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토박이가 전라남도 구례로 터전을 옮겼다. 이제 2년 차에 접어드는 초보 농사꾼이 이야기하는 자연과 벗하는 그 경이로운 경험들.

눈 위의 새 발자국.

눈 위의 새 발자국.

아침, 곤줄박이의 울음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삐삐 삐삐, 삐삐! 아예 침실 쪽 창문에 와서 울어댄다. 어서 일어나 밥을 달라는 거다. 저돌적인 저 녀석은 데크에 내건 대나무발에 매달리거나 모기장 망을 부여잡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암컷으로 짐작되는 작은 놈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녀석들이다. 그러나 한 번 손바닥 위에 앉아 땅콩을 주워 먹은 뒤로는 거침이 없다. 곤줄박이는 사람을 그다지 두려워 않는다. 오히려 곤줄박이를 무서워했던 건 덩치 큰 인간이다. 몸은 작아도 그 달려드는 속도감에 움찔! 마치 예방주사 맞는 듯 팔을 빼냈던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야생의 생명이 처음 손 위에 찾아왔을 때의 그 감동이란! 그 작고 가벼운 몸, 내 손가락을 꽉 쥔 작은 발톱까지.
데크 앞 전선줄은 녀석들의 식탁이다. 큰 놈 먼저, 작은 놈이 그 다음에 교대로 날아와 땅콩 조각을 가져간다. 그리고 두 발 사이에 땅콩을 끼고서는 한 번 쪼아 먹고 두리번거리고, 두 번 쪼아 먹고 또 두리번거리고…. 그렇게 배가 부르고 나면 ‘예외 없이’ 가장 큰 땅콩을 골라 물고 숲으로 날아간다. 거기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지 싶다(작은 땅콩을 물었을 때는 다시 뱉고 큰 걸로 다시 잡아 무는 아주 건방진 녀석들이다). 곤줄박이의 텃새질에, 제대로 된 땅콩은 구경도 못한 박새들에게는 아침으로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접시에 담아준다. 이놈들은 온순하고 알뜰하다. 접시에 담아준 것을 먹기 전에 바닥에 흘린 것부터 깨끗이 해치운다. 데크의 청소부다. 겁이 많아 손바닥 위에는 감히 오르지 못한다.
지난해 늦봄에는 바깥에 내어둔 운동화 박스에 딱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까놓은 적도 있다. 너무 깨끗하면 사람이 안 꼬인다는 말이 있더니만, 나의 ‘너저분한 세간’이 새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다니 예기치 못한 보람이었다. 그리고 새들에게는 미안한 일인 줄 알지만 난생처음 경험하는 사건에, 매일 그 안을 힐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나뭇가지와 깃털로 만든 동그란 둥지에 담긴 여섯 개의 작은 알. 며칠 뒤 그 알들이 하나둘 깨어났고, 이때부터 어미새와 아빠새가 하루 온종일 끝도 없이 먹이를 물어다 그 활짝 벌린 입들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열흘 남짓! 가까이만 가도 제 어미인 줄 알고 입을 벌리던 녀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더니 위대한 ‘첫 비행’을 했다. 어린 새들이 긴 망설임 끝에 하나둘 날아가는 모습, 어미새가 겁 많은 녀석을 어떻게든 날게 하려고 주변을 맴돌며 계속 격려하는 모습은 새삼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티브이 자연 다큐 프로그램에서 보던 흔하디흔한 장면이지만 직접 그 장면을 목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흥분과 감탄을 자아냈다. ‘그래, 날아야지! 어서! 옳지!’

1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 2  부추꽃 위의 호랑나비.  3  거미줄 위의 이슬 방울. 4  산책길에 딴 앵두와 작약. 5  향기롭고 화사한 칡꽃.  6  땅콩을 먹으러 날아온 곤줄박이.

1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 2 부추꽃 위의 호랑나비. 3 거미줄 위의 이슬 방울. 4 산책길에 딴 앵두와 작약. 5 향기롭고 화사한 칡꽃. 6 땅콩을 먹으러 날아온 곤줄박이.

