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쎄시봉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40년 전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통기타 치며 부르던 추억의 명곡과 한결같은 우정은 세월과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반짝반짝 빛난다. 다시 찾아온 봄날, 콘서트 현장에서 만난 쎄시봉 친구들.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은 43년을 함께해온 친구지만 생김도, 음색도, 성격도 참 다르다. 계량한복을 입는 송창식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도인 같은 모습이고, 셔츠에 재킷을 즐겨 입는 윤형주는 빈틈 없이 완벽하다. 후드 티셔츠에 야구 점퍼 차림이 무척 잘 어울리는 김세환은 만년 청춘인 로맨틱 가이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사람이 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고 있다.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은 43년을 함께해온 친구지만 생김도, 음색도, 성격도 참 다르다. 계량한복을 입는 송창식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도인 같은 모습이고, 셔츠에 재킷을 즐겨 입는 윤형주는 빈틈 없이 완벽하다. 후드 티셔츠에 야구 점퍼 차림이 무척 잘 어울리는 김세환은 만년 청춘인 로맨틱 가이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사람이 <쎄시봉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고 있다.

<놀러 와>에 출연한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 쎄시봉 멤버들이 들려준 건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목소리와 감수성, 그리고 우정과 서로에 대한 배려였다. 43년 지기 친구들이 눈빛을 맞추며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니 오래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를 이제야 되찾은 기분이었다. 시 한 편을 읊조리는 듯한 서정적인 가사가 귀에 와 닿는 이들의 음악은 10대 중심의 가요계에서 음악으로부터 소외돼 살아온 40~50대에게는 추억의 노래로, 젊은 세대에게는 기존 음악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신선한 노래로 다가왔다. 좋은 노래와 음악은 세월을 뛰어넘어 무한한 생명력으로 빛난다.

불어로 ‘아주 좋다’는 의미의 쎄시봉(C’est Si Bon)은 1960년대 말 무교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의 이름이다.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면 전축이 없던 시절, 팝송을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입장권을 사면 계란 반숙과 쿨피스로 바꿔주던 그런 시절의 곳이었다. 조영남과 윤형주를 비롯해 당대 많은 음악인이 좋아하는 팝송과 음악을 듣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당시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상벽은 쎄시봉의 산증인이다. 당시 홍대 미대생이었던 그는 홍대 캠퍼스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홍대의 명물’ 송창식을 쎄시봉으로 데려와 무대에 세웠다. 조영남의 첫 데뷔 무대도 지켜봤다. 송창식은 서울예고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을 만큼 성량을 타고났지만 학교를 중퇴하고 홍대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홍대 캠퍼스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쎄시봉에서 그가 처음 부른 노래는 오페라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통기타를 치면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으로 오페라를 부르는 모습은 대중에게 충격과 깊은 감동을 주었다. 클래식에 빠져있던 그는 단아한 자세로 앉아 맑은 목소리로 팝송을 부르는 윤형주를 보고 자유로운 대중음악의 매력을 깨닫는다. 그리고 1968년 2월, 윤형주와 송창식은 트윈폴리오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웨딩케이크>, <하얀 손수건> 등을 히트시키고, 윤형주는 솔로로 활동하며 라디오DJ로, 송창식은 싱어송라이터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윤형주는 1400여 곡의 CM송을 제작해 한국 CM송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새우깡, 롯데껌, 오란씨 등 당대의 유명한 CF의 CM송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보다 4년 뒤에 데뷔한 김세환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윤형주와 함께 <별밤>에 출연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해 1972년 신인상을 탔고 1974년부터 2년 연속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가수왕에 올랐다.

송창식과 윤형주는 47년생, 김세환은 48년생으로, 43년을 함께해온 친구지만 생김도, 음색도, 성격도 참 다르다. 독특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를 가진 송창식은 모든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는 재주를 지녔고, 맑고 고운 미성으로 들려주는 윤형주의 노래는 청아하고 서정적이다. 감미로운 음색을 가진 김세환의 노래는 부드럽고 다정하다. 노래뿐 아니라 즐겨 하는 차림새도 사뭇 다르다. 송창식은 품이 넉넉한 계량한복을 입는데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도인 같다. 셔츠에 재킷을 즐겨 입는 윤형주는 빈틈없이 완벽해 보인다. 후드 티셔츠에 야구 점퍼 차림이 무척 잘 어울리는 김세환은 만년 청춘인 로맨틱 가이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사람이 <쎄시봉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고 있다. 지난 4월 1일 울산에서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공연 두 시간 전 리허설 연습 중인 공연장과 대기실을 찾았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금색 버튼이 달린 남색 재킷에 하늘색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윤형주가 거울 앞에 서서 한창 단장 중이었다. 파우더와 블러셔를 바르고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후드 티셔츠에 노란색 점퍼를 입은 김세환은 피자로 점심을 때우는 중이었다. 피자를 물고 카메라 앞에서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모습이 소년 같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음! 음! 음!” 알고 보니 공연 전 목을 가다듬는 송창식 만의 비법이라고. “니보뚜라베~ 세요 라미 세요 두~” 이따금 오페라도 불렀다. 몇 달째 주말마다 계속된 전국 투어 일정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가득했다. 공연 시작 전부터 대기실 안은 미니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다른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화음을 넣거나 기타를 연주를 하는 식이다. 신나게 기타를 연주하다가도 누군가 인터뷰에 대한 답변을 시작하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며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상대를 빛나게 해주려는 배려가 결국 세 사람 모두를 빛나게 했다. 나이 60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이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공연 전 리허설 중인 윤형주와 김세환. 김세환을 바라보는 윤형주의 눈빛이 참 따뜻하다. 데뷔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리허설을 빼놓지 않는 이들이다. 몇 달째 주말마다 계속된 투어로 지쳤을 법도 한데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가득하다.

