다. ‘나 괜찮아요 여기 그대 없어도 혼자 걷는 이 기분 아주 그만인걸. 늘 그대 인생 푸른 날만 있도록 빌어줄게. 나 정말 편한 맘으로 찾아온 수목원에서’. 수목원이라는 공간의 정수를 궤뚫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가사 아닐까? 수목원은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은 장소다. 수목원의 맑은 공기는 마음을 손쉽게 정화하는 힘이 있다. 수목원이 아니라면, 어떻게 헤어진 연인과 왔던 장소에서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수목원과 겨울 바다는 닮은 구석이 있다. 고독을 권유한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태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천리포수목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세계수목협회에서 이 수목원을 ‘가장 아름답다’고 뽑아주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규모의 천리포수목원에 살고있는 식물의 수는 1만5천여 종이다. 수량이나 면적으로 봤을 때는 결코어마어마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수백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목련과 동백은 수목원의 자랑이다. 나무 에세이스트 고규홍이 쓴 <천리포에서 보낸나무 편지>에서 천리포수목원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게 한 것도 목련에 관한 글이었다.

‘천리포수목원은 목련 수집에서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설립자인 고 민병갈님이 1992년에 국제목련학회로부터 공로패를 받은 것도 이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겠지요. 그 많은 목련 가운데 단연 첫눈에 띄는 건 역시 큰별목련입니다. 흔히 보는 백목련이나 자목련과는 분위기가 영 다른 목련입니다. 꽃잎의 생김새부터 여느 목련과 다릅니다. 백목련이나 자목련과 달리 꽃잎이 가느다랗습니다.’

큰별목련, 불칸목련, 황목련 등 이름도 낯선 목련꽃에 대한 찬사는 수목원의 목련들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겨울의 수목원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건 뿔남천과 호랑나무가시 같은 겨울나무다. 윤기가 자르르하게 흐르는 짙은 초록잎과 빨간 열매가 눈에 띄는 호랑나무가시와 노란색 열매를 맺는 뿔남천은 겨울철 수목원의 주인공이다. 겨울에 수목원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열매와 꽃을 벗은 나무들 본연의 아름다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목원 안내를 도와준 최수진 팀장 역시 겨울 수목원 예찬을 망설이지 않는다. “정말 나무를 좋아하는 분들이 겨울에 수목원을 찾는 이유는 나무 자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나무들은 겨울에 진면목을 드러내기도 하거든요. 이 말채나무를 보세요. 선명한 붉은색과 노란색 가지가 마치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 같죠? 잎이 떨어지고 이 선명한 가지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이 나무에게는 가장 화려한 순간인 셈이죠.”

과연 이파리와 꽃을 덜어낸 나무 기둥과 가지들의 갖가지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같은 배롱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황토빛을 띠었고 어떤 것은 그보다 좀 더 짙었다. 어떤 것은 몸통이 짧아 같은 나무인지 알아보기 힘들기도 했다. 가을벚나무, 분홍색 몽실몽실한 꽃잎을 자랑하는 코튼 핑크도 있었다. 나는 겨울에 피는 벚나무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다. 눈에 띄는 건 커다란 나무들만이 아니었다. 길가에 심어놓은 작은 풀들의 잎파리를 구경하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똑같이 끝이 뾰족뾰족한 이파리인데 어떤 것은 오른쪽 방향으로 균일하게 톱니바퀴를 이루는 반면, 어떤 것은 불규칙했다. 바다에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곰솔을 비롯한 소나무, 가문비나무 등 갖가지 침엽수에 둘러싸여 있는수목원 내부는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따뜻한 서해의 난류의 기운을 품고 자라는 나무와 꽃들은 겨울을 몰랐다.

천리포수목원에 머무는 내내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파도 소리다. 수목원이 천리포와 인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와 숲이 이토록 가까이 붙어있는 수목원이 세상에 또 있을까?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규칙적인 바다의 박동은 수목원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수목원의가장자리에 마련된 해안전망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저 건너편에 있는 낭새섬이 보인다.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면 수목원에서 섬까지 걸어갈 수도 있어요. 닭 모양을 하고 있어서 닭섬이라고 불리던 섬인데 수목원 설립자인 민병갈 선생님께서 닭을 워낙 싫어하셨거든요. 이 섬에 바다직박구리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낭새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해요. 낭새는 바다직박구리의 다른 이름이죠.” 조수진 팀장의 설명이다. 금방이라도 한손에 잡힐 것 같은 섬이, 만조 때가 되면 무인도가 된다는 게 신비롭다.