시골에 산다는 것, 자연에 산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이러한 무한한 자연의 모습과 사건들을 마주하는 것이다. 게다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새내기들에게는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하다. 호미질에 놀란 땅강아지와 지렁이의 버둥거림, 괭이질에 은신처를 들킨 두꺼비의 잠 덜 깬 뒤뚱거림, 뱀의 아가리에 들어간 개구리의 필사적인 발버둥, 움찔움찔 땅을 들썩이는 두더지의 터널 공사, 마당 연못에 풀어 기르는 물고기를 노리던 황새, 먹이를 찾아 마당을 노니는 꿩 가족의 단란함, 예쁘게 자란 열무를 싹 뜯어 먹은 고라니, 고구마 밭은 물론 꽃밭까지 뒤집어놓은 멧돼지의 무지막지한 흔적, 쌓아둔 대나무 더미와 함께 들어 올린 뱀, 뱀보다 더 놀란 사람….
감동과 흥분을 주는 것은 크고 작은 생명들뿐만 아니다. 겨울 숲 눈길 위에 찍힌 토끼, 고라니, 멧돼지 그리고 새의 발자국…. 언 땅이 녹을 때면 강으로부터 짙게 피어오르는 안개, 무채색의 숲에 노랗게 터지는 산수유꽃의 발랄함, 고매한 향기가 먼저 발길을 멈추게 하는 매화, 솔숲에 이는 바람에 한바탕 일어나는 송화가루의 향연, 텅 빈 들판을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나기의 장엄함, 등짝을 달구는 여름 햇빛과 탕탕탱탱 홈통을 울리는 낙숫물 소리, 체구는 작아도 온 우주를 울릴 것 같은 풀벌레의 울음소리, 특별히 가꿀 것도 없었는데 열매를 내어주는 어여쁜 과실수들….
처음엔 이름도 모르고, 보아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씩 ‘친밀한 존재’가 되어가면서 휴식과 위로를 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 자연 속에서는 조용한 관찰과 사색의 시간이 친구들과의 수다를 대신한다.
허균의 <숨어사는 즐거움>이란 책의 구절 중에 ‘강산과 풍월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그 주인’이란 말이 있다. 무릎을 치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이라는 게 한가로움이 쉽지 않고, 바쁘지 않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쉬어야 할 주말마저도 이런저런 스케줄로 꽉 차 있어야 보람차게 보낸 듯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 목적이 없는 시간이야말로 내 심신이 쉬는 시간이고, 자연이 찾아들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복 받은 나라에 살고 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덮여 있어 도심이라도 빌딩 숲 바로 너머 큰 산이 있고, 수도 한가운데로 큰 강이 흐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1시간 남짓 안에 자연 속에서의 휴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친구와의 약속을 카페가 아닌 남산 숲, 서울 숲, 홍릉 숲으로 잡는 것, 주말, 막히는 길을 뚫고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부담 대신 작은 텃밭을 빌려 함께 흙을 일구며 땀을 흘리는 데이트, 맛집 순례 대신 도시락을 싸가지고 인근의 산을 찾는 것은 자연으로 향하는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며 수필가인 마스다 마리가 쓴 <주말엔 숲으로>란 만화책이 있다. 간결한 이야기 속에 ‘숲이 주는 선물’에 대해 담은 것인데, 만화가 가진 특유의 웃음과 위트에 더해 삶에 대한 통찰과 진솔함이 담겨 있다. 시골 사는 주인공과 아직 도시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살고 있는 친구들이 숲으로부터 휴식과 삶의 지혜를 얻는 모습은 참으로 예쁘다. 이미 마음이 숲으로 향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추천한다.
살며시 봄비 내리는 아침, 땅이 촉촉해진 참에 일을 좀 하려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섰다. 양파 고랑 주변으로 완두콩을 좀 심어볼 작정으로. 땅에 코를 박고 열심히 완두콩을 투하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곤줄박이 소리! 눈을 들어보니 곤줄박이 앉은 가지 위에 산수유가 점점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첫 꽃, 첫 눈 맞춤! 아, 봄이구나! 너 참 예쁘구나! 그런데 아까는 왜 못 보았지?

 

조용한 바위산을 좋아하는 산양의 은신처. 모니터링을 위한 무인 카메라에 잡힌 산양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조용한 바위산을 좋아하는 산양의 은신처. 모니터링을 위한 무인 카메라에 잡힌 산양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산양을 소개합니다
매년 4월 진행하는 <얼루어>의 그린 캠페인 수익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산양 보호 사업에 기부합니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산양을 소개합니다.
산양의 집 천연기념물 217호,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인 산양은 비무장지대와 설악산, 그리고 울진, 삼척이 주요 서식지다. 바위산을 좋아하고, 시야가 탁 트인 능선이나 바위 처마 아래 조용한 곳을 은신처로 삼는다. 한번 자리를 정하면 그곳을 거의 떠나지 않는다. 산양의 수명은 약 20년이다.
산양의 습성 산양은 철저히 채식만 한다. 연한 이파리와 줄기, 버섯, 도토리, 이끼 등을 먹는 순한 짐승이다. 말랑말랑한 고무 같은 발바닥으로 암벽을 미끄러지지 않고 다니며 같은 개체끼리 의사소통할 때는 뿔을 사용한다. 뿔로 나무를 비비며 영역을 표시한다.
산양은 왜 중요할까? ‘숲 속에 사는 양’이라는 뜻의 산양. 하지만 ‘양’과가 아닌 ‘소’과에 속한다. 산양은 약 200만 년 전 까마득한 원시 형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지만, 전 세계적으로 4종만 존재한다. 대한민국 전역에 서식하던 산양은 1950~1960년대에 개체수가 확 줄어든다. 당시 강원도에 내린 폭설로 먹이가 부족해 민가로 내려온 산양 6천여 마리를 잡은 후로는 개체수가 많이 줄어 멸종위기에 처해 있으며, 천연기념물 217호, 멸종위기종 1급 동물로 정해졌다. 현재 전국에 750여 마리가 생존해 있다. <얼루어>는 2012년부터 녹색연합과 함께 산양을 모니터링하고 구조하는 사업에 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