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진가 김재경은 지난 30년 동안 의연하고 정직하게 서울의 건축물을 기록해왔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간과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그 건축물들을 김재경의 사진으로 다시 만났다.

1 스카라극장(2003년)
단관극장은 1960~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다 텔레비전이 보급됨에 따라 그 명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 시대를 상징한 극장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의한 소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추동력이 시간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화해와 공존을 통해서 더욱 나은 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천천히 가야 한다.
2 조선총독부 청사(1987년)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의 식민 통치를 담당했던 일본 기관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이다. 해방 후 미군정청 청사, 정부수립 후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1996년 철거되었다.

사진현상소에서 일하다가 건축 사진을 접하게 되었고, 그 길로 건축 사진가가 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길 위에서의 작업을 긴 시간 이어오게 한 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나요?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인 건축은 공간과 시간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종합적인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기술과 공학, 미학, 윤리까지도 폭넓게 관련되어 있지요. 그 모든 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봐야 했고, 건축을 통해 그것을 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건축물과 공간을 기록하는 일은 어떠한 피사체를 담는 것보다 까다로운 일이라 짐작됩니다. 작업을 할 때마다 당신을 고민에 빠뜨리는 건 어떤 것들인가요?
건축은 홀로 존재하기보다 주변과 함께합니다. 따라서 그 주변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촬영의 대상이 도시나 마을 같은 집단이 아니고 건축가의 작품인 경우에는 더 신중해집니다.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3 잠실시영아파트(2005년)
최근의 아파트는 점점 고층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성을 얻기 위함이다. 대개 건축 연령이 30년 정도 되면 재건축을 하는데, 노후한 아파트를 재건축한 단지의 아파트는 모두 고층이다. 이런 고층 아파트도 40~50년 후면 또 재건축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4 안양7동, 덕천마을(2010년)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덕천마을은 한 시대의 주거 유형을 간직한 특별한 곳으로, 공동주택 몇 곳은 건축가 없는 건축의 사례를 제시한다. 작은 면적의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형태인데, 공동체를 위한 배려는 부족하지만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한 지혜는 놀랄 만하다.