공연 전 리허설 중인 윤형주와 김세환. 김세환을 바라보는 윤형주의 눈빛이 참 따뜻하다. 데뷔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리허설을 빼놓지 않는 이들이다. 몇 달째 주말마다 계속된 투어로 지쳤을 법도 한데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가득하다.

데뷔 40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기분이 어떤가요?
윤형주 좋은 친구들과 40년 전으로 돌아가 추억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노래는 늘 해왔고, 옛날 생각과, 함께 나누던 대화와, 늘 부르던 노래를 들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사랑받는다는 게 참 감사하죠. 오랫동안 대중문화로부터 소외되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동안 노래를 열심히 안 불러준 게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공연하고 있어요.
김세환 우리는 쎄시봉을 통해서 추억을 파는 게 아니에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린 변한 게 없어요. 몸은 나이 들었을지 몰라도 생각과 마음은 그대로니까. 우리는 늘 지금처럼 살아왔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를 찾기 시작한 거죠.

벌써 석 달째 거의 매주마다 전국을 돌며 콘서트를 해왔는데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윤형주 현재 하고 있는 사업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는데 공연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내가 아직 사랑받고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고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우리 음악을 듣고 성장했던,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들에게 우리의 음악이 위로가 되어준다는 사실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니까요.
송창식 항상 똑같지 뭐. 공연을 하건 안 하건 연습을 덜하거나 더하는 건 없으니까. 연주와 연습이 다른 건 연주는 해내야 하는 것이고, 목 상태가 안 좋아도 무리를 해서라도 해내야 하는 거니까 그게 좀 다를 뿐이지.
김세환 즐겁고 행복하죠. 콘서트도 즐거우니까 하는 거예요. 공연 끝나고 모여서 소주 한잔하고 재미난 얘기하고 그런 게 재미있으니까. 공연할 때도 오늘은 끝나고 뭘 먹으러 갈까, 무슨 얘기를 하면서 놀까 생각하면 더 힘이 나요.

송창식은 리허설 대신 혼자 연습을 하고 왔는데, 대기실에 와서도 끊임없이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목을 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송창식은 리허설 대신 혼자 연습을 하고 왔는데, 대기실에 와서도 끊임없이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목을 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쎄시봉을 좋아해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상벽 가수들이 오디션에 나와 평가를 받고, 가창력이 뛰어난 일반인이 출연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건 그동안 사람들이 보는 음악이 아닌 듣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껴왔다는 증거예요. 그동안은 가수들이 노래는 부르지 않고 무대에서 보여주기만 했던 거죠. 특히 가요는 열린음악회나 가요무대를 제외하고는 가요계에서 거의 실종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요. 사라졌던 노래가 귀에 들리기 시작하니까 환호하는 거죠.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추억이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신곡일 테고요.
윤형주 요즘은 음악이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가수도 소속사의 획일화된 계산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이윤이라는 게 없었어요. 내가 만원이 있으면 그건 ‘내 돈’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 돈’이었어요. 모자란 것은 보충해주고 나누는 관계였죠.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외엔 타산적이지 않았어요. 송창식과 서로 약속한 게 있어요. 둘 중 한 명이 공연을 하고 다른 한 명이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면 돈 관계는 절대 만들지 말자고. 그런 것들이 요즘 세대에게는 색다르게 느껴졌을 거예요.

세 분이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송창식 늘 똑같다니까. 나야 많이 달라지긴 했지. 목소리도 굵어지고 몸도 굵어지고. 20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1그램씩 쪘으니까. 지금은 90킬로그램 가까이 나가지 아마. 아직은 몸을 더 키워야 돼요. 그래야 지금보다 소리가 더 잘 나올 수 있으니까.
김세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뭐. 무겁고 심각하고 그런 거 재미없잖아요.
윤형주당시 우리는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좌절하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세련되진 않았지만 촌스러운 것을 부끄러워하진 않았어요. 청바지 하나를 사 입으려고 해도 청바지를 파는 곳이 없었던 시대라 아랫부분이 넓게 퍼지는 판탈롱에 굽이 7센티나 되는 구두를 신고 명동 시내를 다 쓸고 다녔어요. 이번 공연에서 트윈폴리오 파트 때 부르는 곡 중에 <하얀 손수건>이라는 곡이 있어요. ‘헤어지자고 보낸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이란 가사를 보면 참 청승맞아요. 헤어지는데 손수건을 왜 접어 보내.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촌스러운 가사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세 분의 인생에 쎄시봉 친구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송창식 좋은 친구들이지 뭐. 우리 성격이 아주 보충적이라서 그래. 내가 없는 걸 윤형주가 가졌고 우리 둘이 없는 걸 세환이가 가졌고 사람이 비슷하면 저 사람이 뭘 잘 못하면 잘 보이는데, 비슷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잘못해도 내가 잘 모른다고. 그러니까 서로 부딪힐 일이 없는 거지. 윤형주가 나랑 비슷했으면 많이 부딪혔겠지.