사실 천리포수목원 이야기를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설립자인 故민병갈에 대한 이야기다. 천리포수목원이라는 장소 자체가 그가 일생을 털어 만든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한국을 처음 찾은 이후 ‘나는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심취한 그는 한국은행에서 투자컨설턴트로 일하며 벌어들인 거의 모든 수익을 수목원 설립에 쏟아부었다. 친형제처럼 지냈던 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칼’을 합쳐 ‘민병갈’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만든 그는 주말만 되면 서울을 떠나 천리포로 향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병실의 침대에 누워서도 천리포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니 그 마음을 받고 자란 천리포수목원의 나무와 풀들이 아름다울 수밖에. 군락을 이루는 수종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 걸음만 떼면 금세 다른 식물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규모에 비해 희귀종이 유독 많은 것도 전 세계의 수목협회 사람들과 서신을 교류하며 세계 각지에서 씨앗을 모으는 등 순수한 애착으로 가꾼 곳이 바로 천리포식물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곳은 정성스레 모은 수종들로 가득한 하나의 우표수집책과 같았다.

1. 수목원의 자랑 낙우송이 연못에 비친다. 2. 시장에서만난 물텀벵이. 3. 겨울에 붉은 열매를 맺는 호랑가시나무는천리포수목원의 주인공이다. 4. 박에서 우러난 국물이 시원한박속낙지탕. 5. 태안의 향토음식, 게국지. 6. 호랑가시나무와 함께천리포수목원의 겨울을대표하는 것이 노란색뿔남천이다. 7. 우리나라최대의 해안사구가 있는태안반도에서는 해안습지등 특이한 풍경을 마주할수 있다. 해변길에서 만난습지의 식물들.

‘소담하다’는 표현이 딱 맞게 조성된 수목원의 길과 연못, 나무들 사이로 한옥 지붕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당시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며 한옥과초가집의 철거가 계속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그가 서울 홍제동의 한옥을 그대로 옮겨오기도 하고, 태안 시내의 초가집을 수목원으로 이전해 짓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 건물들은 배롱나무집, 벚나무 집 등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무의 이름을 달고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2009년 수목원을 개방한 것에 이어 2011년에는 민병갈 기념관과 카페가 문을 열었다. 민병갈 기념관에서는 그가 사진으로 남겨둔 1950~60년대 한국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문득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를 찾아 아무도 남기지 않은 그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생각났다. 우리가 미처 기억하고 챙기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대신 남겨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을, 이곳에서 떠올렸다. 태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초가집을 개조한 다정큼나무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짐을 내려놓았다.

1. 갯그렁, 통보리사초 등 낯선 사구식물들이 기묘한 풍경을 선사하는 신두리 해안사구. 2. 오직 바다만이 기다리고 있는태안의 겨울 바다는 고요하기 그지없다. 3. 2011년 개통한 해변길 4코스 솔모랫길.

물텀벵이를 만나다 서산과 태안의 먹거리 하면 흔히 대하가 떠오르지만 사실 겨울철 태안의 식당에 오르는 것은 물텀벵이, 간재미, 키조개 같은 것들이다. <1박 2일>에서 은지원이 한우보다 더 맛있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게국지도 먹고, 물텀벵이탕도 먹기 위해 태안읍 상설시장을 찾았다. 2010년 10여 차례의 화재를 연달아 겪은 태안 시장은 재래시장의 모습을 벗고 지금은 말끔하게 복원되었다. 시장을 구경하기에 앞서 게국지집에 들렀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그렇게 게국지, 게국지 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장 입구 쪽에 자리한 게국지집은 게장과 삼겹살이 맛 좋기로도 이름난 곳으로 아니나 다를까, 점심 시간이 살짝 지났는데도 거의 가득 찬 테이블의 반은 게국지를, 다른 반은 열심히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방사해서 키운 돼지고기라 정말 맛있어요” 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잠시 혹했지만 그래도 태안까지 왔는데 역시 게국지를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인 꽃게매운탕과 게국지가 다른 점이 있다면 김치를 잔뜩 넣고, 단호박을 푹 익혀 국물에 단맛을 더한다는 거다. 중자 크기의 게국지탕에 들어간 게는 네 마리 정도. 별 다른 해물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게에서 우러난 짙은 맛과 단호박의 달달함이 어우러져 언 속을 녹였다.