서울의 많은 건축물은 부숴지고 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건축물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우리 사회의 발전 속도가 빨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역사의 부재는 기억의 망각을 전제할 수밖에 없죠. 개개인의 기억은 집단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있는 많은 건물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이야기들도 흔들릴 것입니다. 건물이 사라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면 언젠가 중심을 잃고 허상을 찾아 거리를 떠도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사라진 건축물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왔습니다. 그중에서 다시 보고 싶고 기록하고 싶은 것을 꼽는다면요?
스카라극장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어요. 당시 관에서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건물주가 허물기로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오랜 시간 시민들에게 문화의 허기를 채워준 몇 안 되는 공간 중의 하나였고, 저 역시 극장과 관련된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오래된 극장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네의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5 삼일고가(2003년)
옛 물길을 재현하기 위해 고가도로가 철거되었다. 사진은 해체 공사가 시작되던 2003년 7월 1일의 모습으로, 이제는 사라진 청계8가의 중고시장을 볼 수 있다. 번영과 쇠락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한쪽만 말할 수 없다.
6 선유도정수장(2001년)
서울 시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던 선유도 정수장이 20여 년 동안 그 역할을 다하고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낡음을 유지한 채 새 생명을 부여한 공간은, 그 자연스러움이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게 되는 건축물은 어떠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나요?
과도한 몸짓의 건축은 부자연스럽죠. 건축이 시대의 요구를 듣고 또 시대에 앞서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 가져오는 환상은 부담스럽습니다. 반면 사람과 사회를 향한 온기를 지닌 건축은 건축가의 마음 또한 고스란히 드러나서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죠.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옛 정수장을 활용한 국내 최초의 재활용생태공원인 선유도공원은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 땅에서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냈어요. 건물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새로 짓기보다 재사용의 우월한 가치를 찾아냈으니 건축의 참된 일면을 보여준 뜻깊은 사건이라 할 수 있죠. 주변에 이런 장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시간과 역사를 간직한, 옛것과 새것의 공존은 시민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7 세운상가(2008년)
세운상가는 1960년대 종로에서부터 퇴계로까지를 가로질러 공중보도로 연결했던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다. 건물의 지상 1층에는 상가들이 자리를 잡고 그 양쪽에 자동차로와 주차 공간이 있다. 2층에는 보행자 전용 통로를 설치했고 3층부터는 주거 공간이었다. 종묘에서 필동 사이 1km에 이르는 선형 공간을 보행 통로로 연결해 상가와 주거가 입체화되도록 계획했던 것이다.
8 삼선동(2003년)
지금 삼선힐스테이트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 있던 집들이다. 비슷한 재료를 사용해 벽, 지붕, 창틀의 모습이 모두 한 형제 같았다. 꼬불꼬불 이어지던 골목길로 연결되어 고만고만한 이웃으로 살아가기에 크게 부족한 점은 없다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건축 사진’의 정의가 궁금합니다.
건축은 3차원의 세계이며 경험과 감각이 필요한 구체적인 실체입니다. 하지만 사진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 평면적일 수밖에 없어요.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은 채, 사진이 보여주는 이미지에 현혹되기 쉽죠. 도시정비 차원이라는 뉴타운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정치, 자본과 관련한 특정한 이해가 부른 결과죠. 사진과 현실을 동일시하여 ‘멋진 건축사진이 보여주는 건축은 좋은 건축이다’라는 생각은 지양해야 합니다.
언젠가 건축 사진가의 역할에 대해 ‘건축가와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건축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집을 짓는다는 건 소박한 바람의 실현이었습니다. 의식주의 한 부분이며 삶이 지속되도록 도와주는 일이었죠. 사회가 발전하면서 그 소박한 바람은 경제적인 고려가 불가피해졌습니다. 그에 따르는 비용은 계층 간 간극과 갈등을 불러왔고요. 삶의 요구에 대응하는 일상의 건축이 상품화되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거주의 목적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현대인이 점점 유목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죠. 화려한 건축에 대비해 현실의 삶의 누추함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나와 이웃의 삶은 계속됩니다. 건축은 우리 삶의 소중한 일부이기에, 건축 사진가에게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9 낙골, 난곡(2001년)
1960년대 철거민 집단 이주 정착 단지로 형성된 난곡(蘭谷)은 2002년 도시 주거지 재개발로 사라진 도시 마을이다. 이곳은 위치상 서울의 신림7동을 이르며, 처음에는 ‘낙골(落骨)’이라고 불렸다. 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채 커다란 쟁반같이 산기슭에 펼쳐져 있었다. 남루했지만 제법 격식을 갖춘 개량식 기와를 얹은 집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건축을 담은 책
1 <Mute 2 : 봉인된 시간> 2011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과 연계하여 발간된 건축 사진집으로, 건축 사진에 대한 명확하고도 확고한 사유를 들여다보게 한다. 현장 노트가 담긴 <셧 클락 건축을 품다>에서는 사진으로 못다 한 건축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김재경 저. 한미사진미술관 펴냄
2 <홍순태 사진집> 서울을 기록한 홍순태 작가의 사진을 집대성한 책이다. 책에서 비중 있게 다룬 1950~1970년대는 작가가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작업한 시기이자, 서울의 과도기적 풍경을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시기라 더욱 의미가 있다. 홍순태 저, 가현문화재단 펴냄
3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기단과 초석, 지붕 등 건축물 한 채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짚어가며 한국 건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궁궐, 사찰, 성곽과 고택, 개인 한옥까지 700여 컷이 넘는 건축 사진을 보고 구조물의 개념과 역할에 대해 읽고 나면 한국 건축에 대한 남다른 심미안을 갖게 될지도. 김도경 저, 현암사 펴냄
4 <정기용 건축 작품집> 건축가 정기용의 자취를 고스란히 담았다. 건축사에 대한 굵은 쟁점을 가로지르는 서정일과의 대담, 어떠한 마음이 모여 어떤 건축을 만들어냈는지를 알 수 있는 건축 사진을 확인하면 정기용과 건축물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알게 된다. 정기용 저, 현실문화연구 펴냄
5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홍순태, 한정식, 김기찬, 주명덕, 강운구, 안세권 등 사진가 13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역사가 한 권의 책에 모였다. 같은 시공간이 작가의 시선에 따라 이렇게도 달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전우용 저, 한미사진미술관 펴냄
6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 정기용은 이 책을 두고 “한국건축의 탐험서이며,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읽어낸 한국건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총 3권의 책을 통해 한국 건축의 구조와 배치, 공간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것은 물론 외관의 표정까지 면밀하게 살핀다. 김봉렬 저, 돌베개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