평소에 게는 아빠가 발라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주머니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준 게는 어찌나 먹기도 쉽던지! 혹시나 놓친 게살이 있을까 바닥까지 닥닥 긁었다. 조금 있으면 시장에서 물텀벵이탕도 먹어야 하는데, 반만 배를 채우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어슬렁 어슬렁 시장을 걸었다. 아무리 저녁 시간 전이라지만 읍내의 가장 큰 시장치고는 너무 한산한 게 아닌가 싶었다. 꾸물꾸물한 날씨 때문인가? 궁금해하며 횟집 앞 수조와 바구니 속에 가득 담긴 해산물을 구경했다. 개불, 해삼, 조개, 오징어, 낙지 모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하지만 오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바로 물텀벵이! 입에 넣는 순간 씹을 틈도 없이 살이 부서진다는 물텀벵이다. 수조 속을 꼼꼼히 살피다가 드디어 물텀벵이를 찾았다. 메기와 아구의 중간쯤처럼 생겼다더니 정말 그랬다. 팔뚝 크기만 한 물텀벵이가 횟집 아주머니의 칼 손잡이에 머리를 두어 번 얻어 맞고 기절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그 이후는 나는 몰라’ 하는 기분으로 새침하게 안쪽으로 자리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화재 이후 새로 지어서인지 노량진시장이나 가락시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한 상 가득 차려 나온 밑반찬도 젓갈, 삼치 등 해산물 천국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물텀벵이 매운탕이 나왔다. 손가락 마디만 한 하얀 살이 정말 뚝뚝 떨어졌다. 맛은 어땠냐고? 정말이지 물텀벵이 같았다. 아무 맛이 없다고 해야 되나. 알찬 살에 짭짤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을 품은 다른 생선들과 달리 물텀벵이는 특별한 맛도 씹히는 재미도 없어서 국물을 데워가며 술 안주로 밤새도록 먹어야 다 먹지 싶었다. 실망스러운 한편, 이곳과 잘 어울리는 생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느리고 유순하다는 충청도, 태안 사람들과 말이다. 다음 일정인 신두리로 향하는 길에는 지치지도 않고 또 박속낙지탕을 먹었다. 이름 그대로 박과 낙지를 같이 넣어 끓여낸 박속낙지탕의 박에서 우러난 국물은 시원했고 통통하게 살 오른 낙지들은 그 슴슴한 국물과 잘 어울렸다. 손으로 찢어 넣은 수제비와 칼국수에서는 도무지 꾸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밑반찬으로 나온 젓갈과 파래까지 고왔다. 아까 먹은 물텀벵이가 다시 떠올랐다.

해안사구로 가자 우리나라 전체의 30%에 달하는 해안사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 태안반도다. 그중에서도 1만5천 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신두 사구는 최대의 해안사구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두리 해안사구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상은 이게 뭐야에 가까웠다. 사구로 향하는 동안 계속되던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과 비교하면 극단적으로 이국적이긴 했지만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정말 뒷동산 같네, 라고 생각하며 사구 속으로 뛰어든 순간 동네 뒷동산의 평화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신두리 해변에서 몰아치는 겨울바람과 모래가 정신없이 뺨을 때렸다. 갯그렁, 통보리사초 등 사구에서 자라나는 앙상하고 이름조차 낯선 사구 식물들의 한가운데에 서니 내가 있는 곳이 다른 행성처럼 낯설었다. 언덕에 오를수록 바람은 정신없이 거세졌다. 나는 사구에 오르기 전에 읽은 해안사구와 관련된 팸플릿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사구라고 하면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바나나 중동 아라비아의 거대한 모래 사막을 연상하기 쉽지만…’. 문장은 큰 따옴표를 달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커졌다. 실제로 나는 2년 전 다녀온 아부다비의 사막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막용 지프를 타고 굽이굽이 다니던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막이 놀이동산 같은 느낌이었다면 겨울의 해안사구는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사구의 꼭대기에 오르니 앞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앞쪽으로 보이는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해변과 해안 사구, 사구 뒤편의 푸른 소나무 군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바다와 사막과 숲이 함께 있다니! 풍경이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존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기묘함이었다. 무엇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너무 거셌고, 사구 중간중간에 형성된 작은 물웅덩이의 수면을 통해 나는 이곳에서 바람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읽을 수 있었다. 과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태안의 작은 사구에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같이 무거운 것들이었다. 냉혹함, 엄정함. 그런 것들 말이다. 옆사람의 이야기조차 들리지 않는, 발이 푹푹 들어가는 사구는 기대 이상의 자연을 보여주었다. 멍해진 정신을 겨우 추스르며 사구를 떠났다.

입구 쪽에 고인 또 하나의 물웅덩이에서는 근처 주민이 키우는 것 같은 집오리들이 자맥질을 하며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삶의 냉혹함에 대해 생각했는데 말이다! 모래바람의 습격 때문일까. 해가 지자 겨울의 태안은 한층 썰렁했다. 시장도 한산하더니 방송에도 나온 이름 큰 횟집도 문을 닫았다. 왜지? 궁금증은 만리포에 와서야 풀렸다. 여름의 번화함을 기억하는 모텔과 횟집, 편의점의 불빛이 반짝이는 이곳에서 겨우 찾은 횟집의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5년 전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의 보상금이 아직도 나오지 않아 사람들이 서울로 집회를 갔단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기억할 것이다. ‘삼성·허베이스피리트호 유류사고’로 불리는 5년 전의 사고로 검게 물들었던 바다를. 새는 온몸에 검은 기름을 꽁꽁 감은 채 죽었고 죽은 물고기들은 바다와 해변을 빈틈없이 채웠다. 사람들은 기름을 걷는 걸 돕기 위해 폐현수막 등을 챙겨 들고 태안으로 향했다. 횟집 아주머니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여기는 빨리 복구된 편이야”라고 말했지만 정작 사건의 주범은 이곳 사람들에게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은 조개탕과 오도독 맛있게 씹히는 간재미가 신기할 뿐이었다. 다시 숙소가 있는 천리포수목원으로 돌아왔다. 천리포에서부터 흘러오는 해조음(海潮音)을 들으며 천천히 잠을 청했다. 다행히 게스트하우스의 온돌 마루는 뜨끈뜨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